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물에 그 밥
박지붕(예명)
무료의 소견법은 독서가 좋거늘 나는 시력이 좋지 않아 책과 담을 쌓았습니다. 원래 기계를 좋아하지 않지만 할 수없이 컴퓨터를 가까이 합니다. 인터넷에 나오는 글은 너무 많아서 남들이 좋은 글이라고 치켜세우는 글을 보게 됩니다. 더러는 문학상 당선작 중에 이른바 대상작을 보기도 합니다.
대상작을 보면 대개 소재가 당락을 좌우한 것 같습니다. 좋은 소재를 만난다는 것은 필자의 행운이고 능력이긴 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글이라고는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글의 전개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재 위주의 글은 큰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필자이기도 한 작중 화자인 한 여성이 외진 산골짜기에서 낭떠러지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혼자서 건너가야 할 처지라고 상정해 봅시다. 이 여성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르는 어쩜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간이 하는 생각은 죽느냐 사느냐 오직 그 생각 하나뿐일 겁니다. 다른 생각은 번개처럼 스치다가도 말겠지요. 그런데 문제의 작중 인물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면서 평평 대로를 걷는 양 세월아 네월아 하고 시시콜콜한 온갖 잔소리 온갖 푸념 갈은 소릴 늘어놓습니다. 이런 글을 대상작으로 뽑다니 선자의 문학적 안목을 의심하게 됩니다.
소재 위주의 글은 200자 원고지 10매 좌우간이면 되는 것을 공모전이 요구하는 15매 20매에 맞추려하다 보니 글이 늘어지고 설명이 되고 문단을 불필요하게 바꾸고 문장이 탄력을 잃게 됩니다. 행문이 하도 헉헉거리기에 원고지에 옮겨 보았더니 20매에 맞추려고 무진 애를 썼더군요. 여기서 이와는 반대로 20매를 거뜬히 채우면서도 행문이 거침없는 글을 한 편 소개하자면, 천강문학상 4회 때이지 싶습니다. 고경숙씨의 「바닥론」입니다. 한 번 읽고 너무 놀라워서 두 번을 읽었더이다. 작가의 철학과 인생을 엿보게 하는 명문이라 봅니다. 그 방면에 공부가 깊지 않으면 절대로 그런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 같아 거듭 경의를 표합니다. 수필문학상 당선작을 죄다 본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그 흔해빠진 대상작은 이름값을 전혀 못하는 글이 퍽 많습니다. 한낱 수기에 불과한 이런 글에 대상을 주면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아편을 주는 겁니다. 아편에 중독되어 상하의 위계도 모르고 선후의 서열도 모르게 되면 어떡합니까?
무슨 가수 선발 대회였나 봅니다. 조명섭이란 청초한 젊은이가 「신라의 달밤」을 부를 때 사회자 장윤정이며 심사위원인 하춘화 주현미 설운도 박현빈 등이 넋을 잃은 표정이었고 특이 설운도는 시종 입을 헤벌리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런 글 이런 선자를 생각해 봅니다.
글이 있고 평이 있지 않나요? 평자 가운데 더러는 작가 위에 군림하는 자세로 한낱 遼東白豕인 줄도 모르고 에헴, 합니다. 그런 자가 선하는 글이란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그렇더라도 落榜擧子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선자를 탓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을 못 믿겠거든 경기에 출전하지 말아야지요. 홈런을 치면 됩니다. 홈런은 삼척동자의 눈에도 홈런이죠. 호랑이가 되든지 천둥이 되면 됩니다. 호랑이는 누구의 눈에도 호랑이요, 천둥은 누구의 귀에도 천둥이 아닙니까? 하지만 홈런 같은 문장, 천둥이며 호랑이 같은 글, 가령 율곡 선생의 「천도책」이며 「역수책」의 현대판이라 할 만한 글, 그런 글이 없거니와 있다 해도 이를 알아보는 선자가 오늘날 문학상의 심사를 한다는 자 중에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형안독수(炯眼毒手)가 그립습니다.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불쾌하기도 합니다.
첫댓글 글 쓴 이의 솔직한 마음이 솔직하게 표현된 글입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 "형안독수의 수준에 오른 작가가 어디 없는지" 독자인 나도 저절로 그리워 집니다. 저절로 그리워지는 그게 공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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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마르크 샤갈이란 사람이 어디서 그림을 그리고 있자니
어느 행인이 이랬다는 겁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이 하늘로 날아다니나?"
그러자 샤갈의 대꾸.
"그러니까, 화가지!"
박주병이란 분이 연세도 많으시고
나름대로 공부도 많이 한 분이시고
또 여차저차 대단한 분이신 줄은 알겠는데.
제게는 다만 시끄럽게만 들립니다.
"참새가 어찌 기러기의 뜻을 알겠느냐."
이러면 저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선생께서는 기러기로 사세요.
저는 참새로 살겠습니다."
제가 말을 몇 마디 더 보태자면
현재 한국 영화 드라마가 위대한 것은
참새들의 찌질함을 거침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를 보며 감탄했습니다.
이게 다 민주화가 되면서 가능해진 면모인데,
주인공이 완전무결한 인간이 아닙니다.
"나를 보고 남의 돈을 떼먹은 나쁜 년이라 그러는데,
그래도 나보다 잘난 아들 있는 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게 정확한 대사는 아니고, 내용이 대략 이렇습니다.
성인군자들의 고담준론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현실의 장삼이사들에게 힘이 되는 건
바로 이런 응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까, 저 높은 것들은 잠시 잊고,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