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여행5 - 하기시에서 메이지유신을 만든 주역들의 생가를 구경하다!
시모노세키에서 특급기차를 타고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북상해 나가토(長門 장문) 를 거쳐
두시간만에 모리씨가 다스리던 옛 조슈번의 수도인 히가시하기 (東秋 동하기)
역에 도착하는데.... 동해 바다에 하기 (秋) 시는 언덕 위에 하기성이 자리하고 성의
아래 무사촌이 형성되었는데, 강 건너에는 요시다 쇼인 이 태어난 마쓰모토촌 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소도시라 인구가 줄어들다 보니 이제는 특급이 없어졌으니... 시모노세키 에서 후쓰
(普通 보통, 완행) 를 타야 하는데, 열차에 따라서는 나가토 長門(장문) 역에서 한번
갈아타거나, 또는 고구시 小串(소환) 역 과 나가토 長門(장문) 역에서 2번 갈아 타야 합니다.
조슈번의 수도인 하기시에서 오늘날 천수각은 물론이고 주성인 하기성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것은..... 조슈번의 무사들이 주동하여 260년을 이어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느뜨리고 일왕(천황) 을 옹립하는 메이지유신 을 이룬 후에는!
3년 후인 1871년에 260여개 번 들이 나라를 일왕(천황) 에게 바치는 폐번치현 을 단행할
때,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조슈번이 솔선수범 해서 성을 허물어버렸기 때문 입니다.
누군들 수백년을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가며 이어온 터전인 성을 허물고 싶었겠습니까마는?
다른 번들도 조상의 유적을 허물고 싶지는 않으니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조슈번이 먼저
허문 것이라.... 그런데 일본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기차가 하기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시의 외곽에 서는 것은.... 하기 시내 가 모두 조상들의 유적지 이기 때문 입니다.
때문에 시모노세키에서 특급기차 를 타고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북상하면 장문시 를 거쳐
두시간만에 하기시의 외곽인 히가시하기 (東秋 동하기) 역에 내려야 하는 것이지요.
혹은 돗토리현 요나꼬 에서 마쓰에와 이즈모를 거쳐 야마구치시로 가는 삼거리인 마스다
ますだ 益田(익전) 역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동해 바다를 끼고 계속 내려와도 됩니다.
하기(秋) 시내 무사촌 거리인 부케야시키 武家屋敦 (무가옥돈) 는 100년 전에 발간된 지도를 들고도
집을 찾을수 있을 정도로 개발을 철저히 금지 하고 "옛 집들을 보존" 하는데 공을 들여왔습니다.
여기 하기(秋 추) 시 출신의 선각자 라는 요시다 쇼인은 전국을 주유하다가, 에도만에 나타난
미국 페리제독의 "구로후네" 를 목격하고 놀란 후에는 "존왕양이파" 로 뜻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고는 고향인 하기(秋 추)시로 돌아와서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라는 학숙 을 세우고는
"맹자" 를 강의해 불과 14개월만에 90명의 제자를 길렀는데.... 모두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됩니다.
제자들 중에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아베 신조 총리의 외고조부인데 1894년 동학농민이 궐기하자 4천명을
이끌고 제물포에 상륙해 서울에 무혈입성해서는.... 경복궁으로 쳐들어가서 전투 두어시간만에 고종을
포로로 잡아 조선군의 항복을 받고는 아산으로 내려가 청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함락하니 청일전쟁 입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이룩하는 여기 하기시의 사무라이들은 대개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 로,
80명으로 거병해 300명 부대로 4천명 조슈번 사무라이 부대를 물리치고, 1천명 으로
2만명이 지키는 막부 규슈 고쿠라성을 함락시킨 "다카스키 신사쿠" 의 집이 먼저 눈에 뜁니다.
하기시의 다카스키 신사쿠 (高杉晋作) 는 사실상 메이지 유신의 행동대장 으로 그 천성의
강기가 돋보이는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과감무쌍한 인물 이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맹자를 강의하면서 "선비는 죽을때를 알아야 한다" 고 했으니 이를 실천한 제자라?
해서 몇년 전에 일본 총리 아베 신조 安倍晋三 는 그 할아버지가 신사쿠를 마음 속으로 부터 숭앙하는
지라.... 그 이름자에서 신晋(진) 자를 따와서 신조로 지었다고 합니다. 자유주의자로
도조 히데키에 맞섰던 할아버지 아베 간은 아들 이름도 신자를 넣어 아베 신타로라 했는데 손주까지?
다카스키 신사쿠 가 1866년에 조슈번 4천명으로 막부 10만대군 과의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후
전사자들을 신으로 모시기 위해 초혼사 를 발의해서 지은게 바로 사쿠라야마 신사 입니다.
4천명이 10만 대군에 이겼으니... 전쟁은 머릿수로 하는게 아니고 지도자의 자질이 중요한 것일까요?
하기시의 사쿠라야마 신사 에서 존왕양이론자 인 요시다 쇼인 과 다카스키 신사쿠 를 모셔
가서 에도(도쿄) 에 지은게 "야스쿠니 신사" 로 초대 신관도 여기 조슈번 출신 입니다.
그러니까 훗날 전범들을 합사하게 되는 야스쿠니 신사의 뿌리가 여기 조수번 하기시 라는?
요시다 쇼인을 존경 하고 신사쿠를 흠모 하는 아베 신조 가 어찌 참배를 강행하지
않으리요? 그가 참배를 중지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니 식물인간 이라?
아베는 자유주의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닌 외할아버지 기시 총리를 이었다는...
그 옆에는 규슈 사쓰마번(가고시마) 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와 더불어 메이지
유신 3걸 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 (옛 이름 가쓰라 고고로) 의 집이 있습니다. 그는
쇼인의 제자인 신사쿠 나 겐즈이 보다도 나이가 몇 살 위로 조슈번 존왕양이파 무사들의
대표이니, 메이지 유신을 설계하고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도쿄) 로 천도를 단행한 인물 입니다.
그 남쪽에는 메이지 유신 무진전쟁에서 활약하고 외무대신을 거쳐서 총리 때 미국의 태프트 육군장관과
비밀 협상을 통해 "필리핀과 조선" 을 서로 갈라먹은 가쓰라 다로 의 집이 있는데, 태프트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1912년 벚꽃 3천그루를 보내니 "워싱턴 벚꽃 축제" 로 자리 잡았으며... 2차대전 후에도
일본은 벚꽃 처럼 장기적인 안목으로 정부와 대기업이 손을 잡고 미국 대학에 일본학과 설립을 지원합니다.
대학 건물을 지어주고 교수 월급의 반을 부담하며 일본학과 학생들을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초청하는등으로
자연스레 친일파를 양성하는데.... 한국은 긴 안목으로는 못하고 박동선 게이트등 미국 의원에게 뇌물을
뿌려 의원 1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7명이 징계를 받았는데, 그 때문인지 아베 신조 미국상하원 합동 연설을
저지하기 위한 교민 회합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주도했던 혼다 의원 단 한사람만 참석했으니 아쉽습니다.
가쓰라 다로 는 독일에 유학후 청일전쟁시 요녕성 영구를 점령하고 대만총독을 역임했으며
육군대신을 거쳐 총리 때 미국으로 부터 "일본의 조선 지배" 에 대한 지지를 확보합니다.
물론 사전 정지 작업은 국제 정세에 밝은 이토 히로부미가 겐타로를 미국에 보내 닦았지요?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이 길어지면 장춘까지 보급이 문제라 보고 하버드 로스쿨 출신 가네코 겐타로
를 미국에 보내 하버드 대학교 동문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니토베 이나조 의 "무사도"
책을 선물하니.... 루스벨트는 일본 무사도 정신에 흠뻑 빠져 스스로 진심을 가지고 "친일파" 로
자처했으며, 러시아와 일본대표를 포츠머스에 불러 러시아를 윽박질러 "종전 협정을 강요" 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찌기 영국에 유학했으며 조슈번이 구미 상선에 포격한 일로 미, 영, 프, 네델란드 4국
함대의 공격으로 시모노세키가 점령당하자 협상에 나선 다카스키 신사쿠의 통역으로 영국과 담판
했고 1871년 107명 이와쿠라 사절단을 기획해서 3년간 미국과 유럽등 12개국을 돌며 불평등 협정
을 개정하고 서구 문물을 도입하며 43명 유학생을 남긴 일로 국제 사정에 밝았기에 대비했던 것입니다.
그 옆에 자리한 주택은 존왕양이 (尊王攘夷) 론자인 선각자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 의 누이동생과 결혼을 한 구사카 겐즈이 집으로....
교토의 일왕(천황) 을 움직여 양이결행을 성사시킨 일본 근대화 주역입니다.
요시다 쇼인의 매제인 구사카 겐즈이는 시코쿠섬 도사번 출신 풍운아 라는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와 일본 통합을 위한 대화 를 나누었으며....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시모노세키 전쟁 에서는 외국 함선들에 선제 포격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웃에는 한국의 안중근 의사에 의해서 하얼빈 에서 총을 맞아 죽은 "이토 히로부미" 의 생가이고
옆에 별장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악당이 천벌을 받았다고 혀를 찼지만, 일본에서는 적의 손에 전사
했으니 행운아란 부러움 을 받습니다. 무사는 "늙어서 안방에서 편안하게 죽는게 가장 큰 수치" 라나요?
조선인들은 客死(객사) 를 가장 두려워해서 늙어 안방에서 자식과 제자들이 임종하는 가운데 죽는걸
행복으로 아니 일본과는 정반대 라? 이토 히로부미의 본명은 하야시 리스케로 중급 사무라이
인 주겐 신분의 이토가에 양자 로 가서는 이토 슌스케 로 불리다가 훗날 히로부미 로 개명을 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조선의 선비들과 일본의 사무라이는 정 반대니 전쟁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았는가 봅니다? 당시 조슈번은 무사가 10% 이고 평민이 90% 인데.... 신분은 번주 -
중신 - 사무라이 - 주겐 - 아시가루(병사) - 평민 - 천민의 일곱 계급 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하기시의 거리에는 소위 일본 육군의 교황으로 불리는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 와
내무대신으로 명성황후 살해의 사실상 설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 등 다 헤아릴수가 없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킨 미우라 고로도 하기시 출신으로 이노우에 에게서 인계를 받은 것이지요?
1894 청일전쟁 부터 1910년 까지 조선 공사와 통감, 총독 을 역임한자가 10명 이며 이후 총리가
된 자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
다나카 기이치 등 5명에다가 전후에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및 아베 신조 등 8명 입니다.
일본의 20여개 현에서는 150년간 단 한명의 총리도 배출하지 못했는데 야마구치현은 무려 8명
이라? 대신은 이노우에 가오루, 고무라 주타로, 소네 아라스케 등이며, 조선 주둔군 사령관
으로 무력을 동원한 자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 입니다.
그럼 조선이 일본 에 침략당한게 아니고 조슈번(야마구치) 아니, 야마구치현 전체도 아니고
그중에 "하기시" 라는 여기 인구 5만의 작은 마을 출신들 에게 먹힌 것이지요?
현재 소도시에 불과한 여기 동해 바닷가에 "하기 사내들이 조선을 집어삼켰던 것" 입니다?
그러니까 조슈번의 수도 하기에서 요시다 쇼인의 제자 들 중에서 대략 70% 는 메이지유신
도중에 죽었고, 30% 가 살아남아 일본을 틀어쥐고 조선을 침략했던 것 입니다!
어떻게 이렇게나 작은 마을 출신들이 수준 높은 문화 대국인 조선을 도모할수 있었을까요?
이런 마을이 하나 더 있으니, 조슈번 과 함께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쓰마번 (가고시마) 의 가지야 마을
加治屋町 에서는 메이지 유신 3걸 중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태어났습니다.
그외에 러일 전쟁시 육군 총사령관인 오야마 이와오 원수, 러일 전쟁을 승리 로 이끈
대마도 해전의 도고 헤이하찌로 제독과 해군대신 사이고 쓰구미치가 탄생합니다.
조슈, 사쓰마, 히젠, 도사 4개번 중에 조슈번이 육군을 장악하고 사쓰마번이 해군을....
한 마을 출신이 나라를 세운건 일본 말고 중국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가 있으니... 유방이
항우의 초나라를 무찌르고 한나라를 세울때 공신은 고향인 패현 출신이 소하, 조참,
노관, 하후영, 번쾌, 주발, 주창 과 여후 등이니... 타관은 장량과 한신 정도에 불과 합니다?
또 우리나라 조선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을수 있으니 서울 북촌 에서는 박규슈를 위시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살았으니...... 큰 인물 옆에 있으면 함께 크는 것 일러나!
그럼 예로 부터 "쑥도 삼밭에 가면 삼이 된다" 는 말이 그냥 공연한 것이 아니었나 보네요?
한 마을에서 살았던 그냥 평범한 사내들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가 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데.... 언젠가 우리 한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때 전쟁에서
이길려면,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 했듯 일본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