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동의보감 (1회)
[제1부 용천 탈출 ]
16세기 말!
조선왕조 중엽의 두터운 신분차별 속에서 천첩의 자식이라는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에 양평군이라는
군의 작호까지 받았던 인물!
무덤 속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고,
이 나라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사랑했던 의인!
한방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중국인에게
까지 하늘의 손을 대신한 신인으로
숭앙받던 동의보감
(전25권으로 된 의서, 1613년 간행)의
저자 허준!
그 불꽃보다 뜨거운 생애를 살다간 허준의 일대기를 이야기로 풀어갑니다.
[제1부 용천 탈출 1]
"잘 있게."
과거를 보러 떠나는 들뜬 친구들이 말했다.
과거 날짜에 두 달이나 여유를 두고
남은 공부를 한양에 가서 하리라는
팔자 좋은 친구들이었다.
명종이 승하하고,
조선의 14대 임금으로 선조가 즉위한
첫해(1568)
평안도 용천 오도곶의 큰나루.
간간히 싸락눈이 섞인 2월의 갯바람이
살을 에듯이 모질었다.
그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해주로 떠날 배를 기다리던 허드레
선객들이 나루의 제일 앞자리에 선 허준과 그 친구들로 인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걸음을 세우고 있었다.
반상이 유별하여
큰갓 쓰고 각자 하인을 거느린 그 호기
서린 양반댁 자제들,
더구나 과거 보러 가는 그들의 앞을
무엄하게 가로질러 먼저 뱃전에 올라
그들의 작별인사가 빨리 끝나기를 흘낏
거리며 기다렸다.
"다녀오리."
키가 제일 작은 심진사댁 사위가
허준의 손을 쥐었다 놓고,
기찰포교의 안내를 받으며 뱃전에 걸친
널판대기로 올랐다.
그 4, 5보 뒤를 따라
상민이라 불리는 것들이 우우 널판대기를 오르기 시작했다.
허준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솟기 시작했다!
어젯밤,
아니 어찌 어젯밤 만이랴 ...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천한 쪽에
속하는가는 어머니의 눈물 속에서 수없이 보았었고,
그 뼈저린 현실이 어머니의 경우만이
아닌, 자기의 운명 위로도 굴러온 것을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애초 허준의 머리에 얹힌 큰갓은
그의 신분에는 가당치도 않은 가짜였다.
생부가 용천 군수이기에
덤으로 글방에 드나들며 양반가문의
친구들과 사귀면서 그들과 어울릴 때는
자기도 머리에 얹고 다니던 일종의 객기의 소산이었다.
비록,
아버지가 지경 내를 호령하는
군수일지라도 그건 아버지의 신분이요!
허준은 그 아버지의 첩의 자식이었다.
첩도 그냥 첩이면 서자 신분이 되겠지만,
허준의 생모 손씨는 인종 1년,
윤임이 사사당한 을사사화에
그녀의 집안도 적몰되자,
역적의 아내와 딸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던 때의 제도에 따라 그녀 또한 하천
되었다.
이어 그녀는
대감댁 따님이 시집갈 때 비녀가 되어
가마를 따라갔고, 새아씨의 성미를 거슬러 팔려가는 신세로 전전하다가,
해미(충청도에 있는 해양 방어의 요지)
군관 허륜의 첩이 된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법적 신분은 양가 출신의 첩에도 미치지 못하는 천첩인 것이다.
그 천첩은 무언가?
간단히 말하여 양반 상놈이라 불리던
양민 즉,
농군들에도 미치지 못한 천것들에 대한
신분제도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가혹한
것이었다.
공천이란,
관부에 종사하던 종들을 일컫는 것으로
관청 소속의 기생, 나인, 관노비, 역졸
등이 이에 속했고,
그 문건은 장례원에서 관장했는데,
3년마다 조사하여 속안을 작성, 동태를
감시하고,
20년마다 정안을 작성하여
그들의 신분을 재확인하는 등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있기 전에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높고 높은 장벽이었다.
또,
팔반사천이라 불리던
상여꾼, 중, 백정, 무당, 광대, 공장,
일반기생, 사노비 ...
개개인의 종인 사노비란?
그 가문의 재산으로 간주 상속했고,
종모법, 종부법을 시행, 아비나 어미가
종이면 그 소생 또한 어김없이 종이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제도가 엄연하니
같은 팔천에 속해도 상전에게 예속되지
않았던 무당, 백정, 중, 옥졸, 배꾼, 장사꾼
등은 사노비에 비해 자유 하나는 누린
셈이었다.
그 자유도 없는 사노비!
자자손손 세습하여
주인댁 문전 안에 종의 꼬리표를 달고
살다가 다음 대의 종을 낳아주고,
또 낳아주며 또 낳고 낳으며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 사노비의 신세.
허준의 이마에 사라졌던 힘줄이 다시 불끈 솟았다.
떠나는 배를 보며,
그의 무릎이 결코 추위 때문이 아닌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떨기
시작했다.
과거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친구들 입에서 한양 얘기며,
장차 획득하고 싶은 관직에 대한 화제가
부쩍 많아졌고,
허준 또한 어린 날 어머니에게 들은 한양에 관한 얄팍한 지식으로 열을 올려
그 화제에 끼여들고 했었지만,
그 자신 자기는 과거를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오늘 25리 먼 길을 전송나온 것은
친구로서의 정리에 의한 가벼운 마음
이었거늘 ...
'어쩐 일이란 말인가!
골백번 단념한 신분에의 자각을
지금에 와서 또 캐묻고 안달하는 것은 ...'
물길을 잡아 멀어지기 시작하는
황포 쌍돛대가 한껏 해풍에 부푼 것이
보였다.
허준이 뇌까렸다.
'나하고는 다른 사람들 ...
나하고는 다른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
이마의 파란 힘줄이 약해갔다.
코끝이 시큰 울더니 머리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갈비뼈가 산산이 부서져 명치끝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눈물을 지우고 시선을 들자,
기암괴석 바위가 가파른 오도곶 해안을
돌아 황포 쌍돛대가 마악 하나로 겹친 채
서해의 격랑 속으로 멀어가고 있었다.
"개 같은 새끼들!"
문득 허준의 입에서 배를 타고 멀어가는
그 양반 친구들 외 또 한 무리 그가 사귀는 천한 태생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쓰는 된소리가 뱉어졌다.
애써 비웃으려던 허준의 입이 씰룩였다.
"더러운 새끼들!"
허준의 입이 그의 진짜 모습인 상놈의
소리를 냈다.
물론 그 말들은,
배를 타고 멀어지는 친구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친구들을 태생에서부터 갈라놓은 세상의 제도와 거기 높다랗게 다리를 꼬고 앉아 내노라 하는 세상 모든 양반들을 향한 욕지거리였다.
"이따위 세상! 사그리 불태워버려!"
말끝에 허준의 호흡이 폭발했다.
머리의 갓을 벗겨 움켜쥔 순간,
발기발기 찢고 뜯으며 내팽개쳤다.
달리면 멈추지 못하는 것이 그의 태생
이었다.
"쌍놈들!"
맨상투의 허준이 바닷가 자갈밭으로 내달
으며 뒹굴었다.
쓰러지는가 했더니, 떨리는 그 손이 돌멩이를 움켜쥐고 일어나며 멀어져가는 배를 향해 팔매질
했다.
바다는 허준의 돌멩이를 삼키고
찰랑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싸락눈이 굵은 눈발로 변하고 있었다.
벌겋게 눈물이 번진 허준의 눈자위로
그 눈발들이 써늘하게 와닿았다.
그 머리 위로 때묻은 갈매기 한 마리가
허준을 비웃듯이 기웃기웃거리다가
문득,
바람에 날리며 높게 낮게 한껏 자유롭게 바다 위로 떠갔다.
"죽일 놈들, 모조리 싹 죽여버려야 돼."
뒷날,
무덤 속의 생명을 끌어내고,
한 마리 갯지렁이조차 밟으려 않던,
온 세상의 병고를 구하려 애쓰던 그와
전혀 반대의 무서운 말이 뱉어졌다.
"씨--팔놈들. 네미랄 자식들."
표현에 비해 그의 마지막 욕설은 기운이
다 빠진 씨부림에 지나지 못했다.
못박혀선 그의 발치로 문득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허준이 찢어발긴 갓 조각이 거기 떠 있었다.
갑자기 멍청해진 허준의 맨상투 위로
눈발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첫댓글 허준의 출생이 이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