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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연구) 방법론*
―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의 상관성의 관점에서
신 응 철**전남대학교 철학연구교육센터 학술연구교수.
요 약 문
이 글은 인문학 분야의 다양한 문화분석 및 문화연구의 방법론들 가운데, 특별히 철학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나아가 이러한 문화분석 방법론의 현실적 의의를 밝혀내는데 목적이 있다.
필자가 여기에서 두 입장을 상호 분석하여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언뜻보면, 두 입장은 만날 수 없고 융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논의 영역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렇지만 문화분석에 대한 두 진영의 논의에서, 그러니까 사회과학과 인문과학간의, 혹은 사회철학과 문화철학간의, 아니면 문화비평과 문화철학간의 논의에서 사실은 상대방의 논의를 인정하고, 또한 동시에 그것을 자신들의 논의의 전제로 삼을 때에만, 각 진영은 자신들의 고유한 입장을 보다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의 방법론을 상호 비교 고찰하여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 그것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 주요어 : 프랑크푸르트학파, 신칸트학파, 문화, 문화철학, 문화비판.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인문학 분야의 다양한 문화분석 및 문화연구의 방법론들 가운데, 특별히 철학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나아가 이러한 문화분석 방법론의 현실적 의의를 밝혀보는 데 목적이 있다.
문화분석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사회과학 진영의 인류학에서 활발하게 논의하였고, 그 방식은 개별문화의 사례 중심의 상대적이고 구체적인 논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인문학 진영의 철학에서의 문화분석은 사실상 인류학 분야의 그것과 비교해 본다면 상당히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해야할 것이다.
서양철학사 특히 독일철학에서는 칸트(I. Kant 1724-1804)와 헤르더(J.G. Herder 1744-1803)에게서 문화에 대한 논의의 단초를 찾을 수 있고, 기껏해야 1920년을 전후로 신칸트학파의 카시러(E. Cassirer 1874-1945)에게서 문화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가 확립되었다. 이어서 1930년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의 문화비판이 행해진 것을 보면, ‘문화’라는 주제가 적어도 독일 철학의 담론의 장에 들어 선 것은 결코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국철학계의 경우 문화에 대한 논의가 1995년을 전후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2000년을 기점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철학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분석의 틀이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의 분석 및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철학(비판이론) 및 사회과학의 방법론에 근거한다면, 신칸트학파의 그것은 문화발생의 근원과 진행, 그리고 그것을 통한 인간이해라는 측면에서 철저히 독일 합리주의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문화철학 및 해석학의 방법론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두 입장을 상호 분석하여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언뜻보면, 두 입장은 만날 수 없고 융합될 수 없는 이질적인 논의 영역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문화분석에 대한 두 진영의 논의에서, 그러니까 사회과학과 인문과학간의, 혹은 사회철학과 문화철학간의, 아니면 문화비평과 문화철학간의 논의에서 사실은 상대방의 논의를 인정하고, 또한 동시에 그것을 자신들의 논의의 전제로 삼을 때에만, 각 진영은 자신들의 고유한 입장을 보다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이 글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의 방법론을 상호 비교 고찰하여 그것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혀내고, 또한 현재적 의의를 되새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우선, 2절에서는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논의를 통해서 확인하도록 한다. 그리고 3절에서는 본격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분석의 방법론과 그 특징을 다루도록 한다. 3절에서는 무엇보다도 테크놀로지와 문화의 관계, 특히 현실인식의 매개로서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문화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1895-1973)와 아도르노(T.W. Adorno 1903- 1969), 마르쿠제(H. Marcuse 1898-1979)의 논의를 근거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자본과 문화의 관계, 여기에서는 대중화된 문화, 산업화된 문화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벤야민(W. Benjamin 1892-1940)의 입장에 근거하여 다룰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프랑크푸르트학파 진영 내에서도 문화분석의 입장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4절에서는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의 방법론과 그 특징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상징을 매개로 한 문화분석, 그리고 문화분석을 통한 인간이해에로의 길에 대해서 카시러의 논의를 중심으로 고찰하도록 한다. 5절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 방법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의 상관성이라는 관점에서 두 진영의 문화분석 방법론의 현재적 의의를 생각해 보고, 나아가 두 진영에 대한 상호 비판 및 제안으로 전체 논의를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2.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다양한 문화분석의 방식들은 따지고 보면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곧 다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경우에 있어서 그 물음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제시는 것은 사실상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참여한 이들의 입장,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문화 개념, 문화비판의 방식이 다소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들이 파악한 문화 개념의 주된 특징을 꼽아 본다면, 그들의 철학함의 방식, 즉 사회 비판이론의 관점에서 문화를 논의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호르크하이머는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인 정신문화와 흔히 문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물질문화 모두를 문화 개념안에 포함시켰으며, 사회철학을 이러한 문화일반에 대한 이론으로 정립하였다. 마르쿠제는 사회 연구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특정한 문화 개념을 따르려는 취지에서, 문화란 사회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정신의 의미를 표현하고, 또한 그것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의 총체적 사회 생활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마르쿠제에게서 문화는 정신적(이념적) 재생산의 영역들(좁은 의미에서의 문화, 정신세계)과 물질적 재생산의 영역들(문명)이 역사적으로 구별 가능하면서도 의미있는 통일체를 형성해 왔다는 점에서, 사회적 삶 전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아도르노는 문화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 한 시대의 사회적 투쟁 속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역할이라는 결정적인 문제를 간과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문화의 내용은 순전히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것, 즉 물질적 생활 과정의 관계 속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은 논의에 의하자면,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는 대체로 문화(Culture)와 문명(Civilization)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문화 개념 속에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모두 포함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모든 인간의 불행과 억압 그리고 지배라는 현실 상황을 비판하고자 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총체로서의 문화(혹은 문명)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비판이론에서의 비판은 곧 문화비판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비판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문화비판의 방향은 사회적 총체로서의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모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에, 한편으로는 정신세계의 영역인 예술에서의 ‘부정성’(negation)을 확보하려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문화 개념이나 마르크스의 문화 개념보다는 오히려 프로이트(S. Freud)의 ‘문명’ 개념에 더 접근함으로써, 욕구의 억압 과정으로서의 문명에 대한 비판에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신칸트학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문화 개념을 파악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신칸트학파의 대표적인 문화철학자 카시러의 문화 개념은 칸트와 헤르더에게서 연유하고 있다. 헤르더는 문화를 인간의 정신의 산물로 파악했다. 때문에 헤르더에게서 문화란, 정신의 도야, 정신의 형성을 뜻하며, 인류의 개화, 계몽, 그리고 인간화, 문명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헤르더에게서 비로소 객관적인 문화, 즉 인간의 정신의 산물로 나타난 문화(언어, 역사, 풍습, 종교) 개념이 형성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고전적인 인문주의적 문화 개념, 즉 파이데이아(Paideia)가 근대의 객관적인 문화 개념으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칸트의 경우, 사람은 문화를 통해서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믿었고, 자연 속에 주어진 소질과 가능성을 완벽하게 개발, 발전시키는 것이 문화, 그러니까 인간 교육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칸트는 문화를 자연의 체계 속에서, 즉 자연 속에 내재된 유기적 힘에 의존해서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칸트는 인간 존재의 고유한 의미와 인간 문화는 자연 질서 속에서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을 떠나, 자연을 노동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인간의 내적 문화(말하자면, 지성, 판단력 등 자연적 소질의 개발)와 외적 문화(인간 활동의 산물로서의 문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렇듯 칸트는 문화가 자연 속에 내재된 유기적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결과임을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칸트에게서 문화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작품이고, 인간은 이러한 문화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인간의 문화는 한 개인에 그치지 않고, 세대에서 세대로 인류 공동체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 축적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칸트에게서 문화란 “자연의 보호상태에서 자유 상태로의 이행”이다.
이런 관점에서 칸트는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을 자유 상태로의 진보의 과정, 즉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타락의 사건이 없었다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인간의 문화”는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자연의 역사는 신(神)의 작품이기에 선(善)으로부터 시작하고, 자유의 역사는 인간의 작품이기에 악(惡)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되풀이하자면, 인간의 문화는 엔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타락 사건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인간의 타락은 결국 (역설적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인간 문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1784)에서 문화의 기원에서 나타나는 선?악의 문제를 인간이 지닌 ‘반사회적 사회성’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반사회적 사회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사회를 파괴하고 자신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와 같은 성향으로 인해 타인과의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위험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오히려 타인과 함께 사회를 이루어 살고자하는 성향이 있는데, 이를 반사회적 사회성이라고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타인과의 끊임없는 경쟁심과 투쟁심, 자신의 명예욕과 지배욕, 소유욕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욕망이 인간에게 없었다면, 문화의 발전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한편 칸트는 인간의 문화가 반사회성, 그러니까 문화발전의 원동력인 인간의 경쟁심, 투쟁심, 소유욕, 명예욕, 지배욕에 의존하게 될 경우, 인간의 문화의 미래는 학문과 예술, 법질서와 도덕체계를 갖춘 ‘문명화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문화를 논의하면서 칸트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중요하게 다루는 측면은, 그가 인간 문화의 최종 종착점은 ‘문명화’를 향하기보다는 오히려 ‘도덕화’(moralisierung)를 겨냥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 때문이다. 칸트는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교육론??(1803)을 통해 인간 심성의 도덕적 훈련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칸트의 문화 개념을 정리하자면, 첫째 문화는 인간(만의) 활동의 산물, 즉 정치, 경제, 법률, 예술, 종교 등 이 모두를 일컫는 것이며, 둘째 문화는 ‘과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 문화의 발전은 인간의 자기보존의 욕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신칸트학파의 카시러의 경우도, 문화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에서는 칸트와 동일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다만, 칸트가 인간 문화의 미래상과 연관하여, 인간 심성의 도덕적 훈련을 강조하였다면, 카시러는 상징(Symbol) 개념을 통해서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특히 자신의 문화철학이 학술적 차원으로만 머무르는 것(관념론)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 적용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천적 차원(비판적 관념론)임을 강조하고, 특히 자신의 문화철학은 세계와 관계되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책임'의 문제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서 문화를 파악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입장 차이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문화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태도의 상이한 방식들, 말하자면 그것이 사회비판이론의 입장에서든 아니면 독일 전통철학의 입장에서 나타나든 간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문화분석의 직접적인 단계에서도 두 진영의 분명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분석 방법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3.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분석 방법론 및 그 특징
국내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비판에 대해 체계적이면서도 가장 명료하게 설명했던 문현병에 따르면, 그들의 문화분석 방법론을 핵심적으로 파악하는 열쇠는 1930년대 이후의 서구의 현실 상황을 그들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그에 따른 실천방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데 달려있다. 그들의 문화비판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혁명의 가능성 여부,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를 대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입장은 양분된다고 할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혁명에 대하여 좌절감을 느꼈고,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에 대해서 비관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인간의 불행을 막기 위해 현대의 테크놀로지가 문화에 미치는 악영향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에 반해 벤야민은 전투적이었고, 낙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 테크놀로지와 문화의 관계:
현실인식의 매개로서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문화에 대한 분석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계몽의 변증법??(1947)에서 이성에 의한 계몽,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자연 지배가 전체주의에로 역전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자유?평등?정의는 계몽주의의 신조였으며, 인류의 위대한 이념이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문명의 발달은 이들 이념의 기반을 파괴하고, 그 보편적 실현을 저지했다. 한때 주체적이고 자주적이었던 이성이 인간의 자기보존이라는 ‘이기적 관심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계몽적 이성은 경제적?사회적 힘에 반사적으로 순응할 따름이다. 이렇게 해서 전체주의의 기반이 마련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이 계몽의 변증법이고, 근대의 계몽적 이성이 빠져버린 운명이라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진단한다. 자본주의의 생성은 계몽적 이성을 통해서 형성되고, 이 계몽적 이성이 ‘합리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결국 합리화가 자본주의 체제의 관리제도 속에 인간을 예속시켜 버리게 된 것이다. 이성이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발달시켰으나 이러한 진보가 인간의 삶의 실제적 진보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자본주의 경제의 고도 생산성 앞에 희생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부정의 변증법??(1966)에서 이성의 부정적인 본질을 강조한다. 또한 ‘도구’로 전락한 이성이 가져온 전체주의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반대하고 있다. 사회철학의 기본명제는 계몽적 이성이 현실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를 비판하는 부정의 변증법이 필요하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현실비판, 현실부정, 현실저항은 결국 자유에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아도르노는 진보이론이라 부른다. 진보이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역사는 자연의 지배에서 인간이 해방되는 과정으로서 진보이론이 곧 해방이론이 된다. 모든 진보이론은 내적 필연성에 따라서 퇴행을 포함한다. 진보에 내재하고 있는 부정성은 ‘지배의 필연성’이 된다. 지배의 필연성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모든 진보의 근간이 되어 왔다. 왜냐하면 자연의존에서 극복한다 함은 조직화한 지배의 형태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연을 정복, 제압하지 않으면 자연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가? 궁극적으로 인간이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이다.
아도르노는 현대의 진보이론을 설명하면서, 근대적 문명은 인간의 예속, 억압, 소외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주체의 객체화 현상, 즉 전면지배의 형태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강제 수용소, 파시즘, 제국주의, 반유태주의 등에서 잘 볼 수 있다. 과학 기술은 굶주림과 전쟁, 억압 없는 세계의 건설을 위해 전진했지만 이성적 인간이 과학, 기술을 발달시키면 시킬수록 인간 자신의 도구화, 수단화, 예속화가 확대되어 가게 된다. 그렇다면 비판이론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궁극적으로 “비판적 이성의 회복”을 강조한다. 비판적 이성은 이성의 획일화, 조직화, 절대화를 부정하며 현존하는 것이 최고?최상이며, 불변하는 진리가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계몽적 이성에는 자기반성이 없었다. 그래서 ‘이성의 도구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비판이론은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에 저항하며, 그 절대화에 대해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근대의 계몽이 자연과 인간에 의한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이러한 계몽은 주관적?도구적?기술적 이성에만 의존함으로써 객관적 이성의 퇴보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근대의 인간은 다시 새로운 형태의 지배와 억압의 상태에 빠졌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사회(One-dimensional Society)에 대해서 말한 바 있는데, 그 대상은 미국을 포함한 선진산업사회가 모델이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일차원적 사회에서의 인간의 의식, 언어, 예술은 모두 일차원적으로 된다. 그렇다면 일차원적이란 무슨 의미인가? 기술공학의 발달이 인간을 ‘전면적으로 통제한’ 상태를 일컫는다. 즉 테크놀로지와 과학발달은 사회의 변동을 저지하고, 다른 사회제도를 만드는 질적인 사회변동까지 저지한다. 사람들은 기술문명(테크놀로지) 문화에 동화되고, 이런 문화를 ‘이성의 구현체’로 생각하여 수용하게 된다. 그래서 테크놀로지의 통제가 곧바로 ‘이성의 통제’가 되어 결국엔 사회 통제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테크놀로지로 합리화된 체제에 반대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며, 그 체제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이단이다. 결국 오늘날은 테크놀로지적 합리성(technological rationality)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승용차, 카스트레오에서 행복감에 젖고 컴퓨터 게임에 열중한다. 근대화의 결과, 개인은 테크놀로지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예속의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고, 개인은 이 상황에 만족하고 그것이 그의 존재양식으로 되어버렸다. 테크놀로지의 풍요 속에서 인간은 동질화되고, 또한 계급간의 대립도 소멸된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마르쿠제에 따르면 바로 이점이 테크놀로지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라고 지적한다.
다른 한편 마르쿠제는 테크놀로지 이전의 이성을 2차원성이라고 규정하고, 테크놀로지적 이성을 1차원성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테크놀로지 이전에는 이성이 존재/비존재, 진리/비진리를 식별할 수 있었으나 테크놀로적 이성에서는 양자간의 분별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이성은 분별 능력이 아니라, 기껏해야 계산?측량하는 능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성의 1차원성은 테크놀로지적 합리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마르쿠제는 테크놀로지적 합리성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문명에서 테크놀로지적 이성은 인간의 삶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 인간의 ‘노예화’ 현상이다. 그러니까 테크놀로지가 지배자가 되고 인간은 노예로 되었다. 생산 장치의 효율성은 인간을 物象化(reification)하였다. 결국 자유는 ‘풍요’와 교환되는 물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렇게 해서 테크놀로지는 ‘인간해방’이라는 그 본래의 목적을 파괴하고 말았다는 것이 마르쿠제의 판단이다.
이제부터는 위에서 언급한 비판이론가들과 달리 기술과 문화의 관계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분석하는 벤야민의 입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이라는 부제를 달아 문화산업을 분석하면서, 산업으로서의 대중문화를 일컬어 대중 기만의 도구로서, 대중에게서 비판적 정신을 빼앗고 우둔함과 어리석음만을 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대중매체와 대중문화가 가지고 있는 대중 조작적 측면과 상업적 성격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벤야민의 경우, 대중문화의 생성을 문화의 몰락으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문화의 등장으로 보면서, 특히 예술작품의 복제 기술과 문자매체에서 시각매체로의 이행, 그리고 그것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였다.
벤야민은 현대 대중문화의 특징을?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68)을 통해서 밝혀내고 있다. 그는 이 논문의 첫 부분에서 1900년경에 이르러 전래된 모든 예술작품들의 복제가 이루어짐으로써 대중에 대한 예술의 영향력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술작품의 복제와 영화가 전통적 형태의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그것을 가능케 한 사회적 조건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였다. 벤야민의 분석에 따르면, 전통적 예술과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우라의 몰락(decay of the aura)에 있다. 그러니까 전통적 예술작품들은 제 각기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는 더 이상의 아우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말하는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일회성(unique existence), 원본성(the presence of the original), 진품성(authenticity)이 작품으로서의 객관적 특성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통적 예술작품은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에서시?공간의 형식으로 일회적 존재로서 나타나고, 이러한 성질이 자신의 진품성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이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특성을 일컫는 말이 아우라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벤야민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예술작품을 우리 스스로 수용하여 경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주관적 경험과정으로서의 지각 가능성’을 아우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우라는 자연의 대상을 바라볼 때 주체가 대상과의 교감 속에서 그 대상이 주는 미묘한 분위기의 경험이라든가, 혹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느낀 시선을 되돌려 줄 수 있는 능력으로의 상호 작용적인 지각형식을 뜻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서의 아우라의 몰락은 새로운 어떤 지각의 신호를 의미하게 된다.
예술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아우라의 몰락 현상에 벤야민이 주목하는 이유는 예술의 새로운 수용과 기능 때문이다. 기계복제 시대 이전의 초기의 예술작품들은 종교적 의식(ritual)을 위하여 나타났다. 진품으로서의 예술작품의 유일 가치는 본래 그것의 사용가치가 있었던 곳, 그러니까 종교적 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기계복제 시대 이전의 예술작품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서, 주술의 도구로서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예술의 종교적 기능은 복제 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점차 그 힘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역으로 복제 기술이 종교적 의식에 의존하였던 예술작품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로부터 예술의 해방이 이루어진 셈이다. 예술작품이 종교에서 해방됨으로써 예술은 종교적 의식 및 숭배적 가치(the cult value)를 상실한 반면, 이제 새롭게 전시적 가치(the exhibition value)를 갖게 되었다. 기계복제 시대에는 전시적 가치에 절대적인 역점을 두게 됨으로써 예술의 기능 또한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사진과 영화가 이에 가장 잘 부합하게 된다고 벤야민은 분석한다.
벤야민은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속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대중성을 인정하면서 그 대중성이 갖는 정치적 힘을 간취했다. 벤야민은 그것을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대중의 반응 변화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가까이 할 수 없음으로써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던 전통적 예술작품과는 달리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가까이 할 수 있다는 특성 때문에 그만큼 정치적 활용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영화를 새로운 예술의 형태임과 동시에 정치적으로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는 사회적 실천의 범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결국 벤야민의 관점에 따르면, 대중문화 밖에서 대중문화를 우려의 눈길로 보기보다는 그것이 갖는 시회적 힘을 인정하고 사회비판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 대중문화의 올바른 이해이고 활용인 셈이다.
2) 자본과 문화의 관계:
대중화된 문화, 산업화된 문화에 대한 분석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가운데?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이라는 글에서 자본과 문화의 관계를 꼼꼼하게 분석하였다. 필자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문화산업에 대한 분석의 다양한 내용들을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 내용은 첫째 문화의 획일성의 문제, 둘째 자본에 예속된 문화의 문제, 셋째 대중문화의 오락성의 문제다.
먼저 문화의 획일성의 문제를 살펴보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대중문화는 장사(business)에 불과한 것임에도, 대중문화의 조종자들과 권력 독점자들은 그것을 산업(industry)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영화나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들은 그러한 논리를 정당화하여 이데올로기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관계자들은 문화산업에 참여하고 있는 수백만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어쨌든 상품의 재생산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서 재생산 과정에서의 규격품(standards)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대중들은 그들의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규격품을 별 저항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와 같은 문화의 획일화 논리 속에 은폐되어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다. 말하자면 문화산업은 권력독점자 혹은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조작으로 말미암아 사회에서의 체계의 통일성은 한층 강화된다. 그러니까 테크놀로지가 사회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테크놀로지의 합리성이 지배의 합리성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합리성은 스스로부터 소외된 사회가 갖게 되는 강압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문화산업에서의 테크놀로지는 규격화와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의 논리(the logic of the work)와 사회 체계의 논리(the logic of the social system)간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와 같은 현상이 테크놀로지의 기능에서 연유한다고 설명한다. 문화의 획일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예컨대 중앙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는 개인들의 의식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통제에 의해 원천봉쇄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대중의 자발성이 조작되거나 말살되는 경향이 일어나게 된다. 문화에서의 대중의 자발성의 저해는 대중기만, 대중조작을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나아가 사회의 중앙 통제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자본에 예속된 문화의 문제를 살펴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독점 세력들은 대중사회로부터 외면 받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춰야하며, 그 과정에서 문화산업은 자본에 예속된다. 말하자면 문화 산업의 작업 과정은 투자된 자본의 승리를 의미한다. 한편 대중들의 여가 시간은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획일적 생산물로 채워지게 된다. 소비자들은 정치선동을 위한 조사 단체의 통계자료에 불과한 존재로 된다. 때문에 문화산업의 무분별한 획일성은 정치 분야에서의 그와 같은 획일성의 증대를 가져온다. 이는 결국 문화 소비자들의 반성능력, 상상력(imagination), 자발성(spontaneity)을 위축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지적한다. 결국 자본에 예속된 문화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오락성의 문제를 살펴보자. 문화산업은 오락(amusement)을 매개로 하여 대중을 조종한다. 후기자본주의에서 오락은 일의 연장이다. 오락을 찾는 사람들은 기계화된 노동 과정을 다시금 감당할 수 있기 위해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오락 상품의 제조나 여가를 즐기는 사람의 행복이 철저히 기계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노동 과정의 심리적 잔상 외에는 어떤 것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모든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 욕구들은 문화산업에 의해 사전 결정된 것들이다. 따라서 소비자는 자신을 영원한 소비자로서, 즉 문화산업의 객체로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화산업은 소비자들의 욕구를 생산, 조종, 통제하고, 마음만 먹으면 오락 자체를 그들로부터 박탈할 수도 있게 된다.
4.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 방법론 및 그 특징
1) 상징과 문화의 관계: 상징을 매개로 한 문화분석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문화분석의 최종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문화분석의 목적은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있기보다는 오히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와 같은 문화를 만들어낸 주체인 인간, 그러니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는데 있다. 그들은 이 물음에 대해서 직접적인 답변을 하기보다는 문화분석이라는 간접적인 경로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칸트학파, 특히 대표적인 문화철학자 카시러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가 문화를 분석할 때 항상 그 중심에는 새로운 인간관이 놓여있다. 카시러는 전통철학에서 정의되었던 인간관, 즉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라는 개념 규정의 수정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성’이라는 관점만으로는, 철학의 영원한 물음인 인간의 자기인식(self-knowledge)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혼란과 위기, 사상의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시러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여 ‘인간은 상징적 동물이다’ 라고 새롭게 규정하였다. 상징적 동물(animal symbolicum)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은 생물학자 윅스퀼(Johanner von Uexkull)의 견해를 카시러가 수용하면서 형성하였다. 윅스퀼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에는 인지계통과 작용계통이 있고, 이 두 계통의 협동과 평형이 없으면 유기체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카시러는 인간도 기본적으로는 이 두 가지 계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한 가지가 추가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징계통이라고 주장한다.
카시러에 따르면, 언어, 예술, 종교, 역사, 과학 등은 이러한 상징계통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사실은 인간의 삶에서 문화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 상징계통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시간, 공간이라는 물리적 영역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새로운 차원, 그러니까 ‘의미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카시러는 상징적 동물로서의 인간관을 토대로 인간의 자기인식의 문제, 나아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현상들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카시러가 말하는 ‘상징’(Symbol)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카시러는 상징을 ‘정신적 의미가 함축된 일체의 감각 현상들’이라고 말한다. 정신적 의미 내용은 상징형식을 통해서 구체적인 감각 기호와 연결된다. 모든 상징들은 상징적 기능을 한다. 상징적 기능은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경험 내용을 조직화하고, 의미화하는 구성적 종합 행위를 뜻한다. 그리고 모든 상징은 인간의 단순한 의사소통의 매개체가 아니라 인식 행위의 산물이고 세계 이해를 향한 인간의 관점을 형성한다고 카시러는 말한다. 또 다른 곳에서 카시러는 상징의 의미를 신호(Sign)와의 차이를 통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카시러는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언어에 들어있는 상징적 차원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동물의 세계에서도 신호(Sign)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호는 물리적 존재 세계의 일부며, 조작되며, 고정되고, 일의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상징(Symbol)은 의미의 세계, 그것도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가변적이고, 기능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카시러에 의하면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신호의 차원만 볼 수 있고, 상징의 차원은 오직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상징성의 원리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은 시?공간을 초월한 의미의 세계, 그리고 문화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의 언어가 개념 세계에 대한 이해의 문을 열어준 열쇠이듯, 상징은 인간의 문화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2) 신화와 정치, 그리고 문화: 카시러의 문화비판의 전략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카시러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결과물들, 신화, 종교, 언어, 예술, 과학, 역사 등 이 모두를 문화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문화 현상들은 하나의 뿌리, 즉 상징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인간의 삶에서 상징, 상징적 기능을 그의 ??상징형식의 철학??을 통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이 그의 문화철학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의 문화철학의 내용을 다시금 확인하지 않고, 단지 그의 문화분석의 실천적 차원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문화 속에 내재해 있는 신화적 요소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다루도록 한다. 그리고 신화와 정치의 관계를 문화분석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카시러의 문화비판의 전략을 이해해 보도록 한다.
카시러의 설명에 의하면, 인류 문화의 초기 단계의 형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화적 사고와 신화적 경험에 근거한 신화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현대의 문화는 이성적, 과학적, 논리적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의해 이해되고 있다. 카시러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인간의 자기인식의 위기(내적 위기)와 문화적 위기(외적 위기) 상태를 신화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신화를 한편에서는 인간 문화의 긍정적 요소로서, 즉 현대의 우리 자신이 시급히 회복해야할 요소로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대 문화 위기의 근본 요소로서, 그러니까 현대 문화에서 반드시 제거해야할 요소로 다루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신화의 순기능과 역기능이라 부를 수 있다.
먼저 신화의 순기능과 관련하여 카시러는 원시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에 들어있는 상모적(physiognomic) 지각방식을 대단히 강조하고 이를 높게 평가한다. 상모적 지각방식이란 카시러 문화철학에 등장하는 핵심 용어로서, 나 자신이 얼굴을 지니고 있듯이, 타인도 얼굴을 하고 있고, 자연 대상물들도 모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는 지각방식이다. 내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내가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며, 이는 곧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다. 내가 생명을 지닌 존재이듯, 타인도 생명을 가지고 있고, 동물, 식물, 바위, 나무, 등등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도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말하자면, 나 자신이 타인을 대하건, 동식물을 대하건, 자연대상물들을 대하건 간에, 내가 대하는 모든 대상들을 생명을 지닌 존재자로서 인식하고 지각하는 태도가 바로 상모적 지각방식이다. 여기에서는 생명 의식, 생명의 연대성, 공감적 사고 등의 신화적 경험이 강조된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상모적 지각방식에 낯설고 서툴지만, 인류 문화의 초기 단계에 살았던 원시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상모적 지각방식에 익숙해 있었다는 것이 카시러의 주장이다.
다음으로 신화의 역기능과 관련하여, 신화는 세상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 아니라, 실제 생활 형식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특히 위기 상황, 그리고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카시러는 말한다. 신화는 공동체에 형식을 제공하며, 엄청난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신화가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래서 신화는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집단과의 일체감을 심어준다. 카시러는 이것을 신화의 정치철학으로의 침투라고 말한다. 카시러는 서구의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두려웠던 양상은 바로 신화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세력의 출현이라고 말하면서, 20세기의 대표적인 정치적 신화로서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웅숭배론’, 고비노(Joseph-Arthur Gobineau 1816-1882)의 ‘인종불평등론’,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의 ‘숙명론’을 꼽고, 이들의 사상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는지를 규명하였다. 카시러는??국가의 신화??를 통해서 유럽의 파시즘, 특히 나치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의 허구를 낱낱이 들추어내고, 20세기의 정치적 신화들은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집단을 효과적으로 묶어서 함께 단단하게 결속시키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고안된 것임을 밝혀내었다.
결국 카시러는 신화의 이중적 특성을 통해서 문화현상을 분석하였으며, 특히 신화가 정치와 결탁함으로써 일어나는 지배형태의 허구를 밝혀 냈다고 할 수 있다. 카시러의 문화분석은 단순히 개인의 문화향유, 문화이해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문화비판과 사회비판의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카시러는 자신의 문화철학이 학술적 개념으로서의 Schulbegriff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된 실천적 개념으로서의 Weltbegriff라고 말하고 있다.
5.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에 있어서
공통점과 차이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의 공통점을 이끌어내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오늘날의 문화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의존하고 있고, 대중은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준 물질적 풍요감에 안주하며, 문화의 대중화, 통속화와 더불어 개인은 자율성을 상실해 간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대중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예속은 그들의 문화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문화비판의 의도이자 목표이다.
이에 반해 신칸트학파 (카시러)의 문화분석은 인간의 폭넓은 자기이해를 위한 간접적 경로였다. 상징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 규정을 내리고, 인간의 다양한 문화 현상들도 상징형식들로서 파악되었다. 문화의 상징적 요소에 대한 카시러의 강조는 상징적 동물로서의 인간관에서 비롯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카시러는 전통적인 이성 개념에 집착하기보다는 상징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문화 현상들을 이성 이외의 관점, 그러니까 감정, 정서, 느낌, 상상력 등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카시러는 이러한 문화 분석 방식의 모델로 신화적 세계관, 상모적 지각방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본다면, 문화분석에 있어서 두 진영간에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만 존재하는 듯 하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어져 있는 문화 현상의 외적 요인에 대해 사회비판이론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고, 신칸트학파는 문화 발생의 기원에서 볼 때, 인간의 타락 사건이 문화 발생의 기원이라는 문화 내적 요인에 대한 반성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보게 된다면, 프랑크푸르트학파나 신칸트학파 모두 문화를 인간의 자유의 실현 과정, 그러니까 진보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 문화에 대한 진보적 관점은, 문화의 주체가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이며, 나아가 인간의 능력, 특히 그토록 그들 모두 비판했었던 이성(혹은 이성의 능력)을 그래도 그들 스스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문화의 진보에 있어서 그 실질적 내용을 어떻게 담보할 것이냐이다. 이를 위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는 도구적, 기술적, 주관적으로 전락했던 이성의 기능 회복을 강조하고 있고, 신칸트학파는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인간의 반사회적 사회성에서 특히 끊임없는 도덕적 심성 훈련을 통한 사회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비판 속에 들어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측면을 우리는 신칸트학파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 문화 발생의 중요한 한 요소인 정치 영역에 침투되어 있는 신화적 요소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카시러의 입장을 살펴볼 때, 이 두 진영의 문화분석, 문화비판의 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6. 나오는 말: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의 상관성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의 방식들을 고찰하였다. 이제 필자는 양측의 논의가 좀 더 생산적으로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잠시 언급해 보고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시대 하버마스와 가다머의 논쟁을 기억하면서, 양측의 팽팽한 입장 차이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쾨르(P. Ricoeur 1913- )는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의 연관성을 찾아내어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시하였다. 첫째, (가다머의) 해석학적 철학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요구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설명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둘째, (하버마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결국 이데올로기 비판은 해석학적 전제조건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가?
필자는 리쾨르가 제기했던 이러한 물음을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 방법론에 그대로 적용해 보려고 한다. 첫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분석, 문화비판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둘째 신칸트학파의 문화분석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비판의 요구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필자가 볼 때, 신칸트학파의 문화 분석에는 문화의 발생(기원) 문제, 그 속에서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선?악의 문제, 자유의 실현 과정으로서의 문화의 발전, 문화에서의 문명화와 도덕화의 방향이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다. 이에 반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화분석에는 테크놀로지의 합리성이 지배의 합리성으로 둔갑한 현실 상황, 그 속에서의 이성의 기능 마비, 문화의 획일화, 대중문화의 자본에의 예속화 등에 대한 비판이 큰 흐름이다. 여기에서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로서 문화비판이라는 관점에서는 본다면, 두 진영의 문화분석의 틀이 모두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신칸트학파는 오히려 문화의 외적 요인에 대한 규명과 비판을,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문화의 내적 요인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수용할 때에 더욱 완성된 문화분석의 틀이 형성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문화철학과 문화비평은 독립적인 분과 영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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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analysis of Culture between the School of Frankfurt and Neokantianism
― Focused on the viewpoint of the philosophy of culture and the criticism of culture
― Shin, Eung-Chol ―
This study aims to reveal the method of the analysis of culture between the School of Frankfurt and Neokantianism, especially focused on the viewpoint of the philosophy of culture and the criticism of culture. In terms of the School of Frankfurt, we will deal the viewpoint of Horkheimer, Adorno, Marcuse, and Benjamin. And relating to Neokantianism, we will discuss the viewpoint of Kant, Herder, and especially Cassirer.
We know that the School of Frankfurt is interested in the criticism of ideology of mass culture, while the Neokantianism is interested in the origin, process, and future of culture. In this study, we will clarify a common feature and difference, and significance in terms of the analysis of culture, especially, relating to correlation with the philosophy of culture and the criticism of culture.
※ Key Words : The School of Frankfurt, Neokantianism, Culture, The philosophy of Culture, The Criticism of Cul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