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ㅡ시선집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수오서재, 20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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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및 박사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등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문명의 바깥으로』 등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예술의 주름들』 등.
2014년 임화문학예술상, 2019년 고산문학대상 및 백석문학상, 2022년 영랑시문학상 및 대산문학상 시 부문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