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으스름달밤,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을 여는데 창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이려니 하고 지나치려는 순간 하얀 물체가 커튼 뒤로 숨는 것이 아니던가. 뭐지? 놀란 마음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 커튼. "워이"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커튼을 열어젖혔다. 스르륵 밀려나가는 커튼 뒤로 보이는 것은 반쯤 열려진 창문. 휴~ 하는 안도감으로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허연 물체!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체 하얀 소복을 입은, 입가에 배인 옅은 미소와 핏자국이 선명한, 텔레비전이나 동화책에서나 보던 봤던 바로 그... 처녀귀신!
무서움과 공포로 다가왔던 그녀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억압된 여성성의 상징이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슬픔이나 고통을 맘 편히 하소연할 곳 없는 여성들의 선택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나 결혼하지 않은 처녀나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경우는 더욱 가혹했다. 남성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소품으로서의 가치와 열녀에 대한 사회적 강요, 외부적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던 상황으로 인해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었고, 죽어서도 쉽게 원한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구천을 떠도는 그들을 도와준 이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사대부들이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녀들을 농락하고 이용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을 준 것 역시 그들이었다. 그녀들의 사연을 듣고 가해자를 찾아 처벌함으로써 원한을 풀어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귀신스토리'를 통해 사대부 남성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사회적 우위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글을 통해 알려진 대부분의 귀신이야기가 그들의 손에 의해 쓰였고 읽혀졌기에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한 맺힌 원혼을 통해 남성중심의 사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하지만 권선징악의 이면에 숨어있는 여성들의 억압은 여전했다. 오직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자신의 한과 의지를 표현하고 보상받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죽어야 사는 여자'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귀신의 이미지가 유독 처녀귀신으로 고착된 것은 미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희생의 그림자를 반영한다. 부모의 명에 따라 혼인해야 했던 딸, 전쟁의 폭력 속에서 성적으로 희생당한 여성, 사랑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처녀, 재혼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전실 딸, 일부일처로 구성된 가족관계망의 바깥에 있었기에 출산과 양육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첩, 남자의 사교 파트너로만 인정되었던 기생 등, 전근대 사회의 제도와 이념 속에서 숨죽인 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은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p173)
결국 처녀귀신은 남성중심의 사회에 은폐된 슬픔의 역사였다. 단순히 일회성의 흥밋거리로만 넘길 것이 아니라 그 억압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봐야 할 요즘이다.
시간이 흘러 처녀귀신의 출연빈도는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녀들의 한과 설움이 완전히 해결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노동자귀신, 빈곤층귀신, 다문화귀신, 장애인귀신, 취업귀신, 청소년귀신 등 더 많은 ‘슬픔’을 대동하고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 www.freeism.net )
첫댓글 알라딘에서 인문학강좌(한국문화코드 였던가?)에 소개되었던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처녀귀신에 대한 이야기 재미있네요. 결국은 사회, 정치적인 환경을 담아낸 것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