뉘른베르크성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시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의 뉘른베르크는 역사와 문화가 풍부한 도시다. 바이에른의 중심도시인 뮌헨이 산업의 중심지라면 뉘른베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살던 역사적 도시이다. 오래된 성과 통나무로 장식된 낡은 가옥 등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요즘 중세를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는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역사가 깊고 게르만의 전통이 강했던 탓에 독일 제국의 부활을 꿈꾸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최고의 정치선전장으로 활용되었던 흑역사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집중적인 폭격을 받고 도시가 거의 파괴되는 불행을 겪었다. 종전 후 전범재판도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뉘른베르크의 구시가(Altstadt)는 중세 도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성(城)은 구시가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거처였던 성 내부에는 황제의 예배당 등이 있으며, 지금은 중세 기사의 갑옷과 무기 등도 전시되고 있다. 성의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 신성로마제국이 명목상의 제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의 가장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면 구시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붉은색 지붕들 사이로 교회의 높은 첨탑들이 솟아 있다.
구시가로 내려가면 독일의 전통가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3~5층의 가옥들 외벽에 노출된 통나무 기둥들이 고졸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세계로 이끌어가는 듯하다.
나치당 집회소. 나치당은 이곳 담벼락 아래에 서치라이트를 설치하고 밤하늘을 향해 빛을 발사해 거대한 신전을 재현하는 듯한 효과를 연출했다.
중세 목판화의 대가 뒤러의 집
당시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건물은 성 바로 아래에 위치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의 집이다. 르네상스 시대 독일 미술을 대표하는 뒤러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대가들과 한 시대를 살면서 통교했다. 뒤러는 당시에 이미 목판화를 유행시키면서 사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미술가로 이름 높다. 뒤러의 집은 5층짜리 건물인데 상부 3개층 외벽은 통나무 기둥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현재 뒤러 박물관으로 쓰이는 집 안에는 뒤러의 작품 '아담과 이브' '막시밀리안 황제상' 등과 목판화 제작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구 시가에 있는 프라우엔교회(Frauenkirche)는 화려한 외관을 자랑한다. 14세기 유럽에서는 흑사병으로 많은 주민들이 숨지자 유대인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씌워 학살하고 추방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 교회도 흑사병 직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파괴를 명한 유대인 교회당 자리에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세워진 것이다. 고딕양식의 벽돌건물인 교회는 전면부 상단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좌상이 있다. 정오가 되면 종이 울리며 황제상 앞으로 그를 선출한 7인의 공작상들이 차례로 지나간다. 프라우엔교회 앞 광장에서는 유명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뒤러가 그린 막시밀리언 황제 초상화. 그는 뒤러의 후원자였다.
프라우엔교회. 전면부 상단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상이 있다.
신성로마제국 상징하는 '아름다운 분수'
프라우엔 교회 인근에는 14세기 작품인 '아름다운 분수(Schöner Brunnen)'가 설치되어 있다. 19m 높이의 첨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덕목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4대 복음서를 기록한 성인 등 기독교의 주요 인물들을 비롯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권을 가졌던 공작상 등이 있는데, 가장 높은 자리에는 유대민족의 출애굽을 지도한 모세와 성경 속 예언자 7명의 조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생생한 조각상이 중세 독일 목조각의 특징인 듯하다.
조각상 중 십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상을 쳐다보고 있는데 한 독일 청년이 첨탑을 둘러싸고 있는 철제 울타리와 상단의 조그만 황금빛 원형 고리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을 알려준다. 이 울타리를 만든 대장장이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구혼자들이 몰려들자 울타리에 원형고리를 장착하고 이를 풀어낸 자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전설이 이 고리를 돌리는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는 내용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전설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디테일한 곳까지도 정성을 기울이는 독일인다운 완벽성이 만들어낸 얘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뉘른베르크에서 중세 독일 조각의 아름다움을 찾아보려면 로렌츠교회에 반드시 가봐야 한다. 로렌츠교회의 제단 앞에 걸려 있는 목제조각 '수태고지(受胎告知)'는 중세 최고의 목제조각가인 바이트 슈토스(1450~1533)가 제작한 것이다. 당대 최고 목제조각가의 솜씨가 너무 좋아 사람들로부터 악마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고 한다. 슈토스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 주민들을 초청하여 나무 천사상을 조각했는데, 그 즉시 목제 천사상이 살아 있는 천사로 변하여 날아갔다는 전설도 있다.
로렌츠교회의 수태고지상은 성모 마리아와 구세주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천사장 가브리엘의 모습이 장미꽃으로 만들어진 원형 틀 안에 구현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상의 머리 위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흰색 비둘기가 앉아 있다. 이 목제조각은 1517년부터 로렌츠교회의 제단 앞에 걸렸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500년이 지난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미완의 나치스 의사당 건물. 현재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수태고지 목제 조각
슈토스가 이 작품을 완성했을 당시 뉘른베르크에도 종교개혁의 파장이 밀려와 가톨릭교가 배척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슈토스의 수태고지도 예수보다 성모 마리아를 더 위대하게 보이게 한다는 이유로 파괴될 위기에 처하거나 천으로 가려지는 등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 작품이 대중에 공개된 것은 19세기부터였다.
제발두스교회는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제발두스 성인은 9세기경 영국에서 도래한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은둔의 성직자로 중세에는 뉘른베르크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되었다. 15세기경 완공된 제발두스교회는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양식을 혼합한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 외벽에는 기이한 형상을 담은 부조들이 있다. 아마도 중세의 민간신앙이 반영된 듯하다.
뉘른베르크의 구시가에는 위에 설명한 대로 중세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교회와 건물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축물들은 2차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 구시가의 모습은 전후에 복구된 것이다.
뉘른베르크가 2차대전 중에 연합군의 집중적인 폭격을 받은 이유는 이 도시가 나치스당의 정신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의 부활을 꿈꾸던 아돌프 히틀러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으며 게르만의 역사와 문화가 잘 보존되어온 뉘른베르크가 정치선전을 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장소라고 판단했다.
독일 나치당은 뉘른베르크에서 치밀하게 계획된 대규모 야간집회를 통해 정치선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현재 구도심 앞 중앙역에서 트램을 타고 15분만 가면 당시 나치당의 집회가 열렸던 장소를 찾아볼 수 있다.
목판화의 대가 뒤러 하우스.
14세기 작품인 ‘아름다운 분수’.
검은 신전 같은 나치당 집회소
나치당 집회소에는 여러 건축물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장소는 집회가 열리던 제펠린 필드(Zeppelin Field)와 미완의 의사당 건물이다.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지만 절반가량은 보존되고 있다.
집회가 열리던 현장에 가보니 거대한 적색벽돌로 이루어진 높은 담벼락으로 숨이 막히는 듯했다. 히틀러가 뉘른베르크에 게르만식 콜로세움을 건설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회에는 최대 15만 당원이 참석했으며 담벼락 아래 관람석에는 수천 명이 착석하였다고 한다. 히틀러는 집회가 열리는 밤이면 이 거대한 벽 앞에 수많은 서치라이트를 설치하고 어둠을 향해 빛을 쏘았다. 마치 검은 하늘을 지붕으로 삼아 거대한 신전을 건설한 듯한 착각을 군중들에게 선사했다. 감동한 10만 군중을 상대로 히틀러는 독일민족의 우수성과 반유대주의를 토해냈다.
히틀러는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뉘른베르크 집회를 여섯 차례나 열었다. 뉘른베르크 집회 장면은 녹화되어 나치당의 선전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5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유대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이른바 뉘른베르크법이 통과되었다. 뉘른베르크법은 그 후에 이어진 유대인 말살정책의 법률적 토대가 되었다.
2차대전 중 뉘른베르크가 연합군의 집중적인 폭격을 받은 데는 뉘른베르크가 당시 독일의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치당의 중심지를 초토화시켜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차대전 종전 직후에는 나치 지도자들에 대한 전범재판이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다. 1945년부터 1년간 진행된 이 재판에서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등 12명의 악명 높은 나치 지도자들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처형되었다. 이 재판에서는 상부 명령만 수행했다는 이유로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판례가 확립됐다. 나치전범에 대한 재판을 바탕으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설치되기도 했다. 당시 전범재판이 열렸던 장소는 지금도 역사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