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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과 흥의 신학자, 현영학 선생은 192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아버지 현원국 목사와 어머니 신애균 여사 사이에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때 아버지는, 후에 일본 관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지만, 선교사들을 도와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하는 조사였다. 어머니는 이미 기독교신앙과 신학문을 받아 들여 뜨거운 조국 사랑으로 민족의 해방과 계몽운동에 헌신하던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일찍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부터 여전도운동에 헌신하였으며, 기독교신앙으로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열정의 소유자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함경북도를 무대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애국부인회 지하운동을 하며 독립자금을 모아서 독립운동을 도왔고, 이 일로 3년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렇게 기독교신앙과 민족정신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선생은 그리 건강하게 태어나지는 못했다. 그의 어머니 신애균 자서선 『호랑이 할머니』에 보면, 그 때 선생이 태어나던 순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1월 5일부터 진통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진통이 더욱 심해지더니 석양 무렵 4시에 첫 아들을 분만했다. 내게는 귀엽고 신기하기만 했다. 한 인간을 낳았구나 하는 생각과 잘 길러야 하겠다는 책임감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삼 주 후 어느 날 아기는 숨을 훅 들이키는 듯 하더니 얼마 후에 한 숨을 쉬고 또 숨을 죽이곤 했다. 문 의사의 태도에는 주사는 놓치만 가망은 없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런 대로 그 밤은 또 지났다. 아기는 젖도 먹지 못하고 간헐적인 숨만 쉬는 것이었다.
이렇게 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선생은 어머니의 눈물어린 간호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지만, 선생이 태어난 민족도 일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없이 살아가는 약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녀는 선생을 누구보다 강하게 키웠고,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교육을 통하여 선생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몸소 그것을 보여 주셨다. 어머니 신애균은 학교 교편을 잡기도 하고, 밥장사, 문구가게, 여관업까지 하면서도 한 순간도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 독립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그녀의 강한 생활력은 사회활동, 신앙운동에도 이어져 여전도회, 절제회, YWCA, 자선사업회, 애국부인회를 통하여 나타났다.
이러한 어머니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강한 정신력과 신앙을 바탕으로 선생을 양육했음은 물론이다. 그녀의 자녀 교육관을 보여주는 한 예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선생을 비롯한 여섯 자녀들에 대하여 '스파르타식 채찍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엄격하게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를 잃고 살아가는 백성이 다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찍 남편을 잃은 어머니로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조사로 전도일을 하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일본 관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함흥에 있는 영생고녀의 교목으로 봉직하다가, 1937년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뜨게 된다. 홀로 된 어머니는 누구보다 선생을 강하게 키웠다. 이런 어머니의 바램처럼 선생은 다섯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가장으로서 어느 자녀보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남 달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6남매를 두었는데, 그래도 그 중 한 놈은 아버님의 뒤를 이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셨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어머니의 말씀에 선생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을 한다. 선생 특유의 효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 해에 선생은 선교사 부인인 마일란으로부터 얼마의 학비를 도움 받아 아버지가 공부했던 일본의 관서학원 신학부에 입학을 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선생은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과 아버지의 신앙교육에 의해 그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보통이 넘는 청교도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연애편지도 할 줄 모르고, 헌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신앙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낭만적인 신학교 생활을 꿈꾸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접하면서 선생의 신앙과 그 신학적 사유가 더 넓고 깊어지기 시작했다. 신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신학을 접한 소감을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업에 들어가면 그 당시 관서학원 신학부의 신학 주류는 리쯜이라고 하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 그리고 그 전신이 슐라이에르마허와 같은 사람들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학 강의를 들으면 참으로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귀의하고 우리들의 이성을 발전시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 위의 역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올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배웠지만....(1985년, 정년 퇴임 기념강연)
선생은 이렇게 신학적 사유가 하루가 다르게 넓어져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 곧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라는 것, 여전히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교육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킨 모세와 같은 신앙이 살아 있었고, 그 문제가 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에 대해 답답해 했다.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 민족에게 내가 공부하고 있는 이 신학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보통 시민 노릇을 제대로 못 하는 천대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우리 재일 교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두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이 재일 동포들의 그 처참한 상황, 그리고 일본에서 백정으로 천대받는 일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상황을 보았습니다. ... 그러면서 저는 '이런 모든 것들 하고 우리가 지금 신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슐라이에르마허나 리쯜과 같은 사람들의 신학적인 이론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이런 신학들이 우리들의 현실,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 무슨 해답을 주고 있는가? 어떤 해답도 없지 않나? 아무 관계도 없지 않나?' 하는 불만들이 마음 한 구석에 조금씩 있었습니다.(퇴임강연)
이러한 신학적 고민도 현실적인 문제, 곧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 공부해야 하는 고학생으로서는 계속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이면 쉬지 못하고 노동을 해야 했다. 여름방학 어느 날, 선생은 선교사들의 휴양지인 화진포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장질부사라는 병을 얻어 여러 주를 앓아 누운 적도 있었다. 이처럼 평상시에도 몸이 허약한 선생에게 신학 수련은 또 다른 연단을 요하는 순례의 길이었다.
이렇게 강인한 정신력과 생활력, 그리고 신학적 탐구력을 가지고 선생은 마침내 1943년 가을에 신학교를 졸업하기에 이른다. 신학교 졸업 후에 선생은 일본 오베에 있는 한국인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다. 그러나 막바지 전쟁에 이르러 수세에 몰린 일본이 한국 젊은이들을 전쟁에 징집하여 막아보려는 마지막 발악이 선생의 첫 목회의 꿈도 앗아갔다. 징용대상자에 포함된 선생은 서울로 돌아와 나흥에 있는 철광회사에 징용 형식으로 취직을 하고 만다.
일본의 패망은 이미 예고된 것,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은 조선에도 해방의 기쁨을 주셨다. 1945년 8월 15일, 선생은 이른 아침에 어머니와 함께 역전교회에 가는 중에 거리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어머니와 함께 얼싸 안고 민족의 해방을 함께 기뻐했다. 그 날 밤 열차를 타고 선생은 나흥 철산으로 가 일본인들로부터 한국 사원들이 회사를 인수받는 것을 도왔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패망의 기미를 안 일본인들이 현금을 미리 다 빼 돌려 한국 노무자들이 고향으로 돌아 갈 여비마저 없게 되자, 선생은 친구와 자원하여 서울 본사에 가서 30만원의 현금을 찾아오는 일을 하게 된다. 서울에서 현금을 가지고 함흥으로 오는 도중에 마을마다 조직된 자위대의 검문에서 도적으로 몰리기도 하고, 이미 주둔해 있던 소련 군인들에게 붙잡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선생은 어머니와 동생의 도움으로 무사히 돈몽치를 들고 나흥 철산까지 가서 노동자들에 나누어줄 수가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약 1년을 더 그 곳에서 일을 하다가 1946년 9월 일본에서의 신학수련이 인정되어 이화여자대학교 조교수로 초빙을 받아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선생은 60년대 후반까지는 진보적인 신신학자로 불리웠다. 미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니버, 본회퍼, 하비 콕스, 로빈슨 등의 세속화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 때까지 그가 한국 신학계에 소개하는 서적은 앨렌 리쳐드슨의 <과학 역사 신앙>(1958), 시드니 케이브의 <신약성서와 윤리문제>(1959), 폴 틸리히의 <존재에의 용기>(1960), 바바라 워드의 <세계를 움직이는 이념>,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등이다. 이러한 번역서들은 당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유행을 탔던 최신신학들이었다. 이런 신신학들을 그는 열성적으로 번역 소개하여 한국 신학계의 흐름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이처럼 평범한 서구신학의 대변자로 살아가던 선생을 그 곳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 역사의 현장, 고난받는 민중의 삶의 자리로 옮겨가게 한 것은 무엇인가? 서구의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의 뒤를 쫓아가던 평범한 신학자에서 한국 문화와 그 문화 속에서 울고 웃던 민중의 삶을 신학화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름도 빛도 없이 온갖 수모와 수탈과 고난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들, 그 민중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 민중 속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시다. 그 분이 선생을 신학이라는 틀에 머무르지 말고 민중의 거리로 가게 하신 것이다.
1960년대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근대화, 경제발전, 공업화를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농촌의 일손들을 공업노동자로 전환하기 위해서 저곡가정책을 써서 공업지대와 도시로 밀려나가게 만들었다. 겨우 먹고살기도 어려운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업재해, 판자촌, 철거, 어린 소녀의 몸팔이 등등 시골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이들이 있었으니 대학생들과 기독교 내의 도시산업선교회이다. 선생은 1970년대 초반에 젊은 전도사와 목사들을 주축으로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학자로서 참여하였다. 이 때까지는 신학적으로 민중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는 어느 날, 예전처럼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 7, 8가 양편에 언제 철거당할지 모르는 판자촌에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길에 선생은 창녀들의 싸움을 목격했다.
어느 날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 청계천 뚝을 따라 회의장소로 가는 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싸움구경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열 너덧 살 먹은 여자아이 둘이서 싸우고 있었다. 옷은 다 찢어져서 거진 벌거벗다시피 되어 있었다. 서로 머리채를 휘어잡고 밀고 당기면서 생전 들어본 일도 없는 흉악한 욕설을 계속 퍼붓고 있었다. 싸움의 원인을 쉬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창녀였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단골손님을 자기 방에 모셔다가 접대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당시 한번 접대에 500원이었다. 그 중에서 얼마를 남에게 뜯기고 얼마가 그 아이들 손에 들어가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나 더럽고 치사하고 잔인하고 저주스런 장면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창자가 꼬이면서 통증과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날 회의에서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청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민중·고난의 종·희망" [예수의 탈춤] 97쪽)
이 창녀들의 싸움을 목격한 뒤에도 이 광경이 선생의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따라다녔다. 왜 저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몸을 팔아 살아야 하나, 이것은 저 여자 아이 하나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조선조 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반상제도 하에서 상민이나 천민으로 살았던 사람들, 일본군국주의의 지배 하에서 수탈 당하고 징용이나 정신대로 끌려가서 죽어간 사람들, 6.25를 지나 근대화 정책으로 고향을 떠나 이곳 꼬방동네까지 들어와 몸을 팔아 살아가는 저 여자아이들이 하나의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엮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은 조선시대, 일제시대, 독립과 근대화의 시대를 꿰뚫어서 있어왔던 사회체제와 정책이 이 아이들로 하여금 창녀가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 전체가 이 아이들과 그 조상들을 발판으로 짓밟으면서 이어져온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 창녀 아이들 모습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아이들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물려받으면서 축적된 아픔과 한을 그들의 가냘픈 몸에 지니고 아파하는 것이 아닐까? 이 민족의 죄를 자기의 죄이기나 한 것처럼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말이다. 이 창녀들과 또 그들과 같은 사회역사적 전통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 즉 한국의 민중들이 바로 억울하게도 한국 역사의 죄를 짊어진 고난의 종이 아닐까. 나의 상상력이 여기에 미쳤을 때 싸우던 창녀 아이들 모습 위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유령 같은 모습이 투명한 필름의 그림자처럼 겹쳐지는 느낌을 가졌다.(같은 글, 98쪽)
어린 나이에 몸을 파는 창녀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통해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받는 예수의 모습을 본 선생의 신학은 이전의 신학과 백팔십도 바뀌게 된 것이다. 곧 꼬방동네에서 창녀들의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고 선생의 신학적 회심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에 선생의 신학은 하비 콕스나, 니버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철저하게 그 때 그 창녀와 같이 무시당하고 버림받고 가난 속에 한 맺혀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한 신학을 실천하기에 이른다.
선생은 꼬방동네에서 일어났던 창녀들의 싸움을 목격하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에게서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게 된다. 그들은 더럽고 치사하고 부도덕하지만, 배운 자들처럼 고독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한다. 그들의 오장육부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맺힌 한이 그들에게 강인함과 끈질김을 준 것이다. 선생은 이러한 삶에 대한 강인함은 권력이나 돈이나 지위나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보다는 도리어 그런 것을 빼앗긴 사람들에게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매일 싸우고 훔치고 때리고 서로 속이며 사는 그들에게서 놀랍게도 끈끈한 의리심, 공동운명체 의식 같은 새로운 힘을 느끼게 된다.
우리 교육받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가 뭐냐, 불안하다, 죄책이라는 게 뭐냐, 불안하다, 절망' 뭐 이러는데 그 사람들에겐 그런 게 없는 것 같다는 겁니다. 악착같이 살아 남으려고 하는 강인한 인간성, 그런 게 있는 것을 느꼈고, 또 하나는 겉으로는 몸을 팔아먹고 살지언정 자기네들 끼리의 의리심, 남들이 보는 데서 붙잡고 옷을 찢고 싸우는 한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의리심, 공동 운명체 의식, 이러한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엿보이데요.(퇴임기념강연)
선생은 꼬방동네에 사는 민중들에게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본 것이다. 우리 역사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저들에게서 점잖은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서로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공동체적인 삶의 끈끈한 정을 보았다. 이들은 예수가 말한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질그릇에 담긴 보화'인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삶의 공동체, 삶의 강인한 힘, 삶의 진실, 삶의 아름다움을 사회의 상층에서가 아니라 꼬방동네와 같은 밑바닥에서 보게된 것이 대단한 충격이었노라고 고백하면서, 이것은 자신에게 놀라움과 동시에 즐거움이었다고 말한다(앞의 책, 100쪽).
그러나 그 꼬방동네의 밑바닥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강인함과 의리, 그리고 아름다움은 매일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과 싸우고, 수탈과 억압을 받아오면서 오장육부 깊숙이 맺힌 한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현영학의 신학은 머리로 추상적인 이론이나 이념으로 하는 신학이 아니라, 그 자신의 창자 속을 뚫고 들어오는 신학적 충격으로 얻어낸 '오장육부로 하는 신학'이다.
오장육부의 신학, 이 얼마나 뜨끈 뜨끈한 신학인가. 이 얼마나 가슴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신학인가. 현영학의 신학은 탁자에 앉아서 하는 관념적인 이론신학이 아니라 민중의 가슴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생명의 신학, 곧 오장육부의 신학이다. 오늘날 민중신학이 선생의 오장육부의 신학처럼 다시 민중의 삶 속에서 출발할 수 있다면, 민중의 맺힌 한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오늘날처럼 폐쇄적이고 경직된 민중신학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꼬방동네에서 바라본 고난받는 민중은 선생에게 무엇인가? 그저 단순하게 강인한 삶의 힘과 의리심을 가진 인간에 불과한가? 아니다. 선생은 고난받는 민중에서 고난받는 민중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으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고난의 종의 모습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성육신하신 '고난의 종'이라고 느끼게 되었다("민중신학과 한의 종교", 119쪽).
선생은 가장 밑바닥 민중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출발점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삶의 가장 극한적인 상황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말한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의 것이다" 라는 예수의 말씀이 가난한 민중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바로 선생은 가난한 민중에게서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종말론적 특권"을 보았다. 이렇게 선생은 꼬방동네의 그 민중들에게서 참된 하나님의 희망과 그 나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민중신학을 주제로 쓴 논문은 "민중 속에 성육신해야"(1973년), "신의 역사 창조 행위"(1975년), "예수의 삶의 스타일"(1979년), "한국 가면극 해석의 한 시도"(1979), "민중·고난의 종·희망"(1983년) 등이다.
이제 민중신학자로 길을 들어선 선생은 안병무, 서남동 교수와 달리 한국민중문화에 관심하면서 그 속에서 한국 민중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민중의 삶 속에서 면면이 이어져 온 탈놀이이다.
이 탈놀이는 제도권에서는 터부시되고 소위 고급문화라 할 수 있는 서양문화에 밀려 민중들 사이에서만 이어져 내려왔고, 1960년 후반부터는 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을 뿐이다. 그들은 언론자유가 봉쇄되어 자유롭게 말할 수 없게 되자 탈놀이를 하면서 옛 민중의 말을 빌어 자기들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선생은 꼬방동네 사람들이 오장육부까지 맺힌 한을, 그 속에 묻혀있지 않고 강인한 생명력과 공동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탈놀이에서 보았다.
가면극을 공부하면서 제가 본 것은 우리들의 점잖은 양반 조상들이 아니라 상놈 조상들의 현실 비판, 해학을 곁들인 현실 비판, 그리고 그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 그런 것들 속에서 우리들의 삶의 진실과 멋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그런 것들을 뜻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느껴질 정도로 삶의 진리의 본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한 삶의 진실과 멋이 여유 있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의 극한적인 상황에 도리어 역설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퇴임기념강연)
가면극은 민중들이 그들의 억눌린 세계를 풍자와 익살로 풀어내려고 하는 해학이 들어있다. 이런 민중놀이를 통하여 선생은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까지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사람의 진실과 멋, 그리고 여유가 있다. 그렇게 민중은 한에 매몰되지 않고 그 스스로 그 한을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 민중들은 단순한 혁명가가 아니라 광대이다. 그들은 계속 실패하고 두들겨 맞는 과정에서 아무리 가혹하고 억울한 현실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를 길렀다. 마치 말뚝이처럼 웃음과 해학으로 광대행세를 함으로써, 굴복을 가장함으로써 승자가 되는 지혜 같은 것이다. 선생은 그 좋은 예로 봉산탈놀이를 들고 있다(같은 글, 103쪽).
노장과장에서 놀이꾼들은 노장을 풍자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생산을 해야 하는 민중들 눈에는 늙고 관념적이고 비생산적인 '고등종교'는 웃기는 것이다. 양반과장에서는 가문과 지식을 자랑하면서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종 말뚝이한테 속기만 하는 병신같은 양반들을 비꼰다. 자기들을 다스리고 부리고 업신여기는 정신세계의 지도층과 현실세계의 지배층을 풍자하고 나서 미얄할미과장에서는 자기 자신들의 병신 같은 처지를 눈물과 웃음과 재담으로 비꼰다. 말할 수 없는 고생 끝에 몇 십 년 만에 영감을 만난 미얄할미는 나머지 생을 즐길 새도 없이 영감에게 젊은 첩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싸우다 넘어져 죽는다. 무당이 와서 진오귀굿을 해주는 것으로 끝난다. 제기랄, 지지리 고생하다 죽으면 굿이나 먹고 떨어지라는 말인가. 병신 같이, 세상 참 웃기는군, 눈물과 웃음의 과장이다. 그리고 다들 함께 춤추고 돌아간다. 그러한 억울한 삶을 울고 웃으며 경축한다.(같은 글, 104쪽)
이처럼 탈놀이 하는 민중들은 지배층과 지도층을 풍자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처지와 자기들의 종교마저도 풍자한다. 이 풍자는 그 대상에 대한 비판이고 거기에 담긴 웃음은 웃는 사람의 여유와 초월, 그리고 동시에 용서를 의미한다. 이로써 민중은 지배자만 아니라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믿는 종교마저도 비판하고 넘어서고(초월) 새롭게 받아들인다.(같은 글 104쪽) 선생은 탈놀이에서 민중의 종말론적 경험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의 탈놀이는 오늘의 한을 풀면서 미래의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탈놀이를 하는 민중에게 눈물 흘리는 예수를 보며 동시에 신나게 큰 소리로 웃는 예수를 보고 있는 현영학의 탈춤의 신학은 단순히 전통문화 놀이를 신학화한 것이 아니다. 그는 탈놀이에서 바로 오늘 민중들의 오장육부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한을 재치와 해학으로 풀어내는 여유와 멋을 보고, 거기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거룩한 초월'을 경험하고 있다. 현영학의 탈춤의 신학은 민중 스스로가 역사의 질고와 민중의 고난을 풀어 헤치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신학 그 자체인 것이다. 민중은 이렇게 탈놀이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신학을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선구자들 중에 한의 신학자로 대변되는 서남동은 조직신학자로서 나름대로 독특한 민중신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민중신학의 이론화에 공헌을 했다면, 안병무는 성서신학자로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에게서 드러나는 민중성과 민중에게서 발견되는 메시아성을 밝혀줌으로써 민중신학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러나 현영학의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이 그 역사를 거듭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삶으로부터 솟아나는 그 생명성이 퇴색하고, 서구신학적인 방식으로 변질되어 가는 오늘의 민중신학에 흥과 해학을 불어넣음으로써 민중신학의 본래의 길로 가도록 인도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민중은 말이나 이론, 그리고 이념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일상의 놀이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아무리 고달프고 힘겨워도 이 땅의 민중들은 놀이를 통해 삶의 여유와 해탈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살아왔다. 현영학 선생은 바로 민중신학을 이론으로 하지 않고 놀이로, 흥과 해학이 있는 문화로 민중신학을 새롭게 접근시켜 나아갔다. 선생의 이러한 민중신학적 업적은 후학들에게 더욱 발전되어 민중신학이 서구신학과도 차별되면서 한국 고유의 신학으로 자리매김을 수 있도록 신학에 신명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의 신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신학이다. 자신의 신학이 오늘 폐쇄적이고 경직된 모습으로 어디로 갈지 모르는 한국의 민중신학에게 등불이 되는 탈춤 신학. 그것은 바로 서구신학을 답습하는 민중신학이 아니라, 한을 흥으로 풀어 가는 이 땅의 민중들의 해학과 멋과 여유가 살아있는 놀이 신학, 민중생활 탈춤신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