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추계야유회 개최계획 알림(진천주관)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여 옥동초등학교 제44회동창회 추계야유회를
아래와 같이 실시할 계획임을 알려드리니 많이 참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일 시 : 2008년 11월 16일(일요일) 10:00 ~ 17:00
▶ 장 소 :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두타산(해발598m)
▶ 주 관 : 옥동초등학교 제44회 진천지역동창회
☞ 행사일정 및 내용
▶출발 및 집결
=청주,진천지역 : 청주출발(08:00)→진천출발(09:00)→투타산입구 도착합류
(09:30)
=서울,경기지역 : 서울출발(07:00)→중부고속도로 경유→진천IC 경유→초평
→투타산입구 도착 합류(09:30)
☞ 집결지 : 초평면소재지 지나서 동잠교 대평주유소(영수사입구)
▶산행실시 : 투타산 입구 출발(10:00)→두타산 정상(12:00)→영수암 절 도착
(12:30)→두타산입구 주차장도착(13:00)
▶점심식사 : 초평면소재지 또는 저수지주변 식당이용(13:30-15:00)
▶단합대회 : 15:00-17:00( 식사 후 약 2시간정도)
▶행사완료 : 17:00 각 지역별로 귀가
♧기타 의견이나 질문사항 있으면 연락바랍니다.♧
옥동초등학교 제44회 동창회장 이 동 재(011-9842-1606)
진천지역 회장 손 옥 식
☎ 회장(손옥식) 011-461-7821, 총무(윤기헌) 011-469-3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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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98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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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군 초평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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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타산 (598 m. 충북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산30-1 ) 두타산은 진천군 초평면, 괴산군 도안면과 증평읍의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진천의 상산8경 중의 하나인고찰 영수암을 산자락에 품고 있는 은은한 종소리와함께 아름다움을 간직한 명산이다.
두타산 정상엔 삼국시대의 석성이 자리하고 있는데,주위1km, 높이1.2km의 규모로써 성내에는 두 개의 우물터가 있으며, 이따금 통일 신라시대의 토기편과 기와 조각 등이 발견 되고 간혹 고려 시대의 유물도 출토 된다. 미호천 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두타산은 홍수전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군시절 7 년간 비가 내려 온 세상이 물바다에 잠겼을 때 신하인 팽우가 배를 타고 사람들을 구하던 중 한 섬에 수십명의 사람이 모여 있기에 배를 대고 이들을 구해주었다고 하는데 그 작은 섬이 두타산의 머리였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두타산 정상을 가리도라고 불렀으며 배를 댄 잘록이를 배넘이고개라고 했다. 머리두(頭), 섬타(陀)를 써서 두타산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두타산은 전설 이 외에도 석성을 간직하고 있다. 높이 1.2m, 둘레 913m의 이 산성은 신라시대 실죽이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영수암의 맑은 물을 뒤로하고 동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1시간 30분 정도를 올라가면 정상이다. 정상 부근으로 올라가면 삼국시대에 쌓은 석성인 두타산성 터가 오랜 풍상을 견디면서 돌 무더기로 남아서 등산객들을 반기고 있다. ▶ 두타산의 산행기점은 진천쪽 초평저수지에서 영수사를 거쳐 오르는 길과 대평주유소 전 동작교에서 계곡을 따라 큰재로 오른 후 북동쪽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오르는 길이 자주 이용된다. 이외에 증평읍 자양마을에서 오르는 길이 있지만 접근이 어렵고 능선을 넘어 다시 계곡으로 떨어지는 통에 이용되지 않고 있다.
산성이 있는 598m의 정상에 쉽게 오를수있는 길은 진천쪽의 초평저수지를 지나영수사에 오르는 길과 송티에서 큰재로 오르는 길이다. 영수사로 오르는 길은 평탄해서 걷기가 좋다. 영수사로 가는 길은 초평저수지 위쪽 34번 국도상의 대평주유소에서 안내표석을 보고 들어가면서 콘크리트 포장길인 작은 고개를 넘어서면 왼쪽으로 초평고등학교가 있는 넓은 뜰이 보인다.이길로 곧장 골짜기로 들어서면 영수사 일주문에 다다르게 된다. 신라 말에 창건 됐다고 하는 영수사는 최근 중창한 탓에 옛 절의 멋이 없으나 산뜻하다. 등산로는 절 오른편으로 난 큰 길을 따라 이어지며 이내 개울을 건너며 폭포와 임도를 지나게 된다. 영수사를 출발해 20분 정도면 넓은 공터에 닿는다. 공터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소나무가 숲을 이룬 능선 안부에 올라서며 이후론 남동쪽으로 뻗은 능선을 치고 오르면 된다. 두타산 정상은 넓은 평지로 전망이 좋다. 정상에서 하산은 남서쪽 능선을 타고 사거리인 큰재로 내려선후 서쪽의 큰골을 타고 동작교로 내려서는게 편하다. 큰골 하산길은 34번 국도에 닿으며 원점회귀도 가능하다. 연중 등산 가능함.
▶ 해발 598.8미터인 두타산은 증평읍과 도안면에 걸쳐 세를 이루는 산으로 증평읍 연탄2리 두타산 자락에 위치한 보타사에서 오르는 정상부는 크고 작은 바위와 암벽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정상으로 다가갈수록 험한 지형이다. 정상이 눈앞인데 바위가 길을 막아서는 곳. 설치해 놓은 밧줄을 잡고 오르지 않으면 두세 명이 한조가 되어 서로 밀고 당겨준다면 오를 수 있을까 혼자서는 오르기 어려운 두타산의 정상부다. 그러나 높이와 간격이 적당해서 산행을 하며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고 뛰어내리고 기어오르는 등 짧은 코스이기는 하지만 산 타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정상부에 오르면 증평군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며 미호천평야와 진천평야 또한 조망되는 호방함이 있다. 시선이 동북 방향으로 접어들면 딛고 선 암봉(巖峯)과 같은 높이로 늘어선 두타산의 고봉들이 증평군을 향해 넉넉히 자락을 내린 풍경이 암벽과 곁들여진 모습이 멋스러운 곳이다.
보타사 좌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두타산은 주민 외에 등산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자연이 잘 보존돼 있어 운이 좋으면 천연기념물 수리부엉이를 만날 수 있다. 수리부엉이는 암벽의 바위 선반처럼 생긴 곳이나 바위굴 밑의 평평한 곳, 또는 바위벽 사이의 틈 등을 이용하여 알을 낳고 번식을 하는 맹금류로 둥지를 별도로 틀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암벽과 바위로 이루어졌으며 비교적 험한 지형인 두타산의 정상부는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수리부엉이 서식지로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오염되지 않은 청정환경이기에 주로 꿩, 산토끼, 쥐, 개구리, 뱀, 도마뱀 등을 먹는 천연기념물 수리부엉이가 살 수 있는 것이다.
증평읍 연탄2리 두타산 자락에 위치한 보타사에서 정상까지의 등산코스는 두타산과 증평군 일대의 풍광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중 보타사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곡산연씨 문중의 묘소에서 바라보는 두타산의 풍광은 정상을 앞두고 숨을 고르는 등산객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곳에서 손에 든 모든 것을 배낭에 넣고 정상에 오를 준비를 해야 안전한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산행시간은 약 3시간 정도 소요되며 내려오는 길에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아담한 절집 보타사 구경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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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으로 등산지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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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은 초평면 영구리에에서 영구암을 거쳐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6km 에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초평면 영구리 - 영수암 - 정상 - 용정교 ○ 초평저수지 - 영수사 - 두타산 - 큰재 - 배넘이제 - 암릉지대 - 보타사 탑선마을 ( 약 4시간 30분 ~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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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의 관광안내도를 펴면 유독 눈에 띄는 두 곳이 있다. 푸른 색으로 인쇄된 이 곳은 초평면의 초평저수지와 백곡면의 백곡저수지다. 초평저수지는 초평면 화산리에 있는 저수지로 관개용으로 미호저수지라고도 한다. 지난 1961년에 흙 댐으로 완공되어 1984년 콘크리트 중력 댐으로 개수하여 저수량이 3배 이상 증가했다. 유역면적 49.94㎢, 만수위 면적 2.58㎢, 총저수량 1385만 3200t, 저수지 길이 174m, 높이 19.4m로 진천에서 가장 넓은 저수지이다. 미호천의 상류를 막아 축조한 저수지에는 초평천 등을 비롯한 지류들이 유입한다. 저수지 안에는 수초섬, 큰섬 등의 작은 섬들이 있다. 전체적으로 굴곡이 심한 ‘ㄹ’자 형태를 이루고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에 둘러싸여 있다. 저수지의 물은 미호평야를 비롯한 일대의 곡창지대에 농업용수로 공급된다.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낚시터 중의 하나로 붕어·잉어·향어·금잉어·뱀장어 등이 많으며, 겨울철 얼음낚시로도 유명하다. 저수지의 연안에는 초평 호텔과 테니스 장, 오락실, 음식점 등의 부대시설이 갖추어져 가족단위의 소풍지로 활용할 수 있다. 진천읍에서 동남쪽으로 13㎞ 정도 떨어져 있으며, 천안-괴산을 연결하는 국도가 저수지를 끼고 지난다. 초평저수지를 끼고 두타산(해발 598m)이 자리잡고 있는데 부처가 누워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진천의 상산8경 중의 하나인 고찰 영수암을 산자락에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명산이다. 초평면 영구리에서 영수암으로 오르는 정상은 2시간30분 정도면 도달하는데, 두타산 정상의 누각에서 주위를 돌아보면 가슴이 펑 뚫리는 상쾌함을 폐부 깊숙이 간직하고 내려올 수 있다. 저수지 길을 따라 문백면 구곡리에 이르면 그 곳에는 진천이 명물이 또 하나 자리하고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인 진천농교가 그것이다. 진천농교 혹은 농다리로 알려진 이 돌다리는 지네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돌다리 28칸 중 현재는 25칸만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농다리는 길이가 93.6m, 폭이 3.6m, 교각높이 1.2m이며 교각사이는 80cm내외로 석회를 바르지 않고 자연석만을 쌓았는데도 견고하고 떠내려가지 않아 신비함을 더해 주고 있다. 또 매년 8월이면 이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인 농다리를 널리 알리고 보존의 중요성과 조상의 슬기로움을 체험하는 테마축제가 열려 불꽃놀이 점등식 등 장관을 이룬다.
대전에서 청주-진천간 17번 국도를 이용해도 1시간30분 정도면 백곡저수지를 볼 수 있다. 이 국도를 이용해 진천으로 들어서마자 좌회전해 34번 국도를 타고 2㎞ 정도만 가면 백곡저수지와 종박물관, 역사테마공원, 대성사를 만나볼 수 있다.
동양에서 유일하게 싸이폰식저수지(1949)였으나 80년대초 저수지 제방확장 축조사업으로 싸이폰시설은 수몰됐다. 저수지의 규모로는 진천과 음성 유역에 필요한 농수량을 보급할수 있도록 3089ha를 개발하고 총 저수지량 2200만t, 만수 면적 232ha, 제방높이 27m, 길이 410m 수문식 물넘이 4운(澐) 최대 배수량 초당 833t이나 된다. 진천의 3대 낚시터(백곡·초평·덕산)의 하나로 교통이 편리하고 잉어의 입질이 좋아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저수지 바로 옆으로 종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곳은 전통문화유산인 범종에 대한 예술적 가치와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종에 대한 이해를 돕고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종에 대한 자료검색과 소리체험 및 음향 감상코너, 종 제작과 정의 밀랍 재현코너 등 직접 종 문양 탁본과 타종을 체험할 수 있다. 또 야외의 역사테마공원은 휴식공간으로 사용되고 각종 모임이나 행사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밖에 태령산(해발 461.8m) 정상에는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탄생지 및 태실이 위치하고 있고, 만뢰산 자락에는 목탑 가운데서는 세계에서 최대(47.2m)로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건립된 보탑사, 길상사 등 김유신 장군과 연관된 역사유적들이 사시사철 풍경과 운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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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저수지, 영수암, 보탑사, 김유신장군 탄생지
○ 증평군 정체(政體)를 지닌 이성산성 우리 증평군에 삼국시대 유일한 문화유적인 이성산성이 있다. 이는 증평읍과 도안면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259.1 의 이성산 7~9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성산성은 북성(정상부 259m) 과 400m 남쪽에 있는 남성(242m) 으로 각각 독립된 형태로 축조된 토성이다. 북성은 내성과 외성, 그리고 외성에 붙어있는 자성이 있는 독특한 4중구조를 하고 있고, 남성은 외성과 내성의 구조로 축조되어 있다. 축조형식은 북성이 이성산 정상의 8~9부 능선에 내·외성으로 된 2증 테뫼식 토성이며, 남성은 정상의 7~9부능선상에 테뫼식과 포곡식이 복합된 토성이다. 이 두 성의 길이는 북성의 둘레가 529m(내성이 219m. 외성이 310m), 남성의 둘레가 1,411m(내성이 741m, 외성이 1,052m)이다.
1977년 충청전문대학박물관의 학술조사 연구서에 의하면 성내에서 철기시대의 석기, 토기와 백제시대의 조절토기, 회백색토기, 그리고 신라계의 우각형파수 토기편등 526점이 발견되었으며, 주춧돌과 기와류 12점이 채집되었고 어떤 건축물의 흔적을 발굴, 성내에 사람이 살았던 고지성취락지로 판단되고 있다.
옛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이성산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정 8년(1871)에 발간된 『호서읍지』, 조선 영조 33년(1756)에 발간된 『여지도서에서 청안현 산천조에 유성산은 청안 서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종원년(1865)에 발간된 『대동지지』는 청안현 산천조에 유성산은 청안서쪽20l에 있다. 진천과의 경계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유성산에서 이성산으로의 기록은 1914(대정3)년에 발간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서 기록되면서 이성산이란 명칭으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이성산의 명칭은 정상부의 두 봉우리를 각각 감싸고 있는 형태가 죄인의 손목에 채우는 수갑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수갑과 같이 생긴 성’ 이라 ‘유성’이라고 했다는 설과, 멀리서 바라보면 ‘말의 귀’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이성산’이라고 표기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옛 문헌에는 ‘유성산’과 ‘이성산’만이 확인되며 지금의 명칭은 ‘이성산’이다.
또 고려 말과 조선초의 문신이며 조선 태종1년(1401)좌사간을 지낸 진의귀(?~1424)가 이성산성에 대하여 읊은 시조가 『신증동국여지승람』청안현제영조에 『유성백우』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성산성이 당대의 문화유적으로 귀히관리되었을 것으로 본다.
『유성백우(杻成白雨)』
뭇 산은 평야에 둘러 있고 외로운 성(成) 산머리에 의지했네 바람이 비를 불어 연기같이 흩어지니 산기운이 함께 유연(悠然)하네 무지개 끊어진 곳 어디메인가 갈가마귀 깃들이니 해 저물려 할 때로세 한가한 사람 발벋고 난간에 의지해 있으니 가을물이 앞네에 가득하네
진의귀(陳義貴)
진의귀는 이글 외에도 증평지역을 읊은 『초령청운』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노년에 모든 관직을 비우고 우리지역을 유람하다가 비가 오는 어느 초가을 날 저녁때 고독과 두 번의 유배생활을 통해 인생무상을 도안현청사나, 이성산성내의 집 마루에 앉아 앞내(보강천이나 자양천)을 바라보며 읊은 글이 아닌가 한다. 그는 고려 마지막 왕인 34대 공양왕 3년(1391)에 좌상시로 있을때 정월에 왕이 윤구택을 판서운관사로 제수시 서명치 않은 죄와 조선 태종1년(1401)좌사간으로 있을 때 대사헌이 이지를 탄핵한 죄로 유배생활을 두 번씩이나 하고 이조참의(1409)를 지내다 1424년 죽었다. 그가 우리지역과의 인연은 두 번의 유배생활중에서 고려 공양왕 3년 정월에 유배되었다가 10월에 풀려났을 때 도안으로 유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산에 산성이 있었다는 최초 기록은 김정호의 대동지지, 청안현 성지조에 의해 ‘도안고성재 유성산유유지’로 확인할 수 있다. 이성산은 어떤 지정학적 위치기 있기에 산성을 구축했을까? 산성은 군사적 요충지가 아니면 많은 인력과 경제적 투자를 하지 않는다. 더구나 3km 서쪽으로 이성산(259.1m)보다 배나 더 높은 해발 598m 의 고지에 두타산성이 석성으로 918m가 축조되어 있어 영토와 사람을 보호하는 데는 이성산이 유리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두타산은 산세가 너무 험악하여 인마가 오르고 내리며 생활하면서 성을 보존하고 인근지역을 관할하기에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백마령에서 남족으로 뻗은 백마산(464m), 보광산(532m), 칠보산(541m)에서 좌구산(657m)로 이루는 좌구산맥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은 한강수계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서쪽은 금강수계 상류로 증평, 청주, 진천, 조치원, 옥천, 영동등의 최북단에 위치한 지형지물로 북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신라침범을 방어하기에 가장 중요한 지리로서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성산에 올라서 남서방향을 보면 오창산업단지와 오성과학단지의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전만해도 조치원의 기차가는 모습과 청주시내가 한눈에 관측이 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청주, 보은, 옥천, 영동 등지는 백제의 군현으로 진천, 음성, 충주, 괴산, 등지는 고구려 군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남진은 바로 백마령, 보광산을 넘으면 증평, 청주, 조치원이 바로 고구려의 공격에 직접적인 노출이 되고 만다. 즉 최북단에 있는 이성산이 돌파돼 버리면 남족으로 넓게 전개되어 있는 미호평야와 청주를 지나 문의에 바로 이르르며, 서쪽으로는 조치원에 바로 닫기 때문에 백제는 국도인 공주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백제가 이성산에 성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이성산성은 고구려, 신라, 백제가 꼭짓점경계를 이루는 삼국의 군사적 절대적인 요충지였다. 따라서 이 평야지대를 빼앗으려는 측이나 방어하려는 측이나 모두 전략적 중요지형지물로 인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백제는 3세기 후반 8대 고이왕(234~286)과, 9대 책계왕(286~298)이 고구려를 침략하고 남진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성산에 토성을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으로 명시된 것이 없을 뿐이다.
또한 고구려 20대 장수왕 63년(475)에 장수왕이 백제를 침략하여 21대 개로왕을 죽이고 이성산성 기슭에 진천지역의 금물노군에 속한 도서현을 설치하게 된 것 역시 이성산성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이성산성은 3세기 후반 백제에 의해 축조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인 6세기 중반까지는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이 서로 뺏고 뺏기는 첨예하게 대립하던 군사적 요충 토성이었다. 고려 태조도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지역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태조 23년(940)도안현으로 개명하고 조선 세조대에는 시화역을 설치하여 지역의 교통통신의 역할을 하였다.
이성산성을 중심으로한 관터(시화마을 뒤쪽), 죄인을 다루었던 옥고개(천주교 묘지부근), 도안쪽으로의 매봉산토성등 문화유산 흔적이 많이 잔존하고 있어 조사, 발굴,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며 훼손되어가고 있는 토성과 유산의 정비, 복원을 옛 조상의 얼들은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도 증평군 복지문화과에서 2006년 6월 30일 충청북도문화재위원회에 기념물 지정심의를 올려 12월 충청북도 지정기념물 138호로 지정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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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가 운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강릉) ○경부, 중부고속도로 이용 진천 I.C → 성석 사거리(좌회전) → 삼덕 → 중석 → 용정 21번 국도, 34번 국도 이용 (8.5km, 0:10 소요) ○중부고속도로 - 진천 I.C(진천 방면) - 성석 삼거리(좌회전) - 삼덕 - 중석 - 용정 21번 국도, 34번 국도 이용 ○진천읍과 증평읍을 기점으로 한다. 06:00부터 20:30까지 증평과 진천을 왕래하는 군내버스를 이용, 초평저수지 입구 대평주유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 이용 청주행 고속버스, 직행버스 이용 → 청주~진천 직행버스 이용 (0:50 소요) 10분 간격 운행 → 진천~용정리(초평면) 증평행 직행버스 이용 (0:10 소요) 1일 6회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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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군 관광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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