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수타사의 여정
흐르는 세월에 영혼을 띄워 5월의 봄바람 부는 대로 27일 우리부부가 흘러간 곳이 홍천 수타사다. 천년의 고찰이라는 안내판에 그동안 시간이 무량으로 1000년을 지내왔음을 알린다. 수타산의 주산은 공작산이란다. 이 절터는 공작이 알을 품는 형국의 명당으로 수타사 대적광전과 원통보전이 자리했다. 명당소문에 걸맞게 6.25전란에도 상처하나 입지 않은 십승지(十勝地)가 되었다. 나와 집사람은 이곳이 초행이라 아는 바는 없지만 자연경관에 취해 오랜만에 힐링 코스로 마음에 드는 트래킹을 즐겼다. 홍천시내에서 작은 고개를 넘어 수타사 입구로 향하는 길은 시골 동네 같은 분위기로 시작한다. 시무룩한 기분을 느끼게 한 것은 산 초입으로 들어서며 여늬 산사입구만도 못한 환경 때문이었지만 조그만 고개를 넘어서니 그 아래 흐르는 계곡물이 명경지수였다. 오죽잖은 주차장에 일주문도 없는 입구에는 오늘 입장은 무료라는 팻말만이 걸렸다. 그러함에도 일요일 아침9시인데 차량은 만차다. 아마도 이곳을 아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코스 같다. 인근 산천식당에서 청국장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계곡물 따라 산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수타교를 지나 길 따라 오르면 수타사로 향하는 공작교가 나타나지만 이 다리를 그냥 지나쳐서 곧장 수타천 계곡을 따라 조금 걷다보면 수 미터 깊이의 용담(龍潭)에 이른다. 이것도 물구덩이라는 소(沼)에 일종인데 그 깊이가 수 미터에 달해 익사사고 발생지임을 알리는 프랑카드가 걸려있고 그 아래 구명조끼가 몇 개를 구비해놓았다. 접시물이 빠져죽는 격이다. 이곳 주변이 바위로 둘러쌓인 채 용담의 시퍼런 물빛이 수영금지 팻말을 실감케 한다. 이 이 산소(酸素)길은 약간의 오름이 있지만 걷기에는 안성맞춤 같다. 이 길은 주변의 울창한 나무숲과 어울려 상쾌한 기분을 자아낸다. 이 코스가 이름 하여 홍천군에서 명명한 산소(O2)길이 되었다. 냇가에는 명경지수가 흐른다. 너무도 맑고 깨끗하여 우리부부는 몇 번이고 찬탄을 자아냈다. 궝이라는 이름의 소구유 같은 모양이 군데군데 자리하며 흐르는 물소리를 구성지게 한다. 시냇물바닥은 티 없이 깨끗한 상태로 널따란 바위로 이어져 투명한 거울 같은 물속에서도 물이끼조차 없는 순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도 깨끗하다. 아니 이름답다. 바위가 깨끗하기에 아름답다는 표현은 처음 같다. 시 한 수 읊으면 풍류 쟁이 같은 기분을 낼 수도 있겠다. 아마도 비가내린지 얼마 아니 되어 수타천 계곡이 청명한가보다. 끝임 없이 이어지는 산소길 계곡은 한국판 무릉도원이다.
물소리에 이끌리고 하얀 바위에 홀려 냇가로 내려가 맑은 물을 만지고 사진도 찍어본다. 환갑 이른 아내의 화장기가 완숙한 여인의 자태와 조화롭고, 흐르는 물가에 앉은 모습을 찍어보니 명경지수가 반석위에 미인을 안고 녹음 속에 흘러가는 모습이 신선 같다. 5월의 한낮에도 계곡 양쪽 주위의 녹음이 짙어간다. 봄바람이 부드럽게 스치고 숨차 오르는 가슴이 시원하다. 널따란 바위에 눕고 싶어진다. 수 십 평에 이르는 바위에 탐방객들이 누워서 힐링을 즐기고 있다. 아름다운 계곡 맑은 물소리가 주위경관과 조화를 이뤄 우리가슴과 마음까지도 깨끗하게 맑아지는 기분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자연의 맛을 알지 못했다. 나이가 환갑을 지나며 자연의 구석구석까지 애정을 느낀다. 모두가 사랑스럽다. 나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친근함도 다가온다. 5월의 태양이 숲에 가리어 그늘이 졌지만 기온은 30도에 초여름 같은 날씨라 웃옷을 벗어 허리에 동여매고 주위 녹음 짙은 푸른 잎이 풍성한 나무들로부터 열병식을 받는다. 어느 정도 오르니 출렁다리가 나온다. 여유 있는 자는 이 출렁다리를 지나 계속 앞으로 녹음을 즐길 것이고 우리 같이 젊음을 상실한 이들은 이곳에서 반환점으로 다시 맞은 편 산소 길을 따라 내려오면 된다.
내려오는 코스도 즐거움의 연속이다. 군데군데 길 다란 의자들이 있어 피곤한 다리를 쉬는데도 요긴하다. 내려오다가 마주친 곳이 생태공원이다. 아기자기한 공원의 조형물과 꽃밭 과 나무들, 8각 정자, 그리고 조그만 도랑과 도랑 옆에 무성한 청포, 잘 정돈된 인도 길도, 하얀 수국이 아직도 꽃이 화려하고 찔레꽃과 이름 모를 꽃들도 즐비하다. 여러 생태공원 산책로가 거미줄 같아 다 감상은 못하고 이어지는 수타사경내로 들어와 원통보전에 보시하고 사배를 올렸다. 이런 경관을 지켜줘 고맙다고 합장하고 아름다운 산세를 감상하게 해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정중히 올린 것이다.
수타사의 내력은 이렇다. 신라 성덕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우적산에 있는 日月寺였다 한다. 그 후 세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선조 2년에 이절 옆으로 큰 냇물이 흘러 수타사[水墮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해마다 불길한 일이 생겨 다시 수타사[壽陀寺]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동란 시는 조금도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한다. 역시 명당인 가보다.
원통보전을 보고 삼성각에 인사하고 대적광전을 둘러보고 공작교를 건너 하산하면서 수타교 위를 다시섰다. 아래 맑은 물속에 송사리와 모래무지가 헤엄친다. 많은 사람이 오늘도 이산을 오른다. 관광버스도 몇 대 주차되어있다. 원통보전에 달린 주련문이 자구 마음에 담아온다. 대자연에 비춰보면 하나의 인간은 나무 잎 한 개가 망망한 바다가운데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 하찮은 마음속에 욕심이 무엇이며 질투가 무엇이며 미움이 무엇인가. 모두를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一葉紅蓮在海中)는 원통의 보전다운 글귀가 고귀하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아프고 사람 때문에 기쁘다.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사람 때문에 희망을 붙든다. 인간의 희노애락은 어쩌면 거의 모두 사람으로 인함이 아닐까. 그래서 부처님은 타인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고 했는지 모른다. 수타니파타[ Sutta Nipāta,]에 있는 한 말씀이 생각난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삶에 완성이란 없다. 죽는 날까지 미완성이다. 그리고 바람 한 가닥에도 흔들리는 게 사람이다. 아무도 흔들리라고 하지 않고, 흔들리지 말라고도 않는데, 내가 흔들리는 것이다. 어느 따뜻한 날 다시 이곳을 찾을 때까지 헛된 욕망에 휘말려 흔들리지 말고, 허둥대지 말고, 그러나 덜 부끄럽게, 덜 서럽게 무소의 뿔처럼 곤고한 세상 헤쳐 나갈 수 있길 염원해 본다. 수타사를 떠나며 수타니파타에 있는 부처님 말씀을 홀로 중얼거린다. 올해에는 고즈넉한 겨울 산사에 마음을 비우고 뒤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할 때 한번쯤 조용히 배낭 둘러메고 가봐야 하는 인생 이정표인 듯하다. 무언의 부처님 말씀이 내 가슴을 메아리쳐 오는 것 같았다. 뜻깊고 의미 있는 수타사에서의 여정(旅程)이었다. 헛된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곤고한 세상을 살아온 집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글을 맺는다.
2018년 5월 28일 오전 8시
율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