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67
4월21일[부활 제2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96Mz9djdp4
(김규동 요나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의 기적, 용서의 기적!>
단체로 세미나에 오신 분들 아침 해장거리를 사러 재래시장을 찾았습니다. 해장에는 뭐니 뭐니 해도 시원하고 담백한 바지락탕이지요. 요리하기도 쉽습니다. 일단 신선도가 첫째가는 관건입니다. 잘 해감시킨 바지락을 깨끗이 씻은 후 적정량의 물을 분과 센불에 바글바글 끓인 다음 청양고추와 대파를 왕창 투입하면 끝입니다.
늘 고민되는 문제는 양입니다. 백여 명 되는 사람들을 위해 5킬로면 되겠지 했는데…. 그걸로는 제맛이 안납니다. 어쩌지 하다가, 5킬로를 더 샀더니 들고 오는데 얼마나 무겁던지…. 백 명 손님 치르려면 온 식구들이 달라붙어야 하고 다들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식탁에는 장정만 5천 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 1만 명, 아이들 5천 명 하면 거의 2만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의 빵을 나눠 먹은 백성들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미리 앞당겨 목격하고 체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이런저런 기적과 표징들을 행하시고 보여 주신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손을 통해 아버지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와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표징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과 예수님 두 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두분은 온전히 하나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기적과 표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과 표징은 더 이상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껑충껑충 뛰고 하는 스타일의 기적이 아닙니다. 이 시대 기적은 사랑의 기적입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사랑하는 기적입니다. 또한 용서의 기적입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기꺼이 용서하는 그런 기적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XlXOtkl6AA
++++++++++++++++++
<지금 우리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재현할 방법은?>
데니와 리사 벨레시가 쓴 『기적의 100달러』란 책이 있습니다. 2000년 11월 어느 주일 데니 벨레시 목사가 자기 교회 교인들 100명에게 100달러씩을 나누어주고 한 실험적 사목의 결과를 쓴 책입니다. 지원자들은 교회가 나누어 주는 100달러씩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다음의 세 가지 조건만은 지켜야 했습니다.
첫째,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라 주님의 돈, 곧 하느님의 돈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것.
둘째, 이 돈이 어디에 쓰이든지 관계없지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만 사용할 것.
셋째, 그날로부터 90일이 되는 날, 결과를 전 교인에게 보고해야 할 것.
이 이상하고 부담스러운 프로젝트에 나서는 사람이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일 4부 예배에 참석한 모든 교인에게 1만 달러가 넘겨졌습니다. 돈을 받은 신도들은 모두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100달러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만져본 돈 가운데 가장 쓰기 곤란한 돈이었습니다.
90일이 지나고 미국의 엔비씨(NBC) 방송은 이 장면을 ‘데이트라인’(Dateline)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미국 전역에 방송하기 위해 녹화했고, 2000명이 넘는 교인이 모여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아주 놀라웠습니다.
지원자들이 간증하는 동안 교회는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감동의 물결이 넘쳤습니다. 그 100달러들은 여러 곳에서 기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 불치병 어린이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일을 시작한 킴(Kim)은 창고에 하나 가득 아동 도서를 모으게 되었고,
- 어떤 이는 노숙자에게 담요를 사주었고,
-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는 데 사용되기도 했고,
- 어떤 100달러는 ‘예수’라는 영화를 상영하는 일에 쓰였고, 열 명의 친구가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면서 금액은 6000달러로 불어났습니다.
- 아기를 유산하거나 어린 아기를 잃은 가정에 꽃을 보내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 어떤 사람의 100불은 미혼모의 보조금으로,
- 혹은 교도소 사역을 위한 헌금으로,
- 멕시코의 무주택자를 위한 주택 기금으로,
- 중국의 신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 어떤 사람에게 간 100달러는 90일 만에 1만 3000불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결국 1만 달러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90일이 지난 후에는 15만 달러가 넘는 돈으로 불어났습니다.
오늘 복음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믿음만 있다면 이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고픈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와 같은 자본금이 있어야 합니다.
위 사례에서는 1만 달러가 될 것입니다. 또 그것을 나누어줄 사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또 남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야 합니다. 그것이 다 나누어주고도 남게 된 15만 달러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한 신도들과 그 도움을 받은 이들의 믿음의 변화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처음에는 교회에서 받은 100달러가 다만 하느님의 돈인 줄 알았는데, 차츰 자기들의 모든 돈, 재능과 시간까지도 전부가 하느님의 것임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그분의 청지기임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동안 교회는 ‘폐쇄된 공동체’ ‘교인들만의 거룩한 집합소’라고 인식되었던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참가자 스스로가 많은 것을 깨달았고, 영적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깨달은 것을 ‘여섯 가지 비밀’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첫째 비밀은 주는 것 보다 받는 것이 더 많았음을 알았습니다.
둘째 비밀은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 비밀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넷째 비밀은 적은 돈으로도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섯째 비밀은 이웃을 섬길 기회는 우리 주변에 매일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섯째 비밀은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우리 본당 공동체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고 이러한 깨달음과 교육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리더가 모든 공동체가 배고프지 않기를 원하는 사랑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아직도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그러한 기적 속에서 왜 하느님께서 내어주심으로써 더 가지게 되시는 분이신지 깨달아가야 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 명예, 권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모하고 손해만 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굳이 찾아서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변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평화가 오기도 합니다. 세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이 있어서 따뜻해지기도 합니다. 작은 물방울이 떨어져서 큰 바위에 구멍을 내기도 합니다. 물방은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물방울이 시간을 만나면 단단한 바위에도 구멍이 납니다. 물방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황무지에 나무를 심어서 큰 숲을 이룬 사람을 보았습니다. 매일 도토리를 심었습니다. 30년이 지나자 황무지는 울창한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숲에 개울이 생기고 새와 짐승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남미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어느덧 1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부님을 따르지 않던 현지인들도 이제는 신부님을 가족처럼 대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성당의 열쇠를 내주지 않던 교우들이 지금은 성당의 모든 열쇠를 신부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따뜻함과 정성이 얼어있던 교우들의 마음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과테말라에 후임 신부님이 한국에서 오면 이제 더 힘들고 어려운 콜롬비아로 선교를 간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열정에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의 헌신에서 바위에 구멍을 내는 물방울의 힘을 보았습니다. 공소 사목을 신청하는 선배 신부님도 있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지낸다고 합니다. 오래되어 쓰러져가는 공소를 신축하기 위해서 농산물을 팔고, 서울에 가서 모금을 한다고 합니다. 공소사목을 신청하지 않았으면 굳이 신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서울로 가서 모금 강론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30년 넘게 사목을 하였으니 이제 어엿한 본당에서 모든 조직이 갖추어진 본당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배 신부님은 기꺼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있었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주교님께서 본당으로 보내셨을 겁니다. 특수사목을 했으니 본당으로 보내는 것은 상식적인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마음은 아니지만 보좌 신부기간이 길어지는 후배 사제들을 위해서 본당은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은 저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4년 전에 이곳 뉴욕의 미주평화신문으로 왔습니다. 미주지역이라는 바위에 계란이 되어 신문홍보를 다니려고 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태풍이 불었습니다. 그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미주가톨릭신문은 철수했습니다. 팬데믹 태풍은 끝나고 이제 신문홍보를 다니고 있는데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강좌 기획팀’입니다. 열정과 헌신만으로 사제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치밀한 기획과 노력으로 주교님의 마음도 열었습니다. 말씀과 영성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신부님들을 모시고 신앙강좌를 시작하였습니다. 팬데믹으로 지친 교우들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주교님을 모시고도 강좌를 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열정을 가진 분들과 함께하니 저도 기꺼이 계란이 되려고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쟁쟁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하기 힘들었던 ‘하느님나라’를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광주리를 모아보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솜털로 바위를 치는 열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고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군대로 불의한 자들을 심판할 수 있었지만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솜털로 바위를 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바위를 깨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이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습니다. 편한 길 꽃길도 갈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계란’이 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15: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말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풀밭에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 하신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신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주신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14절)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그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 물 위를 걸을 예언자(마태 14,25-31), 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5-9)
여기서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라는 말은, “사도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말씀이다.”라는 뜻인데, 왜 필립보가 언급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빵의 기적’을 계획하고 계셨다.”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라는 뜻입니다.
필립보 사도와 안드레아 사도가 한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저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두 사도는 “하느님의 기적이 일어나야만 하는 상황입니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관복음과는 조금 다르게, 요한복음에서 ‘빵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증언이고,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신 일에(예수님의 계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떻든, 이야기 속의 군중은 배고픈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억지로 빵을 먹이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의 군중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마르 6,34) 그리고 육신의 배고픔보다 영적인 허기와 갈증을 더 심하게 겪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영적인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다가 더 심한 허기와 갈증에 빠지는 것을 흔하게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는 방법으로 ‘빵’을 선택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먹는 일’이 ‘생존’에(‘생명’에) 직결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0-15)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또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간청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빵의 기적’에 대해서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로만 그치지 않고 정치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군중의 그 심정이 물질적인 빵만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추구하는 쪽으로 바로잡으려고 애를 쓰시는데, 그 가르침은 요한복음 6장에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면 안 되고, 현상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고, 많은 경우에 그런 말은 그냥 ‘말장난’이 될 뿐입니다. 이야기 속의 군중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열광하고, 그 현상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만 보면서,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은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빵의 기적’의 핵심은 ‘빵’이 아니라 그 빵을 주신 ‘예수님’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사회사업과 복지사업을 많이 하고 있는데, 만일에 ‘사업’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잊어버리면, 그러면 물질적인 이익만 찾는 사업체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사업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교회는, 또 신앙인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 첫 번째 사명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교회와 신앙인이 예수님을 잊어버리면 얻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요한 복음 6장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1-15절), 물 위를 걸으신 기적(16-21절),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와 제자들의 반응(22-71절)으로 구성됩니다. 오늘부터 평일 미사에서는 이 순서에 따라 복음이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십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 기적 사건을 “표징”(그리스 말: ‘세메이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용되는 ‘표징’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행위의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표징이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베풀어 주시려고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어 활동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빵의 기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빵의 표징으로 사람들은 믿음에 이르게 되지만, 그 표징을 목격한 이들의 믿음은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기다려 온 예언자, 곧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임금으로 받아들려는 ‘위험’을 피하여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물러나심’은 또 다른 활동을 펼치시려는 준비입니다.
요한복음의 표징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다양한 사건들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언젠가 손님이 와서 여의도에 있는 한 식당을 간 적이 있었다. 주인은 사극에 자주 나오는 탤런트인데 참으로 겸손해 보였다. 종업원들도 하나같이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
이 식당의 특색은 <달라는 대로 무조건 퍼준다는 것>이었다. 어떤 식당에 들어가면 <뭐 좀 더 달라>고 하면 싫은 듯하여 더 청하기 어려운데 여긴 청하면 즉시 갖다 줄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도 퍼주고 또 퍼주었다.
주인인 그 탤런트도 한 번씩 돌면서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식은 어떠신지요?> 하며 겸손하게 인사하며 감사를 표하였다.
손님들은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언제 나는지 모를 정도였다. 가격이 그렇게 만만한 집은 아니었는데도 비싸게 먹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집인 것 같다.
소문에 의하면 주인은 신심 깊은 개신교 신자라고 한다. 신자로서 주일날은 장사를 안 하고 싶은데 고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연단다. 그러나 그날 자신은 나오지 않고 종업원들만 나와서 일하는데 그날의 전 수익은 종업원들의 몫이라고 한다.
자신은 주일날 돈을 벌 수가 없다는 것이고 고객들을 위해서 종업원들이 수고하고 그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주인의 이러한 자세는 종업원들이 그 바쁘고 힘든 일 가운데서도 기쁘고 성실하게 일하도록 만들어주고 고객들에게도 참으로 풍성하게 대접해 준다는 느낌이 들게 해 줌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베푸시는데 주님의 자세가 진정한 봉사자의 자세, 섬기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된다.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아무리 수가 많다 하더라도 먹여서 보내야겠다는 생각, 바로 이러한 자세가 달라는 대로 주어도 남게 되는 기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겠는가?
어떤 자매가 <사제는 아낌없이 줌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데 신부님은 어떠신지요?>라 물었다. 달라는 사람에게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 주고 또 내어 주는 자세는 주님의 자세요 그 식당 주인의 자세요 사제의 자세요 모든 크리스천의 자세가 되어야 하리라.
그래야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참 기적이 무엇인지를 우리도 체험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해 본다. 나는 진정 줌으로써 행복한 사람인가?
=====================
[수원교구 김우정 바오로 신부님]
<마음속 계산기>
기도를 드리다 보면 이따금 좋은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도 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거나 은총의 놀라움에 눈을 뜰 때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확신과 보람을 느낍니다.
반대로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분을 드러내는 기도의 목적에서 벗어나, 이런 체험을 하는 것에만 매달려 무언가 자극이 될 만한 것을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고자 하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의 깊이였지만,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에게 빵을 먹이신 예수님의 모습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우리도 이런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은총을 보기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짐으로 인해 생기는 이익에 더 관심을 두거나 무언가 감성적인 것에만 더 집중해서 본질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이런 신앙은 본질이 아니라 선택 사항이 됩니다. 신앙이 선택 사항이 될 때, 우리는 주님을 못 박았던 사람들처럼 미련 없이 주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이신 하느님께 당신을 일치시켰던 주님께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계산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산은 아직 미숙하고 서투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계산기를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찾아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때에 따라 선택하는 사항이나 옵션이 아니라 진실한 가치를 지닌 본질로 탈바꿈해 나갈 것입니다.
=====================
[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행하자.>
오늘 독서에서 그들이 사도들을 죽여 버리려고 생각하였을 때에 율법교사 <가믈리엘>이란 바리사이파 사람이 사도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에 의원들 앞에서 말한다.
그는 하느님께서부터 온 것을 사람이 없앨 수 없으며,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은 그냥 두어도 언젠가 망하여 없어질 것이므로 따라서 사도들을 버려두자고 말한다.
만일 사도들의 행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면 망할 것이며, 하느님께서부터 온 것이라면 하느님과 대적하는 잘못을 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사도들을 버려두자고 권고한다.
이 말씀을 들은 의원들은 그를 존경하였고 또한 백성을 두려워하기도 했기에 사도들을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하며 사도들을 풀어주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모욕을 당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며 의회를 물러나와, 날마다 복음을 전하였다.
가믈리엘은 기원전 후 무렵 가장 유명한 율법학자 힐렐의 손자이며, 사도 바오로의 율법교사였다.(사도행전 22장 28절) 그는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당시 백성으로부터 존경받던 율법학자였다.
‘분리된 사람들’이란 뜻을 지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속된 것과 어울리지 않고 분리되어 거룩하게 살려는 사람들로서 율법의 정확한 해석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오 복음 23장 2절-3절)라고 말씀하셨다.
이들은 역사가 하느님에 의하여 통제되며 하느님의 목적에 의하여 다스려진다고 믿었다. 또한 부활과 내세를 믿었으며, 사람은 이승에서의 삶에 따라 내세에서 그 대가를 치른다고 믿었다.
가믈리엘이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학자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잘 실천하는 충실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음을 뜻한다. 때문에 그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고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불의하게 처형당하셨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사도들이 행한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표징을 읽을 수도 있었다. 그 또한 부활과 내세를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의회의 의원들 앞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들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는 의원들의 손에서 사도들을 구해내었다.
비록 그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도들에 대한 박해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어긋난다는 점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지만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 곧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구해내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는 여러 종교와 종파가 있다. 그리고 종교 간, 종파 간의 대립과 갈등이 대단히 심하여 살인과 살상, 모함 등의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여러 종교와 종파로 갈린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악을 허락하시듯이 이를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를 단죄함으로써 사랑을 거스르는 우를 범하지 말자.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을 거스르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생각하자.
그리하여,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든지, 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며, 판단하고 행하는 신앙인이 되자.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셨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표징 너머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해 걱정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셈법, 계산이 밝으니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 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은 곧 성체성사를 통해서 생명의 빵을 끊임없이 제공하시게 되리라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이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영적인 양식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 18,15) 하였습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 것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인간적인 셈은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 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 37,5)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을 빵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지요?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의 설립자인 토머스 에디슨은 일명 발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으며, 특별히 음악과 영화 등 대중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그의 전기를 읽으며 꿈을 키웠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전혀 다른 길을 살지만, 그의 삶과 열정은 어린 저에게 매우 흥미로웠고 닮고 싶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하겠지만, 저는 이 말이 더 인상 깊습니다.
“나는 평생 단 하루도 일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재미있는 놀이였다.”
오랫동안 특수사목을 하다가 본당사목을 맡으니 처음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본당 일이 적지 않은데, 여기에 신학교에서 강의와 기타 외부 강의 등까지 겹쳐서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살다 보니, 체중도 많이 줄고 피곤함이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앞서 제시했던 토머스 에디슨의 삶 전체가 모두 재미있는 놀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체중이 줄고 피곤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하는 모든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은 당연히 힘듭니다. 힘들기 때문에 일에 대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재미있는 놀이는 될 수 없을까요? 놀이를 통해 자기 삶에 활력을 가져오는 것처럼 지금 삶 전체는 충분히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니 지금 하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도 역시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금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 재미있는 놀이와 같습니다. 일이라 생각하면 의무감에 차서 힘듦이 뒤따라옵니다. 희생, 봉사가 힘들다고 하는 이유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이면 보수를 받아야 하는데, 보수가 없으니 쉽게 포기하고 또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놀이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놀이동산에 가면 돈을 내지요. 놀이에 대한 보수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일이 아닌, 참 기쁨의 놀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봉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빵과 물고기를 늘리신 기적을 행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배불리 먹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작은 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이는 보통 삶 자체를 놀이처럼 즐깁니다. 그래서 봉헌도 놀이처럼 즐겼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봉헌을 하나의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역시 커다란 즐거움이며 기쁨입니다. 이 안에서만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 나오게 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 우리는>
요한 6,1-15 (오천 명을 먹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지금 우리는>
나는
나이기에
나
너는
너이기에
너
지금
이런데
우리인가요?
나는
나임에도
너
너는
너임에도
나
지금
이래야
우리 아닌가요?
기꺼이
내가 되어주시고
네가 되어주시어
늘
우리를 이루시는
그분과 함께
나는
나임에도 기꺼이
네가 되고
너는
그대임에도 기꺼이
내가 되는
지금 우리는
얼마나 설레고
얼마나 따뜻한가요?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은총을 사는 법>
오늘은 은총을 사는 법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은총을 사는 사람이 되면 좋을 텐데 그리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선 은총을 파괴하거나 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라고 말씀하시듯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임을 모르고 파괴하는 사람은 은총을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술, 담배, 마약으로 심신을 파괴하고 죄로 우리 영혼을 파괴하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성전이라면 우리 공동체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의 성전임을 모르고 복마전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은총을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은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시 이 사람들도 그것이 은총인 줄 모르기에 그것을 허비 또는 낭비하는 겁니다. 지금 꽃이 폈는데 그 꽃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지나쳐버린다면 은총의 허비지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데 꽃보다 더 아름다운 이웃을 원수로 여긴다면, 원수로 여기지 않더라도 공동체 형제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선물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은총을 허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지난 은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은총이었네!’라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가 젊고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데 젊음과 건강이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것을 모르고 은총을 살지 못하다가 그것을 다 잃고 난 뒤에야 은총이었다는 사람들입니다.
젊음이나 건강이 아니라 정반대의 시련도 은총인데 늦게야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아니라 하느님의 단련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이지요.
다음으로 은총을 현재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되고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성사적인 사람들입니다.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인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에서 하느님이 발생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함께 사는 사람과 하는 일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면 모든 것이 은총이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데 더 나아가 은총을 당겨서 산다면 이처럼 복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굶주린 군중을 먹이기에 앞서 아이가 가진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 감사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적은 것이 이 많은 군중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안드레아와 달리 오병이어나마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이 적은 것으로 그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해주실 은총에 대해 미리 감사드리는 것일 겁니다.
우리도 뭔가 청탁한 뒤 꼭 들어주실 거라고 믿고 미리 감사드린다고 하듯이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철석같이 믿는 주님께서 미리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미래의 은총을 현재 믿는 것이 바로 은총을 당겨서 사는 법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그 모범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지금 젊지 않고 늙었더라도 그래서 약함과 병고뿐일지라도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믿는다면 천국 은총을 내다보고 당겨 살라고 하시고, 그 어떤 경우에도 현재의 어려움 너머 미래의 은총을 당겨 살라고 하십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력의 지혜>
-모든 덕의 어머니-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오늘 성 안셀모 주교 학자 기념일 새벽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이 산뜻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지혜서 말씀도 고무적이었습니다. 성 안셀모처럼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성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같습니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4)
하느님의 벗, 얼마나 멋진 호칭인지요! 이보다 더 큰 영예는 없을 것입니다. 어제 뜻밖의 인터넷 강의를 통해서 깊이 공감한 내용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물론이고 인간이 지녀야 할 세 자질,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중 특히 균형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균형감각은 객관적 안목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바로 분별력의 지혜를 뜻합니다. 아무리 열정이 책임감이 좋아도 분별력의 부족으로 눈먼 열정, 눈먼 책임감이 된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가 강조한 것 역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지도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는 말 역시 분별력의 지혜를 뜻합니다. 매사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직시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베네규칙중 한 대목입니다.
“아빠스는 자기의 명령에 있어서는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아니면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한다.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 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베네딕도의 중용사상을 대표하는 구절입니다. 분별력은 과격하거나 지나치지 않음이요, 깊은 생각에서 나온 절도있는 태도입니다. 베네딕도는 이 중용사상의 핵심인 분별력의 지혜를 모든 덕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물론 일상의 삶에서 모든 이들에게 참 중요한 것이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주목되는 바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라는 대목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공성이불거, 즉 공이 이루어져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내 자리가 아니다 싶으면 지체하지, 집착하지 않고 떠나는 것을 의미하니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후의 예수님의 분별력의 지혜가 빛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 분은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6,14-15)
눈먼 대중의 광신적 행태에 휘말리거나 휩쓸리지 않고, 대중의 덧없는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유혹이다 싶을 때는 지체없이 그 자리를 훌훌떠나 즉시 외딴곳을 찾았던 참으로 분별력의 대가였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멋진지요! 참으로 눈먼 군중의 무지를 일깨우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이렇게 제자리를 아는 것이 지혜이자 겸손이기도 합니다. 겸손과 일맥상통하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온 백성의 존경을 받던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사도들에 대한 조치는 얼마나 지혜로운지요! 다음 한마디로 혼란한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는 가말리엘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名不虛傳), ‘분별력이 대가’답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5,38-39)
얼마나 멋진 통쾌한 분별력의 지혜인지요!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무관심의 방치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두루두루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하느님께 맡기고 때가 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며 불필요한 간섭의 행위는 일체 배제하고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 건드리지 않는 것 이 둘은 무책임의 방임이나 방치가 아니라 깊은 분별력 지혜의 소산이자 공동체의 평화 공존을 위해서도 필수적 요소들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중세기 영국 베네딕도회 수도회 출신으로 ‘스콜라학의 아버지’라 칭하는 성 안셀모 주교 학자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안셀모는 “주님을 보호하는 도구”, 또는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사람, 도구”라는 이름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름뜻대로 영국 국왕의 간섭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신 성인으로 다음 평가를 통해서도 뛰어난 분별력을 지니신 성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의 신앙은 극히 깊었고 예지는 뛰어나고 그의 행위는 거룩하고 마음은 경건했으며, 그의 웅변은 유창했고 생활은 타인의 모범으로서 충분했다. 그는 전력을 기울여 사업을 행하고 끊임없이 성서를 묵상하고 모든 덕에 출중했다.”
성 안셀모와 동시대를 살았던 성 도리도네오의 증언입니다. 단테가 그의 작품 신곡의 천국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성 안셀모를 언급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습니다. 안셀모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76세를 사셨으니 당대로 보면 장수하신 편인데 병세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삶을 사신 것을 보면 참 경이로우며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도 흡사 지혜로웠던 교회 학자 성인들을 지칭하는듯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공의 빛처럼 빛나고, 백성들에게 의를 가르치는 이는 영원무궁토록 별과 같이 빛나리라."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들인 성인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좋은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하시어 참나의 성인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히바쿡3,19)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6,35)
<메시아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6,1-15)은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표징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본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그들의 배고픔을 걱정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6,5)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
예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 라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십니다. 그러자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예수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5,41-42)
'메시아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기름 부음 받은 이', 곧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과 갈증을 풀어주시는 '영적인 구원자'이십니다.
오늘도 메시아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ZGL1AB1Wxok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 12)
삶의 의미는
삶의 조각들을
모으는
감사에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모든 시간은
넘치는
감사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의
시간이었습니다.
태어난 것에
감사드립니다.
반가운 이웃에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를 비춰주는
생활에
감사드립니다.
남은 조각도
사랑이고
한 톨의 나눔도
사랑입니다.
붙잡을 것이 아닌
감사해야 할
것들뿐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는
성체성사는
분명히
감사와
사랑입니다.
시련을
이겨내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서로의 의미는
감사이며
우리의 사랑도
감사입니다.
마침내
감사(感謝)는
부활이 됩니다.
감사와 사랑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눈물겨운
감사의 오늘입니다.
행복한 오늘
되시길
감사의 기도로
오늘을 시작합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