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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읍시다!
부끄럽게도 언제부턴가 소임 이동 때 짐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 수도자 시절, 원칙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칠 때는 정말이지 이삿짐이 딸랑 가방 두개였습니다.
소임 이동하는 날, 양손에 가방 하나씩 들고, 정들었던 공동체를 뒤로하고 버스로 이동하던 시절의 그 홀가분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모아놓으면 한 짐입니다. 아무리 줄이고 줄인다 해도, 가방이 대여섯 개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량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이 살던 수도생활 초년병 시절, 행복지수가 훨씬 높았습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니, 잡 생각하지 않고, 딴 데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봤습니다. 하느님만 생각했습니다. 가난이 가져다주는 은총인가 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마라.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을 껴입지 마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은 너무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장거리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텐데, 적어도 비상금이라든지 비상식량은 챙겨서 떠나야 되는 데, 한 마디로 ‘몸만 가라’, ‘맨땅에 헤딩’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는 왜 들고 가라고 하시는가 봤더니 당시 여행객들에게 지팡이는 필수 품목이었답니다. 광야나 들길을 걷다 보면 뱀이라든지 전갈이라든지, 들짐승을 만나곤 했는데 비상시 호신용으로 다들 지팡이 하나씩을 들고 다녔답니다. 그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 당부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더 묵상해보니 예수님 말씀이 백번 천번 지당합니다. 수도자로 살아보니 최소한의 것만으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죽었다 깨어 나도 마트나 시장 한 번 안 가고 살수도 있었습니다.
더 높은 이상향을 추구하고, 더 영적인 삶을 갈구하다 보면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초월할 힘이 본인도 모르게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 앞에서 수도자들의 증거 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돈 없이도, 최첨단 문명의 이기 없이도, 번쩍번쩍 빛나는 자동차 없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수도자들이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몸에 지닌 것이 많을수록, 통장에 잔고가 많을수록 거기에 신경 쓰이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서로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분노하고 실망하게 되고, 점점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것들에 마음이 쏠리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물질이, 돈이, 명예가, 건강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더군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리의 길이 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오고 가는 끈끈한 우정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 잔뜩 들려있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우리 눈은 흐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 버리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 마르코 6,7-13
내 욕구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욕구가 안 보인다
제가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에 ‘유태인의 상술’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여성의 주머니를 노려라, 현금을 가지고 있어라, 장기적인 투자가 이긴다 등의 소제목이 기억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빵을 좋아하면 빵장사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빵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것을 좋아할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사가 안 되면 ‘내가 먹으면 이렇게 맛있는데 사람들은 왜 안 사지?’ 라고 생각하며 개선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 빵장사를 하면 빵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파는 것을 바라보기에 이렇게 저렇게 개선하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팔아야 더욱 사려고 하는 사람의 욕구를 더 잘 알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내 욕구에 집중하면 상대의 욕구에 무관심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얻으려면 내 욕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려면 내 욕구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신학생들에게 신자들이 가장 원하는 사제상에 대해 물었더니, “강론 잘 하는 신부”,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사제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1위가 ‘겸손한 신부’, 2위가 ‘기도하는 신부’였습니다.
신학생들조차도 자신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혼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더 큰 힘이 발휘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저는 외국에 있으면서 둘이 여행 나와서 싸우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실 마르코와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 복음을 전하다가 헤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둘이 서로 의지가 되라는 뜻도 있겠지만 관계를 잘 맺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아무래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제의 강론의 힘이 떨어질 것입니다.
본당 사제와 본당 수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보기에 우선 서로 관계를 잘 맺는 사목자들이 되고 그 이후에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옷도, 전대에 돈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에 대한 욕구,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욕구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 욕구가 눈을 가려 신자들의 욕구를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미래에 대한 걱정, 돈에 대한 걱정, 명예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남의 진맥을 보려면 먼저 자신의 진맥부터 가라앉혀야 합니다.
잔잔한 물이 되어야 상대의 모습이 비춰져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들에게 신자들이 보기에 세상 재물에 애착이 없는 복음전파자가 되라는 뜻 같습니다.
또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받아주는 집에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사람과 친하다가 또 저 사람이 좋으니 저 사람과 친해지는 사람은 선교를 위함이 아닌 자신과 어울릴 사람을 얻기 위한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욕구도 선교를 하는데 매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의 애정이나 인정을 바라는 사람들 역시 복음을 순수하게 전해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본당의 신자들이 갈라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정에서도 자유로운 복음전파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무언가 부족하여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힌다면 이는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명목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자신 안에 복음이신 하느님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시는 사람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기름을 바르면 병이 치유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전해주는 것에서 충분한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편안해하는 아기 얼굴을 보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내 욕구에 가장 덜 집중하는 사람이 복음전파를 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이라야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전파자가 됩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7-13: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또한,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완전해지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르9,37). 이것은 사목하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며, 참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 우리의 복된 삶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복된 삶이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나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태어나시도록 하는 삶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주님께 의탁하며 순간을 살아내며, 이웃을 통하여 우리의 본 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가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 7)
생명은
생명으로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남을 위한 삶이
곧 자기를 위한
삶임을 배웁니다.
파견은 선교이며
선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랑입니다.
봉사의 바람은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파견을 통하여
일으켜 지는
믿음입니다.
선교는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하고
열정이 필요한
기도의 여정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이끄심에
내어맡기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어맡기는
믿음은
평범한 삶을
성화시켜
그 삶 자체를
예수님의 삶을 닮는
복음이 되게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가까워지는
인식의 전환이며
삶의 실천입니다.
실천은
진정한 나눔이며
진정한 배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뜨거운 마음으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파견의 여정이며
사명의 확장입니다.
파견은 한정된
지역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복음에 공감할 수
있는 삶을 위한
삶의 파견이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파견의
안목과
바람직한
파견을 위한
소통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파견을 통하여
정말로
소중한 것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랑과
봉사임을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다시 듣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나누는
기쁜 날 되십시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교통사고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독일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이지만, 이탈리아의 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그냥 사소한 교통사고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느냐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원칙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규칙을 어기면 큰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그에 반해 이탈리아는 원칙을 존중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여유 있게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극심한 혼란 한가운데서도 사람 안전을 위한 일종의 거리를 둘 줄 알기에 그들은 혼란의 순간에 상황을 꿰뚫어 보고 지혜롭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줄 안다고 합니다.
원칙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사람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사람이 중요합니다. 원칙도 역시 사람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원칙이 사람보다 위에 설 때가 많습니다. 원칙을 지켜야 사람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원칙이 중심에 설 때 오히려 사람이 소외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원칙 중심이었습니다. 자기 원칙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는 것은 있어서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 병자의 고통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원칙을 왜 지키지 않느냐며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할 대상을 보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되길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원칙이나 자기 사상보다 더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삶이 바로 사랑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뒤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선포하였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 모두는 사람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했고, 마귀에 의해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마귀를 쫓아냅니다. 또 병에 의해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면서 사람의 어려움을 없애주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못하게 합니다.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으며,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오로지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해야 하고, 이것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할 때가 참 많습니다. 특히 사람 중심이 되지 못하고, 원칙과 사상을 내세워서 오히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삶 안에서 예수님의 사람 중심의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당신이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도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래리 킹).
6)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화!'
오늘 복음(마르6,7-13)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곧 그 영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고 그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이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만 의탁하라.'는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열두 제자들은 그렇게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요즘 저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필사 중에 있습니다. 어제는 바오로 사도의 3차 선교 여정의 시작인 '사도행전 19장까지' 필사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서 주님을 만나 완전히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지역에서 만나게 되는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기쁜소식(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몸소 보여준 복음선포의 삶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이는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지금 나는 복음 선포의 삶을 기쁘게 살아내고 있는지?'
만약 믿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과 삶인 복음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무요 허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복음 때문에 기뻐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의 첫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세상 복음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의 제자들이 됩시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