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영원히 위대할 수 있다면,
[주간현대]란 지하철 정치신문의 1면 기사가 ‘노무현계보’+‘이명박계보’+‘고건쪽’ 신당창당 눈앞이란 표제어이다. 그 셋의 다리 연결을 가능케 할 ‘배경’의 한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미국 기독교인 정서를 깊이 담은 코메디 영화만 출연하는 짐 캐리의 [뻔뻔한 딕 앤 제인]을 보고 나온 입장에선 더욱 인상이 찌뿌려 졌다. 영화 [뻔뻔한 딕 앤 제인]의 악덕 기업주처럼, 책임 지겠다는 기대감을 받는 이들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지면서 같이 몰락하는 선택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이 너무 많다. 설령, 이인제의원에 ‘팽’(?)당하는 꼴을 당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하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일은 참 보기 어려워 졌다.
1980년대 민중주의를 바라보면 이승만대통령의 진가가 잘못 평가된다. 오히려, 이승만대통령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준 바가 노무현대통령에 지지율 반등의 호재로 자리한 ‘국회탄핵사건’에서 드러났다. 4.19 투쟁사로 북한민족주의에 꼬인 바를 자화자찬할 지언정, 사실은 모든 공권력을 장악한 이승만대통령이 ‘권력 사수’의 초강수를 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위대함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나오고서 돋보였다. 마가렛 대처는 [세계 경영]이란 책에서 보리스 옐친 처럼 쿠데타 군에 대해서 탱크로 응징하지 않고 역사에 맞긴 것에 대한 호평의 구절이 기억난다.
케이블 텔레비전 정책방송을 보니 남북한 철도 연결을 좌우간 열심히 추진한다 한다. 대한민국쪽은 그 의지가 출중한데, 일의 수행은 북한의 여지에 따라서 된다고 한다. 상황에 따른 변화의 칼자루를 북한에 사실상 넘겨준 것이다. 핵무기나 기타 군사 무기등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있어도, 북한에 친화적 자세로 계속 밀고 들어가니 국민들은 헷갈릴만 하다. 가지 않은 길 재미로 한번 가보면 어떠냐 입장으로 ‘실험’심리를 유발하여 대한민국의 확장 이란 이름으로 북한에 발을 얹게 하고서는, 모든 것을 다 뽑아먹을 준비 완료 상황의 보고는 갑갑함을 준다.
뻔뻔한 딕 앤 제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딕이 자기 재산을 회사의 주식 투자로 거의 쓰고 빚을 상당히 진 상황에서,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작업을 다 맞춘 이후에 회사가 딕을 중용하고, 회사는 쫄닥 망한다. 딕은 파산되는 기업에 다닌 이후 직장을 잡지 못해서 백수로 전전하다가, 빚을 변제 안하면 집을 차압한다는 경고가 날아들자 ‘부부’와 같이 강도로 나선다. 그리하여, 빚을 대부분 변제하고 과거의 경제적 여건을 거의 회복한다. 회사 직원등이 완전히 거지가 되고, 강도짓을 하면서 붙잡힌 동료직원의 강도짓까지 보는 데, 회사의 전직 회장은 수백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 딕과 그의 부인 제인은 합심하여, 회장이 재산 빼돌리기 위해서 딕에 책임을 주었던 그 방식 그대로 복수를 한다. 회사 자산에 투자하여 돈을 받지 못하는 직원들에, 회장의 사재 투자로 연금을 받게 한다.
현실적으로 북한에 투자할 유일한 나라는 ‘중국공산국가’뿐이다. 한국 재벌들을 아무리 조이더라도, 곧장 ‘중국’에 투자하거나 생산시설을 거대 시장이 있는 미국으로 이전하면 이전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해저케이블’을 일본측이 조사 완료했다는 주장도 과잉이다. 김영삼대통령 때에 완성된 ‘엑스자형’ 국토 건설망은, 김영삼대통령의 꿈도 김대중대통령과 다를 바 없는 시스템을 꿈꾸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일본은 아시아에서 완벽하게 ‘왕따’되지 않는 것만을 바라지, 그러한 철도로 연결붙는 연합에 포함되길 갈구할까가 매우 의문시된다. 아시아적 야만 코드에 기어들어가지 못해서 혈안이 되는 방식에 일본이 과연 동의를 했을까?
사실상, 김영삼대통령이 김대중대통령의 ‘6.15’에 진지하게 반대하고자 할 의사가 있다면 현재와 다른 길을 택하여야만 했다고 여겨진다. 김대중대통령은 ‘6.15’의 시계추를 마구 돌리나, 하는 작업의 상당 부분은 김영삼대통령 작업의 승계가 된다. 김영삼대통령은 승계한 현실 정치의 작업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6.15’를 반대함이 우선시되는 우파 네티즌들엔 기분이 이상해지는 점을 느낀다. 어느 선택을 하던 간에 자신의 노력이 불량채권으로 돌아오는 ‘딕’의 운명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다를 건너다가 주장하는 바는 김영삼대통령께서 김영삼대통령 시대 작업을 승계한 김대중대통령의 작업을 스스로 비판할 수 있어야 된다는 주장이다.
현실적으로, 2007년에 박근혜대표 중심으로 한나라당이 정권 창출이 되지 않는다면, 중국경제가 강력하게 뒤 봐줄 북한경제의 급속한 몰락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에, 국민의 안정은 허공에 붕 떠 버리게 된다.
‘국민이 대통령’이란 명제아래에 권위주의를 버린 김영삼대통령은 역사의 발전을 초래했다. 그러나, (imf는 별개로 하고) 김대중 노무현대통령의 작업 승계로 인해서 당시엔 몰랐던 국민이 원하지 않았던 정책의 면모는 주목해야 한다. 김대중의 승리는 3김 시대의 승리이다. 김대중만의 승리가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김영삼대통령께서는 김대중 지지 세력이 몰락할 수 밖에 없는 방향의 카드를 뽑을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된다.
좌익의 신화적 존재인 ‘마르크스’가 자주 인용되던 때에 자주 인용되던 인용구일텐데, ‘발자크’는 자기 세력의 몰락이 참된 역사발전의 길임을 인정하고서 자기 세력의 이익에 반대되는 글쓰기를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이란 슬로건을, 북한공산당 김일성 만주벌판 달리는 신화나 모택동의 신화 같은 것으로 써버리면서, 김영삼 김대중 수렴청정아래에 ‘머리만’ 새 인물 교체로 하는 밑 바탕으로 써버리면, 대한민국은 소멸되어 버린다.
성경적 시간은 [삼국지]의 시간을 능가한다. 어렸을 적에 [삼국지]는 왠지 읽기 싫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비도 죽고 관우도 죽고 장비도 죽는다 한다. 주인공 모두가 죽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만화 황금날개’에서 주인공이 사망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가슴 아팠다. 그러나, 커서 보니 100년을 시간대로 그린 소설에서 주인공이 안 죽으면 어쩔껀가 싶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재인식이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을 지나는 대학생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재인식’을 거쳤다. 역사의 객관적 평가는 시간이 과도하게 ‘지근거리’에선 어렵다. 특히, 완벽하게 이해관계가 없어진 연후에나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1997년 대선 재탕으로 우파 표 분리의 3인 선거전 만들기 위해서, 김종필총재 이인제에 왕따 당하기 직전까지 버티는 심정으로 버티게 된다면, 훗날의 역사적 재평가의 몫 마저도 동시에 날라가는 것이다.
‘영원히 고여 있고 역사적 재평가를 거부하는’ 歷史(역사)를 넘어서 ‘신화’가 되는 입장까지를 목적으로 막판까지 ‘배팅’을 할 의사가 있다는 것으로 [주간 현대]의 머릿기사를 보는 인상이었다. 김영삼이 죽고 김대중만 산다면 곧 김영삼 김대중이 같이 사는 것이요, 김대중만 죽고 김영삼이 살아도 김영삼 김대중이 같이 사는 것이다. ‘6.15’에 대해서 정말로 비판할 의지가 있다면, 1997년의 김대중 대권 만들어주기용 이인제 표분리 작전이 나올 수도 있다는 차원의 ‘說(설)’도 나오지를 말게 해야 할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위대하다. 이승만 대통령도 위대하다. ‘나설 때와 들어갈 때’를 제대로 알았던 정치인이었다. 북한 공산 집단과 중국 공산 집단 같이 고여 있는 폐쇄 사회는 후대의 역사 변화를 반드시 ‘선대’의 틀거리 속에서만 하도록 고정한다. 대한민국은 군사 권위주의 정부에서 ‘인식적 단절’을 했듯이, 한번도 ‘인식적 단절’이 요구된다. 그것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정권 교체가 달성된다.
회사 사원들이 고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회장만 권력자로 남아있으려는 모습처럼 추한 것이 없다. 뻔뻔한 딕 앤 제인은 ‘사이먼 버치’나 ‘부르스 올 마이티’처럼 기독교적인 시각이 강한 것도 아니다. 부시대통령을 은근히 비판하는 척 하되, 클린턴 부부엔 정말로 영 아니올시다 하는 풍자적 장면도 실었다. 파산한 기업의 사원들에 ‘유쾌*상쾌*통쾌’의 대리만족을 주고자 만든 영화일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 초기에 좌파들 기용한 바에 대해서 분명히 책임지겠다는 어조의 정치홍보를 강화했었다는 기억이 난다. 현실은 영화적 코믹 어법으로 ‘자력 구제’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닐 것이다. 집권 초기 75%이상의 지지를 해준 지지자와 ‘채권 채무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며 행동해주시면, <제2의 97년 대선--이인제 효과>는 없을 듯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