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본문: 시 45편
- 제목: 하나의 비유로 전체를 보지마.
◆ 기도
A형 독감에 몸이 좋지 않아, 원고 마감이 늦어질까 묵상노트를 이제사 폈습니다. 원고도 잘 넘겼고 말씀도 마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아버지, 긍휼이 여기사 생명의 말씀을 주옵소서.
◆ 본문살핌
45편에는 「왕의 결혼식 노래」 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1절의 '좋은말' 로 지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어진 것을 의미할 수 있다(GBS). 즉 대언적 성격의 축복시라고 볼 수 있겠다. 2-9절은 신부가 결혼할 왕의 뛰어난 능력과 성품, 부요함, 강함 등에 대해서 찬탄하고 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며 영원히 계시는데(45:6) 왕 역시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니 하나님께서 그 왕을 즐거이 기름부어 높이시리라 한다(45:7). 시민은 딸(아마도 결혼당사자)에게 너의 원 백성과 네 아비 집을 잊으라 한다. 그리하면 왕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 것이며, 그가 너의 주인이니 그를 경배하라 명한다(45:10-11). 왕의 딸과 아들들은 복락을 누릴 것이며 왕궁의 좋은 것으로 영화를 누릴 것이다. 또한 온 세계의 군왕이 장차 될 것이다.
◆ 묵상
요즘 어떤 아내도 남편에게 경배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가 왕일 때는, 자기 남편이기도 하지만 자신 역시 그 나라의 한 일원으로서, 최고 통치자의 권위에 합당한 예와 자세를 갖출 필요가 있다. 이를 남녀 평등사상과 혼동하면 힘들어진다. 쉬운 예로, 국무회의에서 결정권자는 대통령이지 영부인이 아니다. 그녀가 나름 어떤 의견을 사석에서 개진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걸 수용하고 안하고는 대통령의 권한이자 책무다. 대통령 역시, 자기 부인에게라도 그 책무를 전가해서는 안된다. 본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국민에게 도리가 아니고 그럴 권리도 없다.
시인의 노래는 아가서처럼 결혼할 여인 자신에게보다는 왕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왕과 혼인하여 누리게 될 것들에 대해서 서술한다. 이중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은 왕 자체가 괜찮은 사람이란 부분이다(45:2-9). 그는 용사와도 같고,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해 위엄을 세우고 전쟁에 임하는 자다. 그는 정의를 아끼고 악을 미워하며 그의 가진 모든 것들도 왕이란 이름에 걸맞게 부요하고 풍족하다.
나 역시 왕과 결혼한 자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잔치를 할 존재들이 성도들이라고 표현했다. 예표, 비유는 어느 한 부분을 설명하는데 탁월함이 있다. 그러나 그 부분을 벗어나서 광대하게 해석을 적용하려하면 부작용이 따른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니까 남자 신도들도 성전환을 하게 되는거냐든지, 예배시간에 기도하며 "신랑 예수님, 사랑해요. 쪽~ 아잉♡" 이런 식으로 육적인 현실남편처럼 대하는 태도는 과도하다 볼 수 있다. 좀 모자란 사람들이다.
예수께선 자신과 신자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 성부하나님은 포도원의 농부로 묘사했는데, 그러는 한편 아버지와 아들 안에 함께 거하는, 성부와 성자와 신자가 연합된 사귐의 상태도 말씀하셨다. 그러면 종합적으로 포도나무와 농부가 하나로 붙어있는 식물형 괴인이라도 된다고 결론해야 하는가? 아니다. 신랑 비유를 가지고 실제 자기남편 대하듯 하는 것도 그런 일종의 과잉해석, 어리석은 망상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서 신랑역할을 하셔서 자신에게 성적인 오르가즘도 주신다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다. 정상적인 생각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성도들이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있다는 것을 왕과 결혼했다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을 너무 여성(신부)의 역할에 과몰입하여 말씀을 해석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좋을 게 없다.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의적 해석과 몽상의 함정이 되기 쉽다.
왕과 결혼했는데 왕이 나쁜왕이면 큰일이다. 여러모로 안좋다. 다행히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공의와 정의 사랑하고 온유와 인자로 백성을 구원할 마음을 내시는 분이다.
오늘은 몹시 몽롱하다. 나는 다행히 열은 높지 않고 콧물과 가래, 어지럼증이 주 증상으로 왔다. A형 독감이 세지만 타미플루가 더 센 것 같다. 계속 약을 먹으니 버틸만하다. 오늘까지 마감인 원고도 잘 넘겼다. 11시에 가까스로 원고를 업로드하고 1시간 남은 오늘을 기뻐하여 말씀을 폈다. 뭘까? 뭐가 나를 이 시간에, 몽롱한 약 기운과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잘됐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를 꺼내들게 했을까?
이 시간이 나에게 확실히 유익하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은 지독히도 이기적이어서, 내게 득이 되지 않으면 도통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니, 매일 말씀 앞에 나가는 것이, 그때는 미적지근하고 별것 없어 보여도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버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즉, 나와 결혼한 왕이, 살아보니 정말 잘났기 때문에, 그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의리도 복종도 신하노릇도 아니고, 그전에, 예수에게만 내 생명이 있고 아버지의 말씀만이 내 양식이 됨을 체득한 탓이다. 이제 11시56분. 왠지 행복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 기도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긍휼히 여겨 주시고, 내일의 새로운 호흡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