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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자비를 배우라
누가복음 6:27-38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일곱째 주일이다. 지금 우리는 봄이 오는 속살거리는 소문을 마주한다.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도 지났다. 바야흐로 기후는 새봄으로 바뀔 것이다. 새봄이 다가오는데, 나는 어떤 희망의 씨앗을 준비하고 있는가?
주현절은 봄을 맞이하는 절기이다. 헨리 나우웬은 주현절을 가리켜 “사랑과 마주친 계절”이라고 고백하였다. ‘주현’은 마치 신년에 왕이 지방을 순시하듯,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따듯한 심방을 맞이하는 날인 것이다.
봄에 대한 단어들을 떠 올려보았다. ‘봄날, 봄볕, 봄 하늘, 봄 처녀, 봄나물, 봄비, 봄 소풍, 꽃 봄, 봄버들, 봄 바다, 봄 녘, 봄 그늘, 봄 꿈 그리고 춘풍연가(春風戀歌)’이다.
하나님의 달력으로 따지면 진정한 봄맞이는 주현절에서 사순절로, 성큼성큼 시간의 자취를 옮기다가 마침내 온 세상은 부활의 기지개를 활짝 켤 것이다. 이 기간은 봄빛 얼굴을 하신 예수님을 닮으려는 거울과 같다.
1)
오늘 설교 제목은 ‘큰 자비를 배우라’이다. 따라 배워야 할 선생님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본문은 누가복음의 산상설교 내용 중 일부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서도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 예수님처럼 살다 가는 어쩌면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으로는 바보짓처럼 보여도, 하나님 안에서 바른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동안 알았던 율법에 대해 재해석하신다. 그 말씀은 모세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는다. 예수님은 율법을 새롭게 이해할 뿐 아니라, 아예 뜯어고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하나님과 직통하듯 말씀하니, 사람들은 경악한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7-28).
구약의 율법은 단호하다. 한 마디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마 5:38)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에 반하는 것처럼 들린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 복수를 미덕으로 여겼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자식의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원수는 항상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인과응보의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율법에서 복수를 보자. 구약 시대에 원수에 대한 복수는 무제한적이었다. 다만 율법은 복수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당한 만큼만 복수하라는 의미다. 공적으로 사적 복수를 허용하되, 단 똑같은 방식과 내용으로만 복수하라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 몹시 잔인해 보이지만, 그 진심은 과도한 보복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이 하나를 부러뜨리면, 같은 방법으로 상대방의 이 하나만 부러뜨려야 한다. 언뜻 공평해 보인다. 적어도 그래야 피차 손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이 필요한 것은 그 시대의 복수 관념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이 율법의 제정 배경은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완전히 다르게 말씀하신다. 아예 복수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29).
어떻게 이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뺨 저 빰’, ‘겉옷 속옷’ 논리는 지나친 패배주의처럼 들린다.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 아닌가? 니체의 말대로 약자의 도덕, 노예의 도덕처럼 들린다. 우리 시대에 수용하기 어려운 바보윤리이다.
아주 건장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 시비 끝에 멱살을 잡혔다. 그러나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잘 참아 주먹이 날아가지는 않았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부터 참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주먹은 억지로 참았지만, 입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마디 뱉었다. “이놈아, 예수는 내가 믿고, 구원은 네가 받은 줄 알아라.”
예수님은 더 능동적인 행동을 취하라고 하신다. 인내심조차도 넘어서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폭력의 정도를 적절히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무장해제까지 나아가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비결은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계명 위에 우뚝 서 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32).
이러한 정신에서 복음의 황금율이 나왔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1).
참된 복수는 원수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일이다. 달라는 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주는 일이다. 인간의 내적인 요청에 대해 사랑의 응답을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그 모델이 되셨다. 이것이 십자가 사랑이다.
2)
원수사랑은 산상설교의 백미로, 전혀 새로운 메시지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윤리를 요약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7-18).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32).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33).
그런 조건부 사랑, 기브앤드테이크 사랑은 남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일종의 거래 관계이지, 참사랑은 못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과 문안은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나, 이방인도 늘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뛰어넘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결론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36).
‘개척자들’이란 단체가 있다. 30년 전 용산의 보광중앙교회 청년들이 기도하면서 시작한 것이 발전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세계 안에서 화해 사역이다. 20년 전에 내가 쓴 십자가 책에서 그들의 로고를 소개하였다. ‘맨발 십자가’이다.
개척자들은 특히 동남아시아 티모르섬에 회원들을 파견하였다. 티모르 섬은 둘로 분단되어 서쪽은 인도네시아가 지배하고, 동쪽은 2002년에 독립하여 동티모르가 되었다.
동티모르가 독립운동을 할 때 여론이 찬반으로 나뉘었다. 결국 애국이란 이름으로 이웃을 살해하고, 불사르고, 몹쓸 짓을 많이 하였다. 동티모르의 독립을 훼방하고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을 인도네시아는 애국자로 환영하였고, 응급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후 인도네시아는 서티모르를 버렸다. 서티모르는 물도 부족하고, 토지 다툼으로 끊임없이 분쟁에 휩싸였다. 티모르 섬이 동-서로 분단된 이후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이제 고향이 있는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곳에는 정든 집과 농사지을 땅과 콸콸 쏟아지는 물이 있다.
그런데 용기가 없다. 비인도적인 일을 저지른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억지로 인도네시아 난민촌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가?
개척자들의 사역은 그들 사이에서 영상우편배달부 노릇을 하는 것이다. 난민촌의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비디오 편지를 만들어 국경을 넘어 전달해 주고, 또 답장 비디오를 만들어 오는 것이다. 영상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사랑하는 친척과 이웃의 이름을 부르면서 목이 메고, 용서를 빌고, 돌아가고 싶음을 사정한다. 사랑을 고백한다. 비록 당장은 만날 수 없지만 조금씩 화해하면서 그 날을 준비하는 것이다.
개척자들의 사역은 얼마나 고귀한가? 주소가 제대로 없는 신생국가 동티모르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해변가 모모 마을의 큰 망고나무 뒤 바위 옆집의 스테판’을 찾기 위해 숱하게 닮은 비슷한 지형을 뒤져 발품을 팔아야 한다. 수없이 많은 스테판들 중에서 진짜 스테판을 찾기 위해 발바닥이 닳도록 수고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길 위에서, 숲속에서 수많은 현지인들에게 천사 같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원수사랑은 이렇게 가능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삶에 굳어진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나는 남북관계도, 지금 찢겨진 우리 사회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부모 자식도 마음이 갈라지고, 교인 간에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인끼리도 대립하고 갈등하는 진통을 겪으며 예수님 진실하게 믿기가 참 어렵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내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다운가? 과연 나의 그리스도인 됨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인가? 하나님 말씀은 아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렇게 살라는 계명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그 자비를 닮아가는 ‘거룩한 일’이다. 그 거룩함은 마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자기의 공동체 안에서 증거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타인에 대해 생명과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비난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속이지 말고, 부당하게 대우하지 말고, 억압하지 말고, 장애인 차별하지 말고, 세력있는 사람이라고 두둔하지 말고, 사람을 비방하지 말고,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원수를 갚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 한마디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사랑,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다. 나는 나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따듯한 시선에 의지하여 산다. 하나님은 나를 부정적인 눈이 아니라 끝까지 나를 긍정해 주신다. 우리는 그 은혜로 사는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데모스테네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진리와 정의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3)
산상설교는 예수님이 그 말씀으로, 또 삶으로 생생하게 체현하신 계명이다. 우리에게 강요하는 의무적 윤리가 아니다. 우리가 닮고 참여해야 할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 2:5)을 닮아가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어떻게 가능한가? 아마 지레 포기할지 모른다. 생전에 현대 정주영 회장이 자주 한 말이 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개척자였다. 정 회장은 자기 임원과 직원들이 막막한 과제 앞에서 이런 변명, 저런 이유를 댈 때마다 이렇게 되묻는다고 한다. “해 봤어?” 지식만 갖고 될 일이 아니라, 도전하여 성공이든, 실패든 경험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해 봤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행복은 경쟁으로 이겨서 되는 일이 아니다. 행복은 복수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일용할 기쁨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성품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암송하는 주기도문을 보라. 그런 하늘의 성품이 내게 임하기를 기도하라.
기도는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고,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그 말은 기도는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기도는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의지, 곧 우리의 온 마음이 그리스도의 기도에 담길 때, 우리의 기도는 바른 기도가 된다. 우리는 겸손히 주님께 기도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인생의 걸음을 뗄 때마다 날마다 구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든 사람, 즉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더 나아가 은혜를 모르는 자들까지 사랑해야 한다. 주님의 큰 자비를 배우면서, 소소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서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바보짓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에게 미련해 보여도 그런 온전한 사랑을 추구하라고 하신다. 사랑은 모든 계명 위에 우뚝 서 있다.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복음의 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큰 자비를 배움으로써 그 거룩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