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라고 헌 말은 옛날에는 없었지만
송담 큰스님
활구참선(活句參禪)은 화두를,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가지고, 그 화두라고 허는 것은 의심으로 관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없이 들이다보고 고요한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것은 활구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참선을 잘못허면 고요한 것을 들여다보고 그 고요하고 적적한 그 경지에 따악 잠겨있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데 그것은 묵조사선(黙照死禪)이라고 해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삿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소의지하(小疑之下)에 소오(小悟)하고, 적은 의심에서는 적게 깨닫고,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의심이 크고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크게 깨닫는다.」
무의지하(無疑之下)에 무오(無悟)다, 의심이 없으면 깨닫... 깨달음이 없다.
조사스님께서 그리 말씀허셨습니다.
활구참선은 의심이 근본이고 의심이 바로 공부해나가는 요점인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이미 화두를 타고 참선공부를 하신 분도 많이 있고 오늘 화두를 탈랴고 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화두라고 헌 말은 옛날에는 없었지만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그 화두를 주어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허도록 그런 참 묘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육조스님께서... 육조단경을 보신 분은 알겠지마는 한 물견이 있으니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으니, 소소영영하기를 해와 달과 같고, 그러헌 그 물견이 대관절 무엇이냐?
그런 법문을 허셨는데 그것이 바로 ‘시삼마(是甚麽)’화두인 것입니다. ‘이 무엇고?’ 화두입니다. 그렇게 내려오던 것을 임제스님께서 정식으로 체계를 세워서 화두공안을 참구허도록 그렇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 무엇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눈으로 볼 때는 참... 참선이... 참선을 헐 줄 모르는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면 보는 데로 쫓아가서 분별심을 내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 나는 데를 따라가가지고 분별심을 내고 번뇌와 망상을 내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라고 허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일어나가지고 발전... 이리저리 발전했다가 결국은 꺼지는데 그 생각은 우리 중생들은 그게 다 번뇌요 망상이요 생사윤회에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이 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그리 쫓아가지 않고 그 듣는 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되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기분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썽이 나거나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 나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거기에 즉해서 ‘이 뭣고?’
또 숨을 떠억 들어마셔가지고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허면, 썽냈던 마음도 가라앉고 미워허던 생각도 가라앉고 생각 생각을 그렇게 단속해나가고 잡두리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은 이 사바세계, 생로병사가 곤두박질치는 이 사바세계에 있어서도 이 활구참선을 바로 알고 바로 단속해나가면, 마치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그 이파리에도 때가 묻지 않고 거기서 피는 연꽃도 조끔도 더러운 것이 묻지 않고 향그러... 향그러운 연꽃이 피어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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