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72]백 선생님의 오래된 책 <거듭 깨어나서>
백기완 선생님이 ‘통일의 꿈’이 안고 일평생 고군분투한 <통일문제연구소>라는 개인 연구기관을 아시는가? 벌써, 어느새, 선생님이 별세하신 지 2년이 넘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런 ‘개판 시국’에 정말로 그리운 분이다. 선생님의 사자후獅子吼를 한번만이라도 더 들으면 좋겠으나,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로 비극이다. 얼마 전 ‘함석헌 기념관’과 ‘문익환 통일의 집’을 다녀오는 길에, 내처 백 선생님의 자취가 역력한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았더니 ‘기념관 개관 준비’로 문이 닫혀 있었다. 세 곳을 찾은 까닭은 순전히 목마름이자 그리움 때문이다. 그리움의 발길은 멈춰 섰지만, 선생님이 우리에게 주고간 교훈은 얼마나 많고 크던가.
며칠 전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사무처장이라는 분의 카톡이 왔다. 나의 졸문을 읽다가 <백기완 수상록- 거듭 깨어나서>라는 책 사진을 봤는데, <백기완기념관>에 기증해줄 수 있냐는 것이다. “당근. 다른 책도 얼마든지”라고 답장을 보냈다. 나도 까마득히 잊어먹고 있던 책이어서, 책꽂이에서 꺼내 새삼스레 읽어봤다. 1984년 10월 <아침>이라는 출판사에서 펴낸 것이다. 지금 읽어도 뭐 하나 틀리거나 잘못된 글이 하나도 없다. 한마디로 똑소리다. ‘전작주의자全作主義者’(필이 꽂힌 문인이나 사상가 저서는 모조리 소장하여 읽는 사람?)는 아니지만, 아마도 글을 알고부터는 선생님의 저서라면 거의 다 샀던 것같다.
재밌는 것은 책 맨 뒷장에 이 책을 결혼 전 여자친구(당연히 현재의 아내이다)에게 선물하며, 한 줄 써놓은 메모를 발견한 것이다. 1984년 11월 1일. 10월에 펴냈으니 따끈따끈한 책이었다. 결혼을 한 달 앞둔 시점(12월 16일). 내용도 재밌다. “우리,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말야. 생각만이라도 해야 될 일은 (반드시) 있다. 최소한, 아니 최대한. 우리 ‘사랑’이란 말은 생각해야 되리라. 統一은 곧 사랑이니까, 곧 民主이니까”라고 쓰여 있었다. 하하-, 이런 메모가 남겨 있다니, 반갑기까지 했다. 상경하는 길, 기차속에서 읽으면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전혀 기억이 없다” 한다. 그랬었구나. 그때도 평생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민주, 사랑, 통일, 이런 의식은 가지고 살자고 했었구나. 다행이다. 신문사 수습이 막 끝난 초년기자 시절의 일이었다. 나 호올로 재미난 일이다.
책 기증을 부탁한 재단의 사무처장은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거의 다 같이 자리를 했던 것같다. 여성 사무처장은 선생님과 고락苦樂을 30년 동안 같이 한 동지이기도 했다. 혹자는 ‘작은 백기완’이라고 부를 정도로, 선생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이것은 선생님의 큰 복이었다. 선생님이 혼자 운영하는 통일문제연구소에 ‘간사’라는 이름으로 합류한 게 97년. 처음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선생님이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선 1992년. 노동자로서 ‘안양민주청년’이라는 단체에서 일하면서 ‘선거대책본부’일을 도왔다고 했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대학로에서 사자후를 토한 후 5000여명과 광화문까지 행진하던 그때, 그야말로 노도怒濤의 물결이었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특유의 말갈깃머리. 손가락 빗으로 쓱쓱쓱 빗어올리면 그만이었다. 민중들의 성금으로 공중파 방송 유세를 두 번이나 했던가. 예행연습 하나 없이 20분을 깔끔히 해치워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던가. 선생님에 대해 어찌 한두 마디 일화를 늘어놓을까?
30년 동안 아버지처럼 섬기던 선생님의 추모문화제때 ‘작은 백기완’ 의 동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평소 노동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기죽지 말라’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알통 밖에 없는 노동자 민중들 기까지 죽으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싸우다 투쟁이 어려워져도 노동자들이라면 온힘으로 함께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자기가 자기를 달구는 ‘달구질’을 하고, 곁에 동지가 기 죽어 있으면 같이 나가 싸우자고 서로 용기를 주는 ‘을러대기’를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시간 선생님을 모시고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투쟁현장을 누빈 것은 저한테도 큰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노동자들에게 큰 힘을 주시던 선생님의 ‘부리질’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모이신 우리들 모두 앞으로도 기죽지 말고 노나메기, 노동해방 세상 만들 때까지 끊임없는 달구질과 을러대기를 하겠다는 다짐의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한평생 한마음 한뜻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오신 백기완 선생님의 고귀한 뜻을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비정규 투쟁 현장에서 선생님의 뜻인 ‘노나메기 정신’(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으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짝-짝-짝, 역시 ‘작은 백기완’ 만세닷! 머지 않아 ‘백기완 기념관’에서 선생님의 목소리를 생생히 듣고 싶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44]아, 백(기완) 선생님!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