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은 단순히 연꽃이라는 뜻이며, 이런 단순한 의미 때문에 '부용산'이란 이름의 산은 전국에 여러 개가 있으나, '부용산' 이노래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산(고도 193m)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곡의 작사가인 박기동은 벌교 출신으로 목포 항도여중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박기동에게는 박영애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당시로선 고치기 힘든 병이었던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24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박기동은 여동생을 그리워 하며 시를 한편 썼는데 그 시가 바로 부용산이었다.
시가 너무 애잔하고 아름다워서 이 시를 접하게 된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안성현은 자신이 가르치던 16살 여제자 김경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 슬픔에 이 시에 곡을 붙여서 노래가 완성되었다.
이후 이듬해인 1948년에 항도여중 조희관 교장이 이 곡을 알게되고 항도여중 학예회에서 처음 이 노래를 학생들을 통해 발표했는데 너무도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인지라 금새 목포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전라도 각지로 퍼져나가 많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곡의 창작 배경을 두고 박기동의 고향인 벌교에서는 박기동이 요절한 누이를 그리워 하며 만든 노래다, 목포에서는 아끼던 여제자의 죽음에 슬퍼해서 만든 노래다라며 한때 창작배경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이민갔던 박기동이 저런 배경을 밝히면서 정리되었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금지곡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부용산은 당시 음반으로 취입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 금지곡으로 지정할 수 있는 물리적인 여건이 되지 않았다. 부용산의 악보 역시 항도여고 학생들이 수기로 써내려간 것이 유일한 기록으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부용산은 민중가요이면서도 구전가요에 해당했다. 가슴을 저미는 시와 애닯은 곡조 때문에 당시 한 많은 국민들이 버릇처럼 즐겨 불렀고, 그들 중에 빨치산들 역시 있었을 뿐이다. 부용산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와전이다.
또한 작곡가 안성현이 월북했다는 사실도 이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는 와전에 한 몫 했다. 안성현은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북은 예술인들의 천국이라는 무용인 최승희의 권유를 따라 처를 남겨둔 채 월북하여 2006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여담이지만 안성현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조카라는 설이 있었다. 그래서 안막의 영향으로 월북한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안막과 안성현은 서로 고향이 다르기 때문에 삼촌 조카사이는 아닌것 같다고 한다. 만약 안성현이 안막의 조카라면 안막과 최승희가 숙청당할때 철저한 연좌제 사회인 북한에서 안성현이 살아남은 이유를 해명하기 힘들다. 북한에서 인민예술가 칭호까지 받은걸로 미루어보면 안막과 안성현은 상관없는 인물이 분명해보인다.
부용산은 1970, 1980년대 운동권에서 저항적인 내용의 노래로 재해석되었다. 사실 저항가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1960~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운동권에서는 이 노래를 저항가요로 많이 불렀다. 그외에도 노래는 전해내려 왔지만 작자미상의 노래로 구전될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밖에 없었던 것이 작곡자인 안성현은 월북해버렸고 작시자인 박기동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부용산 시를 지었다는것을 철저히 숨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부용산의 진짜 창작배경은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후 1998년에서야 박기동의 제자인 경기대 김효자 교수가 부용산의 원본을 발굴하면서 세상에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이틀에 걸쳐서 부용산의 사연을 기고하면서 세상에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다.
호주로 이민가 있던 박기동은 부용산이 재조명되면서 2002년 일시 귀국해 산문집 "부용산"을 출판했고 창작 배경을 정리해주었다. 이후 2004년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해 2005년 서울에서 8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부용산은 본래 1절만 있었으나, 1998년에 원로 연극인 김성옥이 호주로 박기동을 찾아와 2절을 짓는게 어떤가라고 권했다고 한다. 이에 박기동은 자신의 한많은 삶을 회고하는듯 2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여러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고 녹음했는데 대표적으로 안치환, 한영애, 이동원등의 버전이 유명하다.
부용산 산허리엔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