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합의 믿음 수2:1~14절 2023.12.17. 주일오전
* 말씀으로 확인하는 것
예수님 시대에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만약 믿음이라는 문제를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옆에서 수종을 드는 것만으로 얘기한다면 제자들은 모두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직업까지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는데 그만한 믿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잘 알았다면 몰라도 알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따르라'고 하는 한마디에 자기의 일을 다 버리고 좇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도, 적어도 우리는 대단한 믿음이라고 여기는 그 믿음도 결국 자기 죽음이라는 엄청난 권세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나디고 설교를 들었던 그 모든 세월들이 '자기 죽음'을 극복할 힘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당시 제자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구원과도 상관없는 믿음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는 우리들의 행위들이 과연 죽음을 이길만한 힘이 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을 앞에서도 당당하게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있는가?‘입니다.
믿음이라는 문제는 인간 쪽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믿는다고 해서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의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에 대한 확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믿음이 과연 내 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아닌 것으로 발각되는 것은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빈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이 믿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생각하면 뭔가 부족한 것은 있을지라도 '나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내 행동에 있어서는 부족한 것이 있지만, 내 마음은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에 자기가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믿음을 확인하라고 성경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자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믿음에는 이러한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본받아서 이 사람처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 같은 삶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창22:12.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을 우리에게 남겨주심으로서 믿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지 병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신10:12절에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랑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 사랑이 부정되어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자기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가 있으면 필히 다른 한쪽은 물러나야 합니다.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적이고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사랑이 부정되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먼저 자기 사랑에 대한 부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이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 취함과 버림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는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라합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정탐꾼을 숨겨준 것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사건 이전에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낸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보내서 여리고 성을 살피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정탐꾼을 보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이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땅인데 정탐꾼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뭔가 불안했기 때문에 미리 점령할 땅을 살펴보고자 했던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불신앙에 대한 책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부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것은 곧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서 기생 라합을 만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을 통해서 믿음을 보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국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이 입장에서 라합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라합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의 실체는 버림과 얻음입니다. 버림과 얻음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정탐꾼이란 곧 간첩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탐한다는 것은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여리고에 있어서는 위험천만한 인물들입니다.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탐꾼을 숨겨준다면 그것은 단지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차원을 지나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것보다는 간첩을 숨겨주는 것을 더 중한 죄로 여깁니다. 간첩과 똑같은 자로 여겨버립니다.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줬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건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정탐꾼에게서 자기 목숨을 내걸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을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9~12절이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에게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냥 신이 아니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에게 무너진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가 몇 명인지, 힘이 얼마나 센지 이런 것을 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 줬다는 것, 이것만으로 여리고 성은 무너진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탐꾼을 선대하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라합에게 다급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정탐꾼이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곧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시고 아모리 사람을 전멸하게 하신 일을 알고 있는 라합으로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스라엘이 곧 쳐들어 온다는 증거인 정탐꾼을 볼 때 다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급함 속에서 라합이 취한 행동은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는 반역입니다. 이스라엘을 취하고 여리고를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자
정탐군이 들어왔음을 아는 자가 라합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정탐꾼이 들어온 것을 목격을 했고,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여리고 왕에게 고했습니다. 2절.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똑같이 정탐꾼을 목격한 입장인데 왜 한쪽은 그들을 보호하고 한쪽은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쉽게 생각하면 내 나라를 해치는 정탐꾼을 잡아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국가를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라합이 국가를 배신하고 이스라엘 편에 선 이유입니다. 그것은 라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면 가나안의 멸망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신들의 운명이 약속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탐꾼을 죽이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탐군을 죽이고자 한 것은 자기 세계를 보존하고자 한 것이고, 영접한 것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라합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한 것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말고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미련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이 사는 분입니다. 얼마든지 라합의 자리에서 정탐꾼을 영접할 수 있는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정탐꾼을 보내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정탐꾼을 새로운 세계를 몰고 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말할 때 그가 바로 우리들의 믿음을 확인하는 정탐꾼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의 확고함에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성도라면 정탐꾼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보다는 자기 세계를 붙들고 자기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필시 정탐꾼을 밀쳐 낼 것입니다. 라합이 자신의 나라인 여리고를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를 볼 수 있었고 그 나라에 자기 인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라는 여리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기에 여리고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질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우리의 가슴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자리하고 있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세계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