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풀린 여자 외 4편
박주이
지시어들이 텅 빈 뇌를 한 바퀴 돌아 나간다
그는 아끼던
진열품 하나를 잃었다 먹이고 입히고 쓰다듬어 주고 뽀뽀해주고
아침에 구십
도로 인사시키고 자세를 바로 잡아준 기억이 없는데 몸을 구부린 채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태엽의 오작동
바람이 불고
있다 방향 없는 바람이 남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예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균형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주체를 잃어버린
지시어들은 오타가 되어 까치발로 돌아다니고 한 개의 진열품을 잃은 진열대는 뼈대 없는 구조 ㅠ ㅠ 물 처 럼 힘없이 덜렁거린다
할 일과
말아야할 일 한 일과 못한 일
해야 할 일과
또 해선 안 될 일과 얼굴 쳐다보기와 외면하기
진열품은
진열품일 뿐
오타들이 주인을
찾아 하나 둘 떠난다 구십 도로 문을 닫은 저녁과 저녁에
경력에 치명타를
맞는다
뇌에서 절대부족
알람이 울린다
오늘은 자신의
진열품 품평회가 있는 날이다
예쁜 얼굴
날씬한 몸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 톤
똑같진 않지만
적당히 닮은 진열품을 찾아 집에 가져다 놓는다
등에 붙은
태엽을 풀어 놓고 창문은 닫는다
진열품의 이름은
언제나 아내다
희망퇴직
희망 값은
종이봉투 한 장 만큼이다
메트로놈으로
가던 세월은 이름 없는 간이역에 연착중이고
누군가 머물던
흔적은 금방 짠 거미줄처럼 팽팽한 긴장감으로 남아있다
아이들보다 더디게 늘어나는 옷을 전지가위로 다듬어주면
실밥 터진
봉재인형 같은 빈곤이 좁은 구멍을 비집고 꾸역꾸역 기어 나오고
쌓여있는
세금고지서로 종이접기를 하고
남는 한나절로
접은 종이를 다시 펴면
종이에 남은
주름 같은 아내가 초인종을 누른다
쌀통 속의
허기가 가부좌로 앉는 시간
외투위에 불신을 껴입고 겨울 강
앞에 서면
싸구려
희망이라도 사놓지 못한 후회가 미련으로 교차하고
받을 수 있는
게 사십 오년 목숨뿐이라는 역무원의 계산 앞에
오기로 오버랩
되는 가족들
생각이 왔다 갔다, 시침 잃은 시계추도 왔다 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떠난 것들의 아우성과
절대 놓쳐서 안
되는 것들의 절규로 희망을 재조합한다
누군가 간이역에
도착한다
지금은 떠나야
할 때 서둘러 기차를 탄다
새로운 긴장감은
정적 속에 남겨둔다
신발을
닦는다
아내의 얼굴을
다림질한다
고장 난
밤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온몸에 박힌다
그로테스크한
주변과 한 몸이 되어 있는 나는 행려병자
내 손가락을
뜯어 먹는 작고 까만 눈의 회색 쥐들 공포마저 마비된 비명은 목구멍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고막을 비집고
쏟아지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뜨니 묽은 어둠만이 지친 숨을 쉬는 병실
열은
39.6도
친한
친구와 머리채 잡고 싸우는 꿈 2분
초등 몇
학년인지, 준비물을 못 가져가 회초리에 손바닥이 빨갛게 부어오르는 꿈 1분
무서운 개가
쫓아오는데 발은 들러붙고, 비명은 지르는데 소리가 나지 않아 식은땀만 흘리는 꿈 3분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도막난 잠들이 밤을 엿가락처럼 늘어뜨린다
죽었었는가?
살았는가? 아침은 올 수 있는가?
무채색 유령이
소리 없이 돌아다니며 열을 확인한다 40도
터무니없이 긴
밤에 사지가 주눅들어간다
변덕스런
계절이 찍고 간 열감기는 화염에 휩싸인 꿈들의 반란을 영사중이고 지각 잃은 몸뚱이는 땀 속에서 익사중이다
산 채로 죽어
있는 시간들이 떠다닌다
내가 살아있다고
누군가 정의를 내리기전까지 알 수 없는 죽은 채로 살아있는 밤
24분이
24시간으로 흘러내린다
마음의
안쪽
몸통
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에코소리의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누가 이 문 좀
열어주세요 내 마음이 문 안쪽 손잡이에 걸려있는데 문이 좀처럼 열리질 않아요 누군가 저 문을
나가며 등으로 닫았기 때문에 등으로 열어야 해요
땅속을 뚫고
나온 듯 흙과 덤불을 머리에 인 남자가 불쑥 나타나 대답했다
예전에
내가 나가면서 등으로 닫았어요 두 손에 짐을 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죠 여행을 가면서 잃어버릴까 두려워 마 음을 두고 갔어요
묘한 음은 방향
없이 떠돌다 남자머리의 덤불 두어 개를 떨어뜨린 뒤 귓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안됐지만
옛날 마음은 잊어버려요 등으로 손잡이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이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길 건너에 마음을 파는 가게가 새로 생겼어요 그 곳에 가서 당신에게 맞는 마음을 찾아보세요
내
마음은 문 안쪽에 걸려있어요
확고한 여자의
발음 소리에 놀란 남자가 급하게 입을 닫아버렸다
에코가 지나치게
강한 여자의 말들은 남자의 귀에까지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지만
다행히 몇
마디는 살아남아 까무러치려는 대화를 이어가려 애쓰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마음을 조금 모았어요 그래서 원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합치려고요
부탁이 있어요
당신이 날 좀 안아 주세요
내 두 손을
당신 등 뒤로 뻗어 문고리를 당길 수 있게요
여자의
마음은 문고리에 걸린 채 오래 방치 되어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바싹 말라 조그마한 진동에도 견디지 못해 바닥으로 떨어져 금이
갔다
여자가 마음을
주워들자 그것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전 애완동물처럼 헐떡대다 잘게 바스러져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남자가 중얼거리며 뒤돌아간다
남자의 등 뒤로
잠자리 날개 같은 여자의 팔이 팔랑거리며 붙어간다
팔도 없고
마음도 조금뿐인 여자가 멀어져 가는 남자의 등을 스캔하기 시작한다
저녁식사는
집에서 하세요
무료가
끈끈이처럼 들러붙는 한낮이다
한 남자는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찻집 앞 횡단보도 위에 중형차를 세운다
차를 마시는
눈들이 가끔 유리창을 빠져나와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지만 한 남자의 얼굴까지 닿은 적은 없다
높은 하이힐을
신고 팔자에 없는 만리장성을 하루에도 서너 번씩 쌓다 허무는 그 여자가 중형차에 탄다
창문을 우아하게
태닝한 차가 햇빛을 털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여자가 한
남자의 허벅지에서 무료를 떼어내는 동안 한 남자는 차를 몰고 인적 드문 모텔로 향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영혼을 살해하고 있는 동안 실뜨기 같은 미로 속을 하얀 발이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노란트림이 빨간
피를 토한다
지폐가 이불깃을
톡톡 치며 일어나고
시간도 시치미를
뚝 떼고 해를 집어 비스듬히 뒤집어쓴다
한 여자가 살해당한 영혼을 넣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다
된장찌개 속에서
죽은 영혼이 보글보글 노래를 한다
박주이
시인
현재 경인교육대학 평생교육원 문예창작 공부 중
문예감성
제11회 신인상 심사평
시인에게
주어진 보자기
시 쓰기는 보자기를 보따리로
만드는 일이다. 물건을 싸서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네모난 천이 보자기이다. 빈 보자기에 물건을 싸서 꾸려야만 보따리가 된다. 그렇다면
시인의 보자기는 A4용지가 될 것이다. 그 종이 한 장에 마음이나 생각을 담아 보따리로 만들어야한다. 어떤 내용을 담느냐에 따라 보따리의 무게,
즉 詩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다. 많이 담는다고 묵직한 보따리가 되지 않는다. 쓸모없는 내용물로 가득한 보따리는 당연히 選에서 벗어난다. 생각이
얕은 것도 중량 미달이다. 제대로 된 보따리를 만들려면 꾸준한 습작이 필요할 것이다. 무게를 지닌 알차고 새로운 보따리를 찾는 일은 늘 설레는
일이다.
제11회「문예감성」신인공모전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새벽 두 시 오십구 분. 제로 법칙의 비밀』외 5편과 『태엽 풀린 여자』외 6편이었다. 그
중 기본기가 탄탄한 박주이씨 한 명만을 뽑기로 하였다.
『태엽 풀린 여자』는 ‘쇼 윈도우’
부부를 연상시킨다. 일방적인 집착과 위선으로 유지되던 결혼은 어느 날 실종되었다. 타인의 이목을 의식하고 그럴듯한 상품으로 다시 채우는
재혼시대, 믿고 구입한 결혼은 오작동이 많다. 가정이 실종된 시대의 단면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희망퇴직』은 조기퇴직으로 실업이 늘어가는
현실을 잘 조명하고 있다. 실직한 가장이 어느 간이역에서 다시 재기를 다짐할 때 아내의 근심이 펴진다.『저녁식사는 집에서 하세요』도 역시 이
시대의 통점을 잘 짚어낸 작품이다. 성 모럴이 무너진 이 시대의 문제점은 ‘불륜’이다. 가정을 이탈한 여자는 무료함을 달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다소곳이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저녁식사는 집에서 하세요』는 영혼이 죽어가는 시대,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에 물든 뻔뻔한 이
시대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박주이의 시선은 날카롭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내면까지 파헤치는 힘을 지녔다. 당선작으로 부족함이 없는 기량이
뛰어난 신인이다. 기대해도 좋을 만한 재목이다.
심사위원 마경덕(시인)
최수혁(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