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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청주] 강도의 소굴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1마카 4,36-37.52-59
+ 복음 루카 19,45-48
◈ 오늘의 묵상
예루살렘 성전에 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이민족에 의하여 더럽혀진 제단을 정화하여 다시 봉헌하는 유다
마카베오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하느님의 집이며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된다면,
성전이 돈벌이를 위한 자리가 되고 세력 다툼의 장소가 된다면, 그
성전에는 이미 이민족의 우상이 세워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성전은 이미 더럽혀진 셈이지요. 그런 곳에서는 하느님이 아닌 오직
이권과 권력, 야합과 권모술수, 심지어는 폭력까지 난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하여 성당에 나가고 신앙생활을 하는지요? 어떤
식으로든 성당이 어린이들 삶의 일부가 되도록 도와주려는 의도에서,
성당에서는 그들과 놀아 줍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성당을 찾아올
계기를 마련해 주려고 이런저런 행사들을 기획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성전이 어떠한 곳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성전은 우선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기도하는 곳이어야 하고, 그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을 실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다 마카베오와 예수님처럼 성전을 과감하게 정화하고,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들에게 바른 소리를 하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는 정의가 기준이
되어야 하며, 그 정의는 사랑에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사랑이 아니라 정의에 입각한 사랑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악은 어떻게든 쫓아내야 합니다.
2015년 나해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제1독서
<그들은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쳤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4,36-37.52-59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45-48
저는 1989년에 서울 혜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에 선배들은 이렇게 놀리곤 했지요.
“이제 신학교 입학했으니 언제 신부가 되니? 1999년? 그날이 올까?”
당시에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떠돌
때였기에 더욱 더 사제가 되는 길은 멀기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오지
않을 것 같았던 1999년을 지나고도 한 참 지난 2015년을 지금 살고
있으며, 올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시간이 참으로 빠릅니다. 신학교 입학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26년이나
지났다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시간은 또 얼마나 빠를까를 떠올리게
됩니다. 지난 26년을 생각하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사제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세속적인 유혹에
흔들렸던 적도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렇게 사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유혹에 단호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있겠지만, 주변의 많은 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신학교 일 년 선배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전의 신학교 때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지금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지요.
그러면서 가진 생각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보면 공부도 잘하고, 능력도 특출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 사제가
되었고, 능력 있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른 길을 선택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는
많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사랑의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가능한 삶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늘 겸손한
자세로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과격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분이
이렇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실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을 쫓아내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됩니다.
즉,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악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사실 성전의 본래 용도는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갈등과 분쟁의 장소가 되어, 본뜻과는 다른
악이 조장되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악을 쫓아내기 위해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악은 어떻게든 쫓아내야 합니다. 사랑으로 악을 감싸 안는다고 악을
행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부족한 우리의
모습으로는 이겨낼 수 없기에 주님과 함께 해야 하며, 우리 사랑의
대상인 이웃들과도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바위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빵처럼 늘 새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어슬러 K. 르귄).
1989년 저의 신학교 입학 때 교구 신학생들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당신의 콤플렉스는 무엇입니까?
4살 때부터 몸속 멜라닌 세포가 파괴되어 백색 반점이 점차 커지는 백반
증(세계적인 팝 가수 마이클 잭슨도 이 병을 앓았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을 앓고 있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피부질환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온갖 놀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절망하지 않았고,
세계적인 슈퍼모델이라는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남들은 그런 피부로
무슨 슈퍼모델이냐고 놀렸지만, 이 아이는 세계적인 패션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는 위니 할로우(Winnie Halrow)입니다. 위니 할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고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저는
단지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검은 피부, 하얀 피부 하나만 가지라는
법이 있나요? 두 피부 다 가지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생각을 조금만
바꿀 수 있다면 당당하게 살 수 있으며, 자신의 열정도 키울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계적인 슈퍼모델 위니 할로우. 정말로 대단합니다.
◈ [수도회] 이 땅에서 성전으로 살아가기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이 땅에서 성전으로 살아가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내쫓으십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19,46). 예수님께서는 성전 뜰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심으로써 성전 구조에서부터 드러나는 분리와 차별로 가득찬
종교생활 체제와 특정 계급만이 권력을 누리는 구조 자체를
비판하십니다.
또한 이익금의 상당 부분을 사제들에게 세금처럼 바치는 그들을
내쫓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수탈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성전 흉내만 내는 유령 같은 건물을
허무시려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으나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를 없앨 궁리를 합니다(19,47). 성전은 그렇게
하느님과 우상, 정의와 불의, 사랑과 무관심이 부딪치는 우리의 실존적
현실입니다.
교회, 국가, 기업, 가정 또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자살, 안전불감증, 실업, 빈부격차의 심화
등이 잘 말해주듯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고 생명을 경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회갈등지수 5위의 불명예스런 딱지를
붙이고도 한쪽을 불순세력으로 모는 우리 사회는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성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권력가들과 탐욕적인 자본가들과 사회 지도자들에게
정의의 채찍을 들어 벌하실 것입니다. 나아가 정치권력에 기대고,
가난한 이의 편에 서는데는 소극적이면서도 교회의 외형적 성장과
상업화,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 따른 교회운영에 더 힘쓰는 교회
지도자들 또한 성전 밖으로 내쫓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나도 주님의
성전입니다. 따라서 내 일에 몰두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며, 온갖 걱정 근심, 감정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로 내
영혼을 가득 채운다면 버려진 창고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인
우리는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고”(필리 4,8)
살아내야 합니다.
한편 주님께서는 내가 죄와 어듬 속에 머물 때에도 함께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靈)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 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권고 5)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영(靈)을 품은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나약하고 죄에 기우는 성향과 육의 정신에 휘말려
어둠 속을 걷는다 해도 찾아오시어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존재가 되어 그분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성전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전으로
살아가려면 예루살렘이 아니라 성전이신 예수님께 돌아가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도 정의와 평화가 꽃피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도록
연대하며,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과 따뜻한 사랑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살아있는 참 성전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5-48)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전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속의 방식을 멈추고 사랑의 삶을 배우는 곳이 성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바로 기도와 사랑입니다.
우리 일생안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 이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 주님의 성전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더는 낯선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만나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세속의 욕심을 끌어안고 들어오는 성전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정화하는 것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하는 곳이 우리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강도의 소굴이 아니라 파란만장한 저마다의 삶을
어루만져 주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이상 살해하지 않는
약자들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희망, 사랑을
다시 깨우는 성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성전의 불빛이 세상을 일깨워주는 온전한 불빛이기를 희망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6)
로마를 방문중에 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들은 관광객들로 넘쳐 납니다.
더이상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구경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몇몇 소수의 성당들은 그야말로 여전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당 뿐만 아니라 예배당들도 그렇고 사찰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거룩한 곳이 거룩한 곳이 되기 위해서는
그곳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의 교회 나의 성당 나의 절은 어떤 곳인가요?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을 기도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오늘 나의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성전이 되게 하고
내가 가는 곳곳이 하느님을 모시고 가는 장소가 되게 함으로써
성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성령의 살아있는 궁전인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가는 곳이
참으로 성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강도의 소굴|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 19,45-48
강도의 소굴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루카 19,45-48
지난 화요일에는 성소후원회 지구장님들과 ‘북촌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명동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아름다운 동네가
있었습니다. 창덕궁이 앞뜰처럼 보이기도 했고, 한옥들이 그리움을
불러왔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의 가게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북촌의 중심에 있는
‘가회동 성당’이었습니다. 해설하시는 자매님께서 가회동 성당의 모습을
‘단아한 조선의 선비와 어께동무를 하는 벽안의 사제’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1층에는 소박한 전시관이 있었고, 2층에는 기도할 수 있는
성당이 있었습니다. 옥상에는 북촌과 서울을 바라볼 수 있는 정원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들렸던 정독 도서관의 단풍도 아름다웠습니다.
따뜻한 날씨는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잠시 멈출 수만 있다면, 소중한 것들을 먼저 생각할 수 만 있다면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북촌의 아름다운
모습을 해설해 주시는 자매님이 참 고마웠습니다. 오랫동안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는 자매님은 북촌을 알리는 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설명을 들으면서 동네를 돌아보니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올해가 가기 전에 북촌
나들이 한번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북촌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고유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들을 지켜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신앙인은 여기서 다르지요.
2015년 나해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나무라는 부모님들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다양할 겁니다.
무조건 자기들이 잘못했고 부모님 말이 절대로 맞는다할 수도 있고.
부모님은 나만 보면 야단치고 꾸짖는다고 기분 나쁘다할 수도 있죠.
그러나 자식들이 공모하며 부모님을 아예 죽이자고 한다면 이건 꽥!
그런데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이 하느님의 말씀님을 죽이기로 했으니.
이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제반 선택인데 신앙인은 여기서 다르지요.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루카 19,47)”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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