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가르침과 병 고침 등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첫 번째 사건은 가버나움에 있는 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백부장(百夫長, Centurion)은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을 가리키는 직책입니다. 이 백부장은 아마도 로마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들은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었습니다(3절). 그리고 이 장로들은 백부장에 관하여 매우 긍정적이고도 우호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4절, 5절). 유대인의 장로들이 이방인인 백부장을 위해 직접 나서서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위하여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5절). 또한 백부장이 자기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도 일반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백부장이면 꽤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고, 그 백부장의 종이라면 매우 하찮은 자로 취급받는 사람이었을 텐데, 백부장이 자기의 종 하나를 위해, 그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에게 부탁까지 해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길 간청하는 것도 예삿일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즉 이 백부장은 매우 아량이 넓고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가진 자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기 위해 백부장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그 집이 가까워져 올 때쯤에 백부장이 사람을 보내 자기 집에 예수님이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면서, 그저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종이 나을 것이니 말씀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6절~8절). 백부장은 군인으로서 자기 부하도 상급자가 명령하면 순종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까짓 병은 금방 낫지 않겠냐는 의미였습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생님, 위대한 선지자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들이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말도 예수님 같으신 분을 매우 하찮은 자기의 집에 들이는 것은 너무나 황송한 일이어서 차마 그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이 백부장도 알았기에 예수님을 배려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그러한 배려를 넘어서서 예수님을 지극히 존귀한 분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여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만한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시면서(9절), 백부장의 종을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10절). 이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여기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만 하셔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도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이러한 전능자 하나님으로 온전히 믿고 따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후에 나인(Nain)이라는 성(城)으로 가십니다. 나인은 갈릴리 지역의 자그마한 한 성읍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 외에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11절). 예수님께서 나인 성의 성문 가까이에 갔을 때, 예수님은 한 장례 행렬을 만나셨습니다(12절). 나인 성의 한 과부의 독자(獨子)가 죽어 장례를 치르는 행렬이었습니다. 과부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예수님께 무엇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과부는 그 당시에 사회적 약자(弱者)로 여겨졌는데,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으니 그 과부의 심경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부의 마음을 고스란히 공감(共感)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14절). 유대인들에 있어서 시신이나 무덤 등에 손을 대는 것은 매우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관에 손을 대어 그 행렬을 멈추셨고, 죽은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셔서 그 죽은 청년이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15절).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위대한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며 놀라워했습니다(16절). 예수님께서 공생애(公生涯)를 보내시면서 죽은 자를 살리신 첫 번째 사건인데, 예수님은 질병만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아시고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자도 고치시고, 과부와 같이 연약한 자가 아들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것을 함께 마음 아파하시며 그 죽은 아들도 살려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시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주님을 우리도 더 깊이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님의 뜻에 따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