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태규 칼럼] 반세기를 앞서 실천한 언문일치와 가로쓰기
오태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실장
10월은 ‘문화의 달’입니다. 1년 중 문화 활동을 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서 나라에서도 그렇게 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10월에 한글날이 들어 있지 않았다면 ‘문화의 달’이란 말이 얼마나 공허했을까요.
석유와 반도체가 산업에서 피와 살 노릇을 하듯이 한글은 한국 문화의 피와 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석유와 반도체 없는 산업을 생각할 수 없듯이 한글 없는 한국 문화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문화의 달을 맞아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위업이 더욱 빛나는 까닭입니다.
한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를 갈고 닦아온 사람들이 없었다면 한국 문화는 외래문화에 치여 추풍낙엽처럼 추락했을지 모릅니다. 한글과 한국 문화의 추락을 막아낸 사람 중 한 사람이, 1976년 순 한글 가로쓰기 잡지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한 한창기 선생입니다.
한창기의 문제의식 46년 만에 살린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이름
한국 사회에서 글깨나 쓴다는 지식인 가운데서도 잡지 <뿌리 깊은 나무>는 알아도 그 잡지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던 한창기(1936~1997) 선생을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저도 그런 축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한창기’라는 이름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어슴푸레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우연한 사건’을 통해 그를 좀 더 알게 됐습니다. 바로 그 우연한 사건이,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회사 이름 쓰기’입니다.
일개 지역 방송사인 <광주문화방송>이 지난해부터 한국의 방송 역사, 더 나아가 한글 운동 역사에 남을 사고를 쳤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방송> 등 일부 중앙 방송사들이 한글날을 기념해 그날 하루만 영어 회사 이름 대신 한글 회사 이름을 화면에 일회성으로 띄워왔습니다. 그런데 <광주문화방송>이 지난해 10월 1일부터 한글 회사 이름을 쓰기 시작해, 지금껏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방송사 영어 이름 사용의 문제점을 처음 지적한 사람이 한 선생입니다.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회사 이름 사용은, 한 선생이 1976년 처음 문제를 제기한 문제의식을 46년 만에 실현한 문화적 사건입니다. 다음은 그와 관련한 한 선생의 글입니다.
“우리의 귀에 익은 미국의 ‘엔비시’나 ‘시비에스’의 방송국들도 호출부호가 따로 있고, ‘엔비시’나 ‘시비에스’라는 이름들은 제 나라 말로 된 제 이름의 머릿글자들을 따서 만든 제 나라 말 약칭이다. 이것을 보고 서양 시늉하기를 좋아하기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일본 방송국이, 굳이 약칭이 필요하거든 제 나라 글자로 할 것을 잊고 ‘스타일’을 한 번 내보려고, 비록 제 나라말로 된 이름의 소리를 로마자로 음역한 것을 머릿글자로나마 '엔에이치케이'라 했다." (1976년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라는 글 중에서)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말입니까? 그는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잘못 쓰고 있는 말과 글의 문제를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바로잡으려고 힘쓴 문화운동가였습니다.
제가 볼 때, 한 선생은 세상을 반세기 정도 앞서 산 선구자였습니다. 당대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가장 잘 구사했으면서도 한글을 가장 사랑했고, 세계문화의 흐름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민속과 토속 문화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발굴하고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있는 ‘케이(K) 문화의 원조’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분입니다.
한창기(1936~1997).
언문일치, 한글과 한국의 얼, 토박이말을 사랑한 한글 운동가
그는 한국 문화 전반을 사랑했지만, 그중에서도 한글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우선, 한창기 선생은 말과 글의 일치, 즉 언문일치를 중시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과, 문자로 쓰는 글이 따로 노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과 글을 구분하는 것은, 글을 숭상하는 지식인이 말밖에 못 하는 서민을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입말과 글말의 일치-이것은 모든 언어학자들이 바라는 바다. (중략) 학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이 글로 쓰는 말보다 훨씬 더 시원적이고 인간에게 중요함을 일러 준다. 따라서 나는 서술어의 활용에서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글로는 저렇게 쓰고 함을 역겨워한다. 우리가 말할 때에 상대방에게 ‘해요’ 하거나 ‘해’ 하면 글로 적을 때에도 상대방을 그 상대방으로 삼고 ‘해요’ 하거나 ‘해 하는 걸 보고 싶다.” (1975년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글로는 저렇게 쓰고‘라는 글 중에서)
저도 한 선생의 이런 생각을 조금이나마 본받자는 생각으로, 지난해 12월부터 외부에 기고하는 글을 가급적 ‘했습니다’ 체, 즉 언문일치체로 바꿔 쓰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그렇게 하니 많은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글을 쓰면서 상대방(독자)을 존중하고 대화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자연스레 문장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없어지고, 문장도 쉽게 쓰려고 노력하게 됐습니다. 이런 게 바로 한 선생이 언문일치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민중 사랑’ ‘한글 사랑’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둘째, 한 선생은 한글을 한국의 얼로 생각했습니다. 외래어가 범람하면서 중국말, 일본말, 영어말이 한국의 얼을 갉아먹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얼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글을 지키고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뿌리 깊은 나무>의 창간사인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라는 글에 잘 담겨 있습니다.
“조상의 핏줄이 우리 몸을 빚는다면, 그 몸을 다스리는 우리 얼은 우리말이 엮습니다. (중략) 따라서 <뿌리 깊은 나무>는 그 안에 실리는 글들을 되도록 우리말과 그 짜임새에 맞추어서 지식 전달의 수단이 지식 전달 자체를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힘쓰려 합니다. 또 우리말과 그 짜임새를 되살려 새로운 시대에 알맞은 말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분들의 일에 보탬이 되려고 합니다.”
한 선생은 이런 관점에서 외래어 범람으로 사라지는 한글, 특히 토박이말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무엇보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어의 범람, 일본어 투의 부활을 가장 경계했습니다. 그는 “외래어 하나가 들어오면 우리말에 새로운 어휘 하나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 하나를 소멸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문장 구조를 왜곡시킨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혼이 무너지고 사라진다고 본 것이죠.
그렇다고 한 선생이 외래어 사용을 무조건 반대한 국수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외래어 유입에 따른 한글의 소멸과 문장 구조의 왜곡, 궁극적으로는 한국 얼의 파괴를 걱정했습니다. 그가 토속어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민중 자서전’ 편찬과 판소리 살리기 작업에 힘쓴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글만을 쓰자는 한글 전용주의자라기보다는 한글과 한국 고유의 문장을 먼저 튼튼하게 다지는 게 중요하다고 본 ‘한글 중심주의자’였습니다.
셋째, 한 선생의 사투리 사랑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표준어의 강요로 지역 특유의 토박이말이 사라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사투리를 표준어에서 배제해야 할 변방의 말이 아니라 ‘지방 표준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978년 <국제신보>에 쓴 ‘경상도 사투리’라는 글에서 표준어와 사투리의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국어는 더 통일되어야 한다. 그러나 획일화보다는 융합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중략) 그러나 ‘자기’라는 뜻의 ‘이녁’ 같은 어휘를 사투리라고 해서 무턱대고 내팽개치고, ‘했습니다’ 대신의 ‘했심더’와 같이 더 발전된 언어 형식일지도 모를 서술어의 활용을 얕잡아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지방말의 어휘나 표현이나 형식을 과감하게 양성화하여 자랑스런 한국말의 일부분으로 등록해야 할 날이 올 성싶다.”
표준어로 획일화할 게 아니라 표준어와 사투리의 공존을 주장했습니다. 획일화보다 다양성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것이 획일화하여 다양성이 없어지는 요즘 시대에 더욱 필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토박이말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졌습니다.
“토박이말이란 우리가 어머니 품에서부터 배워 온 어미말(모국어)을 말합니다. 이 어미말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우리 피와 살처럼 되어 있는 말입니다. 이 어미말은 그것이 없이는 한순간이라도 지내기 어려울 만큼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중략) 자기의 정신이나 몸을 순수하게 지켜나가려는 본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순수한 어미말이 남의 말이나 글로 인해서 조금이라도 더럽혀지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더구나 말이 우리의 정신과 의식 구조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이나 크기 때문에 언어의 더럽힘은 바로 우리 정신 문화의 더럽힘이 되는 것입니다.” (1974년 <수도여자사대 학보>의 ‘토박이말과 기업’ 글 중에서)
한 선생이 <민중 자서전>(전 20권) 발간에 힘을 쏟고 판소리의 복원과 보급을 위해 노력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바로 거기에 진짜배기 토박이말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한창기 선생이 창간한 잡지.
문화의 시대 맞아 재발견·재평가해야 할 업적
이 밖에도 한 선생은 우리 글에서 ‘있어서’와 ‘있어서의’의 사용 문제, ‘때문’과 ‘까닭’의 혼동, 영어의 영향으로 대화에서 ‘아뇨’라는 말의 뜻이 정반대로 바뀌는 문제 등, 일상생활의 말글 사용과 관련한 문제에도 자나깨나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한 선생이 끼친 영향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1096년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발간 이래, 1976년 해방 뒤 최초의 순 한글 가로쓰기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하면서 언론출판계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이런 문화적 충격은 1988년 순 한글 가로쓰기 종합일간지 <한겨레신문>의 창간과 2022년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회사 이름 사용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겠죠. 한글 모양을 아름답게 살린 ‘뿌리 깊은 나무’ 서체의 개발과, 출판 역사 최초의 디자인 편집 도입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선생은 반세기를 앞서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동안 잊혀 온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와 창조의 힘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요즘 시대야말로, 그를 다시 불러내어 재평가할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세상은 그가 살던 때와 달리, 일본말을 대신해 영어말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뿌리처럼 샘처럼 깊었던 그의 ‘한글 사랑’ 정신과 철학이, 이런 무분별 풍조에 따끔한 경종을 울려줬으면 합니다.
출처 : ‘문화의 달’에 한창기의 ‘한글 사랑’을 생각한다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