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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 사랑 안에 쉬고,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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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 안에 쉬고,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의 아들은 누구이고, 안식일의 주인이란 무슨 뜻일까요?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심은 이 세상사는 동안 하느님의 아들로
행세치 않으시겠다는 의지의 표시인데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우리 인간과 똑같이 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당신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악마가 깨려고 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유혹받으실 때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악령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해보라는 말로 깨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이 유혹을 깨고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지켜내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겁니까?
그것은 당신이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주님과 우리 모두를 일컫는 것이며
그러니 사람의 아들이 안식의 주인이라는 말씀도
주님과 우리 모두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윗과 다윗의 일행이 사제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음으로써
하늘의 양식, 천사들의 빵을 훔쳐 먹었던 것처럼
주님과 우리도 하늘의 음식을 훔쳐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마르코복음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거기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뜻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뜻이며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쉬게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인간답게 하기 위함입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의 노예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 시골에 가서 마늘 수확을 같이한 적이 있습니다.
해 뜨면 밭에 나가고 해 지면 돌아와 미사도 드리고 교리도 하곤 했는데
그때 같이 일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 ‘나는 사람도 아냐.
소야 소! 그저 눈 뜨면 일만 하니.’라며 푸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식일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것이고,
안식일 법도 이런 사람들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것인데
부자들은 이 법을 지킬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은
정작 지킬 수 없었기에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다른 차원에서 성찰할 것이 있습니다.
안식일이 일을 쉬는 것에 그치거나 심지어 노는 것뿐이라면
이것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비신앙인의 안식일일 것입니다.
신앙인의 진정한 안식은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하느님 사랑 안에 잠기고 사랑으로 재충전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을 지내고도 그리고 주일 마사를 봉헌하고도
사랑할 수 없고 일에 지친다면 하느님 사랑 안에서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사랑 안에 쉬는 안식일,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안식일이 되어야겠습니다.
어제 성모님 생일이 왜 2,020회냐는 의문을 제기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2,023회째이니 성모님 생일은 2040회째쯤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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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은총의 새 시대를 열어 가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곧 앞 장면에서는 단식논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인 당신의 때를 알리시고, 오늘 <복음>의 안식일 노동을 통해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곧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을 가로질러 가시고, 제자들은 “밀 이삭”을 뜯어 비벼먹습니다. 이는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사실, 그들이 트집 잡은 것은 밭의 이삭을 뜯어먹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일을 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의 정신을 일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 빵을 먹었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제사 빵을 주었던 것처럼, 이제 당신께서는 배고픈 제자들에게 아직 빵이 되지 않은 밀을 먹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곧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사실,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처럼,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며, 인간에게 주어진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오히려 “해야만 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혹 “해야만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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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를 위한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 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 안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법은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경우라면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얽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참례를 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성체를 믿음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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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꿈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32년 전 이맘 때 저는 첫 본당에서 새 사제가 되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제 의식의 저편에서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다른 꿈들도 있지만 가끔 이렇게 미사를 봉헌하는 꿈을 꾸곤 합니다. 새 사제의 첫 미사 강론은 대부분 ‘아버지 신부님’이 해 주십니다. 아버지 신부님은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준 신부님을 말합니다. 아버지 신부님의 강론은 사제생활의 이정표가 되기 마련입니다. 신부님들은 크게 4가지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고 하십니다. 유혹과 갈등이 찾아와도 이내 이겨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말씀입니다. 사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가까이 하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건강입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네 번째는 친교입니다. 사제는 동료사제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아야 하듯이 사제는 교우들과 친교를 이루면서 지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슴이 사나운 사자에게 잡히는 것은 무리에서 떨어져있을 때입니다.
우리의 뇌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반응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지체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우리의 심장, 허파, 신장, 혈관은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뇌가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율신경계라고 합니다. 위험에 처하면 우리의 몸은 생각하지 않고 즉시 피하기 마련입니다. 오랜 시간 뇌는 이런 기능을 통해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도록 진화하였습니다. 이것을 본능과 직관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문화와 문명을 키워가면서 또 다른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민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에만 머물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방 정리를 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며칠씩 생각만 하기도 합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전화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에 머물기만 하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고, ‘기쁜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생각에만 머무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은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정하였습니다. 안식일에 해서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계명과 율법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안식일의 규정도 버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직원회의를 할 때입니다.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직원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직원이 있습니다. 저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직원이 더 고마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 보면 ‘해결사’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안 되는 방법을 찾는 바리사이가 되기보다는 되는 방법을 찾는 주님의 제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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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일까요? 안식일은 쉬는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노동이고, 어디까지가 노동이 아닐까요? 이 경계는 참으로 모호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도 주님께 “당신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라고 묻습니다. 즉 바리사이들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던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 혹은 노동으로 본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억지입니다. 또한 그들의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면을 배제한, 찌르면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이 느껴집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은 사람을 이롭게 하도록 존재합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라면 사람을 이롭게 하는 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람이 만든 법이 안식일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창세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보시니 좋았다.’라고 창조 후에 세상을 보고 말씀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바라보고 감사와 찬미로 가득 채우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사람이 만든 법으로 안식일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미사에 참여해야 하는 날, 그렇지 않으면 성사 봐야 하는 날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안식일에 감사와 찬미가 가득하기를 희망합니다.
60년은 넘게 걸렸지요.
피카소가 강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팬을 들어 냅킨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그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다른 테이블의 한 여인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내 피카소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습니다. 냅킨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으려는 듯했습니다. 보고 있던 여인은 피카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냅킨을 저네게 주시겠습니까? 사례는 하겠습니다.
피카소는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2만 달러를 내야 합니다. (한화 약 2,500만 원)
여인은 놀랐습니다. 짧은 시간에 냅킨에 그린 그림이 2만 달러라니요. 그래서 피카소에게 간단히 그린 그림이 너무 비싸다고 말했습니다.
피카소는 그 여인에게….
이건 짧은 시간에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 그림을 그리기까지 60년이 걸렸으니까요.
그대여….
자신의 가치를 너무 낮게 정하지는 마세요.
그대의 경험과 시간은 온전한 그대의 것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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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베네딕토 성인은 서방 수도 생활의 초석이 담긴 ‘규칙서’를 쓰셨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세웠고, 그 안의 수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금지한 한 가지가 규칙서에 담겨 있습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을 죽이는 것? 교회에서 도둑질하는 것? 여성과 함께하는 것? 기타 십계명에 어긋나는 것들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절대적으로 금지한 한 가지 규칙은 바로 ‘불평’입니다. 규칙서에는 그 내용이 이렇게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어떠한 이유로든지, 어떤 말이나 혹은 표시로라도 불평의 악을 드러내지 말 것이며, 만일 이런 자가 있거든 더욱 엄한 벌을 내릴 것이다.’(규칙서 제34장)
불평만큼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이 있을까요? 불평 속에 있으면 제대로 행동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 역시 죄 안에 빠지게 만듭니다. 또 불평이 커질수록 이를 멈추게 할 방법도 없어집니다. 스스로 멈출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 안에 하느님의 일이 정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평하면서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으니, 그 일 자체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 역시 불평을 자주 했음을 반성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자리가 아닌 악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불평보다 인내와 호의를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평 섞인 의견은 나 혼자만 알고 있다면 어떨까요?
바리사이 몇 사람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지르면서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제자들을 보고는 예수님께 불평 섞인 말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겨우 밀 이삭 몇 개 뜯어 먹었다고 시비를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 불평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고, 또 특별한 권위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불평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철저하게 예수님 반대편에 서면서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게 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행동으로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참으로 많은 불평 속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있습니다. 불평의 악을 통해 마귀의 자리만을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평을 줄이고 대신 인내와 호의의 마음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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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의지가 약하면 생활도 흔들린다(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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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치의 중심
-참 권위의 예수님을 닮읍시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ㄱ)
요즘처럼 나라 걱정 많이 하는 분들을 만나기는 생전 처음입니다. 면담고백성사때도 자연스레 나오는 나라 걱정 이야기들입니다. 어제도 대전에서 40대, 청주에서 30대 초등학교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입니다. 역시 오늘 밤도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와 어제처럼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육창후 강론을 씁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면담고백성사후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써드린후 보속 하나 더하여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합니다. 들을 때 마다 감동이요 부르는 이도 마음 차분해지는 분위기입니다. 아, 정말 “일치의 중심”이 되어 나라와 국민을 섬기고 사랑하여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참 권위를 지닌, 기도하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정의롭고 용기있는 나라 지도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라 세우기는 시간 오래 걸려도 나라 망해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일치의 중심-참 권위의 예수님을 닮읍시다-”로 어제 이미 정해 놨습니다. 교회공동체 역시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이라 하지만 가시적 중심의 장상인 지도자의 리더십은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나라 공동체, 가정 공동체등 모든 공동체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일치의 중심이 되는 분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그대로 참권위의 핵심인 섬김의 리더십이, 사랑과 지혜를 겸비한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교회공동체로 말하면 궁극의 일치의 중심은 예수님을 날로 닮아가는 지도자요 공동체의 성원들이라면 더할나위 없을 것입니다. 어제는 뒤늦게야 깨달음처럼 참 반갑고 기쁘고 고마운 성모님 축일임을 화들짝 놀라 깨닫고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할 때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어머님 생신”이라 말을 바꾸니 즉시 마음에 와닿으며 정말 성모님은 영원히 내 어머님이란 생각에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효성스런 자녀로서 날마다 어머니 생신처럼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머님 은혜라는 동요도 듣고 불러봤고 고인이 된 돌아가신 육친의 어머니도 생각났고, 예전 어머니를 그리며 일부 대목도 떠올랐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 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같애”
늦게서야 마리아 어머니 생신임을 깨달아 참으로 오랜만이 어머님 은혜 동요를 불렀고 마리아 어머님을 연상하며 산책중 자주 불러 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불어 나이들어갈수록 그립게 떠오른 육친의 어머님 생각에 예전 글 일부도 나눕니다.
“어머님은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알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 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내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신앙이셨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 거나 ‘그립다’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예수님은 물론이고 가톨릭 교회의 일치의 중심의 되시는 참 권위의 마리아 어머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큰 일 났구나! 이를 어쩌나 나라가 무너지겠다!”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 과장의 “2023 교사 직무 관련 마음 건강” 실태 조사 결과를 인터뷰한 내용을 출력하여 정독한 결과, 저절로 쏟아진 탄식이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실태조사에 응한 교사들의 주관식 답변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마디였다 합니다. 일반 성인 대비 4배 많은 38.3%가 심한 우울을 겪고 있으며, 16%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합니다. 교사들의 업무 부담 요인 중 수업은 3.2%에 불과했고, 학부모 상담 민원(37.5%) 및 생활지도(28.4%)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과장의 언급도 참 심각했습니다.
“교직생활을 하며 예상과 다른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스스로가 무너지고 갈수록 스트레스가 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도를 통해 해결하기는 너무 늦습니다. 우선 위험에 처한 교사들을 빨리 도와야 합니다. 일반인은 가벼운 우울 증상이 20% 정도고, 심한 경우가 8-9%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는 가벼운 우울이 60%이고, 심한 우울은 40% 가까이 나왔으니까요. 서비스직 노동자의 경우에도 대개 15-20% 정도입니다.”
저에겐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70년대 8년동안 아이들 교육에 전 삶을 걸었던 “20대 후반-30대 초반까지” 초등학교 교사시절에는 꿈에도 상상치 못할 오늘의 지옥같은 교육 현실입니다. 미래의 주인공들인 어린이 교육을 책임진, 누구보다 정신 건강하고 학교에서의 아이들 공동체의 참 권위를 지니고 일치의 중심이 되어야 할 교사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니 이들을 그대로 보고 배울 어린이들이 어른이 될 미래의 모습은 어떻겠는지요!
악순환입니다. 이런 교사들로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나오기 힘듭니다. 정말 교사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처우 개선이 절박하며, 교사들 역시 분발하여 내외적으로 강인해져야 할 것입니다. 정말 치열한 영적전쟁의 싸움터에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나라의 총체적 위기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나라의 실상을 보는 듯 했습니다. 현재를 보면 미래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나무처럼, 평생 잘 길러내는 인재여야 하는데 참 난감한 현실입니다. “이를 어쩌나, 큰 일 났네!”그래서 한밤중 일어나 나라 걱정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분발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일치의 중심이 되어 참 권위를 지닌 삶이 되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구체적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입니다. 삶은 평생 영적전쟁이요 평생 학교입니다. 믿는 이들은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요, 죽어야 졸업은 영원한 학생의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나와 싸워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우리의 일치의 중심이, 참 권위의 빛나는 모델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선택-훈련-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일치의 중심인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섬기는 것이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이요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이렇게 섬김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때 각자는 공동체 일치의 가시적 중심이 될 수 있고 저절로 참 권위도 은총의 선물처럼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각자 주인 의식을 지니고 지도자처럼 일치의 중심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외부의 공격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되고 제자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해하여 이들을 두둔해 주는, 공동체 일치의 빛나는 모델임을 보여주는 다음 참 권위의 주님이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얼마나 멋진 일치의 중심이자 참 권위를 지닌 다윗이요 예수님인지요! 이분들의 자유로운 처신을 통해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자부심이 이런 자존감 높은 삶에 자유로운 처신을 가능하게 했고,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참 권위의 사람, 공동체 일치의 중심으로 만들어 줬음을 봅니다.
일치의 중심이자 참 권위의 사람, 바오로 사도의 권고 가르침도 참 적절합니다. 이대로 분투의 노력을 다해 훈련하여 습관화하면 우리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일꾼이자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일꾼! 얼마나 멋진 칭호입니까? 정말 복음의 일꾼으로 살 때 저절로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사람들인 우리에게 참 고맙고 자랑스러운 사실은 우리 삶의 좌표가 되고 일치의 중심의 모델인 참 권위의 성인들을 무수히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또 참 권위를 지닌 일치의 중심으로 살게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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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과 일 가운데>
사람이
일하네요
사람이
보이시나요
일이
보이시나요
사람과 일
가운데
무엇이 먼저
보이시나요
사람이
일하네요
사람을
보시나요
일을
보시나요
사람과 일
가운데
무엇을 먼저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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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9.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1-2)
밀 이삭과 밭의 우의적 의미
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율법 규정이라는 낡은 옷을 벗기고, 말씀에 대한 이해와 드러난 행실을 통해서 은총의 새 옷을 입히기 시작하십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에 그를 밀밭 사이로 데리고 들어가시는데, 그것은 곧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서 있는 밀 포기와 이삭이 의미하는 것은 작은 신비가 아닙니다. 밭은 온 세상이고, 밀 포기는 인류의 성인들이 뿌린 씨의 풍성한 결실이며, 이삭은 사도들이 씨 뿌리고 먹이고 키워 온 교회입니다. 밀 포기마다 풍성한 덕행의 이삭들이 맺혀있습니다.
우리의 덕행이 맺은 열매들을 이삭에 견줄 수 있는 것은, 둘 다 소나기에 꺾이고 땡볕에 시들고 홍수에 잠기고 폭풍에 흩어지면서 마침내 주인의 복된 곳간에 쌓이기 때문입니다. 땅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기적처럼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되는 줄 알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시어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교체하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예수님은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셨을까?
예수 - 나의 다른 종교 체험
신약성서 저자들은 당시에 이미 다른 종교와 대화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리스 철학과 신화를 염두에 두며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다. 베드로 1서에서는 헬레나즘 혼합주의와 대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헬레니즘 혼합주의에는 페르시아 · 이집트 · 그리스 종교가 뒤섞여 있다. 복음사가들은 다른 종교의 개념과 사고를 나름대로 받아들여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 활용했다. 따라서 다른 문화와 종교를 공부하면서 예수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241)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위대한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한국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에크하르트 연구가 부진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가 생애 말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이단 파문을 받은 사상가였다는 것이 , 그 파문의 정당성 여부를 막론하고 좀 위험한 인물이 아닌가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의 신비주의 사상이 지닌 참신성, 철저성, 진지성, 단순성, 혁명성 등이 기존의 신학 체계의 틀이나 제도 종교의 범주 안에서 보면 수용하기 어려울 만큼 파격적이라는 데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에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적 유일신 신앙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좀더 자세히 실펴보기로 하자.
첫째, 에크하르트는 그가 그 안에서 자라났고 배웠던 중세 후기 스콜라 신학 전통에 서면서도 신비주의적 색채가 매우 강한 ‘스콜라 신학적 신비가’(scholastic mystic)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스콜라 신학의 사유 체계와 어휘를 구사한다. 예컨데 형상과 질료, 순수 존재, 지성에 대한 강조, 하나님처럼 닮게됨, 선험적 초월 범주인들인 하나와 진리 자체와 선 자체, 모걱인 형상인 등의 개념이 그렇다.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도미니크파 스콜라 학자로서 난해하고 딱딱한 용어들만 구사했다면 그의 사상은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관심을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대학자요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몸소 체험하고 깊은 사색을 통해 다다른 진리를 매우 파격적인 수사학, 예화, 감성적 어휘 구사를 통해 가슴에 와닿도록 가르쳤다.
라인강을 따라 널리 퍼져 있는 수도원의 수사들이나 신도들은 설교를 통해 표현된 에크하르트의 심원한 명성에 큰 감동을 받았는데, 그들은 지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음에도 에크하르트를 이단이라고 파문한 전문 스콜라 신학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에크하르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설교가 진리를 설파하는 생동감과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고, 최고 수준의 지성적 진리 체험이 순수하고 직설적인 감성적인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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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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