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사제지간의 인연..
사명스님은 거구로서 장군의 기상이 넘쳤고 스승인 서산대사는 작달막한 키에 전형적인 수도승의 모습이었다는데 두 분이 처음 만나 사제지간이 된 이야기가 있다.
사명스님은 금강산에서 젊은 수도자로서 수도정진하여 불법의 깊은 이치를 깨닫고 신통력까지 얻어 득의양양하여 있는터에 금강산을 오고가는 승속과 대중들에게는 신통력이 뛰어난 고승으로 소문이 자자하여 서산대사께서 이를 실험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소문없이 행장을 꾸려 묘향산 어귀에 다달았는데 웬 사미승이 기다리며 이제 오십니까 하고 반긴다. 사명대사께서는 아시고 동자승을 내보내 영접한 것이다.
서산대사께서는 "내가 초면인데 어떻게 알아보았느냐"고 동자에게 물었다. 길 옆 시내를 가르키며 "기다리는 분이 오시면 냇물이 거꾸로 흐르리라고 하셨어요" 서산대사가 놀라운 마음으로 보니까 냇물이 역류하고 있는게 아닌가.
동자승을 따라 가서 절에 들려 법당에 참배하고 나오니 이때 사명은 신통력으로 손을 뻗어 허공의 새를 움켜쥐고 우렁찬 음성으로 서산에게 묻는다. 이 새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다면 살려놓을 것이요, 살았다면 죽일것인바 살할 자재의 난처한 질문이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내가 지금 법당에서 나가려하오, 들어가려하오" 응수한다.
서산대사의 한쪽발은 법당안에 있고 다른쪽 발은 법당 밖에 딛고 서 있는게 아닌가. 서산대사와 사명은 유전사가 떠나가라 껄껄 웃고 인사를 나눈다. 젊은 사명은 밤새 신통과 삼장을 물어 도전했으나 다음 날 서산대사의 제자의 예를 갖춘다.
그 후로 두 분은 사제지간이 되고 국가가 난을 당할 때 구국을 위해 승군을 조직하여 나라를 찾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안구준님의 글에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련다..
청담큰스님과의 인연이 깊어진 것은 아마 내가 동국대에 재임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당시 스님은 동국학원의 이사 로 기억되고 있다.
여러번 설법도 들은 바 있고 평소에도 존경했던 스님이긴 하나 실상 이 글을 쓰기에는 적격자가 아닌 줄 안다. 한 불자로서 오늘의 수행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청담스님은 한국불교 근대화에 중추적 역할을 한 분이다. 불교정화에 바친 일생은 어느 누구도 신력을 추종할 이가 없을 것이다. 스님이 늘 주장하셨던 승단정화 신도정화 사회정화가 오늘에 와서 그래도 이만한 상태로 된것은 스님의 원력 때문에 이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오늘 승단 신도들의 완전한 정화가 이룩될려면 아직은 멀었다는 것이 누구나의 생각일 것이다. 스님은 한때 조계종에서 탈퇴를 결행해서 세인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당시 사람들은 승단이 오죽하면 저렸셨을까 했던 일이 있다.
스님을 일컬어 원력보살 인욕보살이니 영원한 구도자니, 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성품을 대변한 말일것이다. 스님께 설법을 청하면 한 시간의 설법이 두시간 세시간 되기가 일쑤였다. 스님은 다시 태어난대도 이 길을 가겠다고 늘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1902년 10월 진주에서 출생한 스님은 1919년 3.1운동 때 선봉이 되기도 했다. 만세 시위는 삽시간에 신음소리와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피바다가 되었다. '태극기를 들고 맨 앞에 섰던 나는 제일 먼저 붙잡혔고 당연히 강금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나의 회고록에서 스님은 옥고를 치른 후 2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송운사에서 반야심경을 5일 만에 띠고 6개월간의 행자생활을 갖는다. 귀국 후 옥천사에서 박영호스님을 은사로 득도, 32세에 정해사 만공 해상에서 3년 만에 마침내 오도의 경지에 든다. 당시 오도송의 대의는 이러하다.
<옛부터 모든 부처님과 조사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나 어찌 현학의 이치를
깨우쳤겠는가
만약 나에게 능한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길가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이 후 정화불사로 이어지는 행적은 누구나 다 아는 바다. 온갖 시련과 번민속에서도 청담스님은 오로지 견성성불을 향한 정진에만 일념으로 내달았다.
그래서 스님은 참회없는 정진은 뜻이 없다고 하셨고 성불을 한 생 늦추더라도 중생을 건지겠다고 하셨다. 이 말을 받아 우리가 한 마디한다면 육신은 죽어도 법신은 살아있다고 청담스님을 보고 말할 수 있으리라.
현재 도선사에 스님이 설치한 호국참회원은 그런 뜻에서 참으로 갑진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의 뜻이 길이길이 전해져 후세에 오래도록 귀감이 되었으면 싶다. 근대 한국불교의 거목 청담스님 우리는 그 육신이 오늘에 없음에 섭섭함을 가지면서도 그 법신이 도처에 있음을 알고 있다. -전 국회의원 최제구-
<감상>
청담스님의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본인과 인연이 있는 이, 버스를 타고 갈 때도 옷깃만 스치는 인연이라도 모든이가 성불하기를 발원을 하며 평생 그런 원력을 세우며 사셨다하며, 젊은 시절 선방에서 정진할 때 한 겨울에도 냉방에서 양말도 신지 않고 수행했다하여 인욕보살과 원력보살이라고 불려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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