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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온 세상에 생명의 기운이 스며든 싱그러운 봄과 함께 우리는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마태오 16,21)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세상 어떠한 것도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죽음의 허무함과 슬픔을 달래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 비참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죽음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은 부활한 생활이며(에페 2,6),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1고린 12,12-27)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인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며, 보증이 됩니다.(1고린 15,20-22)
오늘날 세상은 과거보다 물질적인 풍요를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의 어두운 면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난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은 더 심해져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고통 받게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뛰어난 최첨단 대중매체의 체제 아래 살고 있지만 인간의 삶은 과거에 비해 더 소외되고, 진실된 친교와 소통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모든 생명의 공존과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다양한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일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생명의 일치는 모두를 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회, 종교, 정치문제에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랑과 호의를 가지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대화는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사목헌장 28항)
이제 곧 국민을 위한 봉사자를 우리 손으로 뽑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옵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선택의 순간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우리나라의 미래와 행복에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정치 생활의 목적인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보호하고 증진하도록 모든 국민이 자유투표를 할 권리와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를 선택하는 것은 신자들이 세상의 복음화와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참여하는 중요한 활동이 됩니다.(사목헌장 75항) 또한 교회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대해 공개적인 지지나 거부하는 일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공동체의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총선이 국민의 화합과 일치를 이루고 우리나라가 한층 더 발전하는 도약의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생활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일상생활, 삶의 현장에서 사랑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습니다.(마르 16,11 참조) 그때 비로소 우리는 더는 죽음 아래 있지 않고, 부활의 생명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여러분 마음 안에 주님의 부활과 생명의 빛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2012년 부활절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춘천교구]
“선포하고 증언하라”(사도 10,42)
“나는 정녕 죽지 않고 살리라.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시편 118,17)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생명의 빛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루카 24,46)는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지난 사순절을 회개와 보속의 실천으로 채워가며 부활을 준비해 온 형제자매 여러분께 마음을 다해 축복의 인사를 드리며,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가장 큰 신비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분께서 강생과 공생활을 통해 가르쳐 주셨던 모든 것이 헛될 것이며, 창조 때부터 이어 온 구원의 희망도 의미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약속하신대로 당신 외아들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 (로마 6,8)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큰 소리로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되었기 때문
입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부활은 극진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요한 3,16) 인간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 주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모두가 이 사랑의 증인이 되어, 온 세상을 향해 부활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이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당하고 계신 분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고, 많은 혼란과 분열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는 치유와 일치의 희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며칠 뒤에 있을 총선거가 우리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환하게 밝히고 올바로 인도하는 축제가 될 수 있도록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새 복음화의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여 언제까지나 그 영광을 살고 전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주님 부활의 은총이 우리 교구의 모든 분과 공동체 에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강복합니다.
2012. 4. 8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춘천교구 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
[대전교구]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새봄을 맞아 죽은 듯이 보였던 대자연이 새로운 생명을 움틔우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하시는 일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당하며 고통받는 이들과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1. 공동체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요한 16,16)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전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부활하신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당신 모습을 드러내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에 빠져있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함께 빵을 나누는 순간에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셨고(루카 24,13-35 참조), 제자들이 유다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 그들 한가운데에 나타나시어 평화의 인사를 전하셨으며(요한 20,19-23 참조), 고기를 잡고 있는 일곱 제자들에게 손수 빵과 물고기를 구워주시며 함께 아침식사를 드셨습니다(요한 21,1-13 참조).
부활의 삶은 더불어서 함께 사는 삶입니다. 제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함께 목격하고 체험하였듯이, “하늘의 시민”(필리 3,20)인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라는 믿음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로마 6,8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는 세상의 불의한 구조마저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치로 돌려놓아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2. 혼란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생활하는 사회의 현실은 많은 어려움들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음을 실감합니다. 이런 현실은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으로 찌들어 있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나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며,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면서도 무분별한 개발이 지속되고 있고, 일자리가 없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나만 행복하려고 하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계층, 지역, 세대 간의 골이 깊어져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티없이 뛰어 놀면서 꿈을 키워가야 할 학생들의 폭력 소식을 접하면서 놀라움으로 할 말을 잊었습니다. 학교가 서로 더불어서 함께 사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인성교육에 바탕을 둔 교육이 아니라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입시만을 위한 경쟁교육으로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하고 걱정하면서 ‘이래서는 안된다, 바뀌어야만 한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탐욕 그 자체를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콜로 3,5 참조). 탐욕이 하느님께 순종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이 세상, 탐욕의 질서가 생명의 질서를 지배하는 이 세상은 죽음의 길목에 서있는 듯싶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요한 5,24) 부활의 증인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권력이 진실을 호도하고 생명을 유린할 때 정의와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3. 공동선을 증가시키는 총선거
며칠 후에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헌법 제 1조 1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합니다. 국민은 자유롭게 선출한 대표들에게 주권의 행사를 위임하지만, 그러한 통치 임무를 맡은 이들의 활동을 평가하고, 잘못하면 그들을 바꿈으로써 주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95항 참조). 국가의 중요한 결정들을 국회의원들이 결정하기에, 국회의원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합니다.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정치를 기대하기 위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과 비전을 지닌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열린 마음과 냉철한 자세로 후보자를 검증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참조하여 그 중에 가장 나은 사람에게 투표하여야 합니다.
가)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합시다. 정치에 대한 체념이나 냉소적인 태도를 버리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투표의 권리를 행사하여야 합니다.
나) 국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공동선의 실현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지연, 혈연, 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나라의 앞날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국민을 속이는 자를 가려내고, 도덕성을 갖춘 사람을 뽑으면 그만큼 정치 질서도 나아질 것입니다.
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을 뽑읍시다. 반드시 신자들을 뽑으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창조질서를 보존하며, 국민의 생각을 인내하며 경청하고, 대화하고, 조정할 줄 아는 열린 사람이어야 합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 고통받는 이들의 ‘손과 입과 발’이 되어 줄 수 있는 이들을 뽑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라) 공정한 선거 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언론은 공정보도를 통하여 공정선거를 담보하여야 합니다. 공직자들도 사리사욕을 버리고 국민을 섬기며 공동선을 실현하여야 합니다. 유권자들도 공명선거를 해치는 온갖 비리와 불법 행위를 적극적으로 고발하여, 깨끗한 정치 풍토를 가꾸는데 최선을 다합시다.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정치를 합니다. 올 해 두 차례의 선거로 투명하고 깨끗한 선거풍토를 조성하여 정직하고 도덕성을 갖추지 않고는 정치 지도자로 나설 수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킵시다.
4.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진정한 평화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삶은 완전한 변화를 보였습니다. 미움과 불의를 조장하는 악의 세력에 맞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엄청난 용기를 갖게 됐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은 믿음 안에서 나눔과 섬김의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사도 4,34)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해 나갔습니다.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정의와 평화를 나누어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우리에게 닥치는 미움, 폭력, 불의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겨내는 길을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배우면 좋겠습니다. 평화에 이르는 첫 번째 길은 “법”이며, 사람들에게 그 법을 존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정의를 완성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정의와 사랑은 때때로 반대세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둘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일 뿐이며, 서로 통합되어야 하는 인간 삶의 두 차원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의 2004년도 평화의 날 메시지, 10항)
미움, 이기심, 불의로 얼룩진 현실 앞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건설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지혜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 지혜는 영혼과 생각의 눈을 열어주시며, 이 세상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을 주는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가 부활한 삶을 살 때에 주님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6)
2012년 4월 8일 예수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전교구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
[인천교구]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부활 시기를 맞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부활을 이렇게 예고하셨습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10, 33-34)
예수님께서는 예언하신 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 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집회서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고민과 마음의 두려움, 다가올 일에 대한 걱정, 그것은 바로 죽음의 날이다.”(40,2)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떠나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적인 몸”(1코린15, 44)으로, 영광스러운 몸과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회서는 “죽음의 판결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보다 앞서 간 자들과 뒤에 올 자들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 주어진 주님의 판결이다.……십 년을 살든 백 년을 살든 천 년을 살든 저승에서는 수명을 따질 필요가 없다.”(40,3-4참조)라고 위안을 줍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인간에게 큰 희망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1베드1,3-4) 어디 그뿐입니까? 바오로 사도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3-14)라며 우리가 언젠가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됨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 테르툴리아누스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며, 우리는 부활을 믿는 자들이다.”(가톨릭 교리서 991참조)라고 말하며,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요소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 같이, 우리도 언젠가 부활하리라는 확신 속에 늘 기쁘고 희망이 넘치는 생활, 감사하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이 단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 대한 희망만 간직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며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경축하며 감사드리는 오늘, 이 기쁜 소식을 우리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선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부활의 증인”(사도1,22)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이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한 채 쓸쓸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실망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도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이할 것임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가난한 이웃, 고통 받는 이웃들을 외면한 채, 나만의 기쁨과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따듯한 동정심으로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주일미사 때,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 내용 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고백합니다. 또한 미사 때 마다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 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죽음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하심을 굳게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필립3, 10-11)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올해 사목 교서에서 50만 신자를 목표로 했던 것이 이루어지기를 함께 노력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임을 널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가족이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성스러운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컴퓨터로 인한 편리함도 많아졌지만, 그 대신 많은 사람, 특히 학생들이 컴퓨터에 중독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활하신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 그분만이 오직 내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나의 행복이심을 늘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크신 축복이 가득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병고에 시달리며 집에서, 병원에서 고생하는 분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며 나날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2012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인천교구 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수원교구]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그리스도 안에 일치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온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과 본당 공동체, 그리고 여러 사목 현장에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부활의 기쁨
오늘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사랑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부활 성야부터 밝게 타오르는 부활초는 우리의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밤에 초를 밝혀 들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세상에 선포합니다. “비춰진 땅아 깨달아라. 세상 어둠 사라졌다. … 거룩한 이 밤은 불기둥의 빛으로써 죄악의 어둠 몰아낸 밤.”1) 어둠을 몰아내는 이 초는 당신의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주님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부활 성야 때 축복하는 세례수는 우리가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묻혔으며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았음을 상기시켜 줍니다.2)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과거의 어두운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삶을 되찾았습니다.
‘무덤의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의 승리자’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창조 때부터 시작된 구원 역사의 정점을 이룹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 당신의 아들에게서 온전히 드러나고 실현된 것입니다. “오, 오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님 사랑!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3) 인간의 교만과 배반, 탐욕과 이기심, 분노와 질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십자가는 목숨을 내어주는 주님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벗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완전한 사랑’4)의 표지이며,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새 계명의 완성’입니다(요한 13,34; 15,12-13). 주님의 사랑으로 새로 태어난 이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나 어리석음의 표지가 아니라(1코린 1,22-25), 주님의 영광이요 세상 모든 이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축복의 근원이며 은총의 원인이 됩니다.5) 주님의 부활은 이 지극한 사랑이 결국 죄악과 죽음과 싸워 승리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파스카의 삶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우리 모두는 파스카의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이 삶은 벗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제제일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된 경제발전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풍요도 주었지만, 우리 사회에 많은 부조리를 양산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평가하는 시류에 편승하여 우리 문화는 점차 선과 악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습니다.6) 더욱이 최근 들어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경제적 불평등과 소외현상이 확산되며 실업과 빈부격차가 극대화되고 경제적?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청소년 폭력, 인권 침해, 소통의 부재, 생명 경시 풍조, 환경 파괴 등은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파괴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 앞에서 우리 신앙인들 또한 “그동안 ‘하느님의 것’을 잊고 살아왔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 대축제를 지내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파스카의 삶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 우리 사회를 정화하고 완성해야 할 사명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7) 그것은 우리가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곧,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가난의 길, 십자가의 길, 섬김의 길에 참여함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영성 운동
올해는 수원교구 설정 50주년 희년이 시작되는 역사적이며 감격적인 해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발전을 이룬 우리 교구가 50주년을 맞아 더욱 성숙한 교구로서 자리매김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희망과 설렘으로 기다리는 이 은총의 해를 통해 우리는 신앙 안에서 영적으로 새로워져 신앙의 열정을 되찾고, 신앙의 기쁨을 일상 안에서 구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영적인 도약의 해를 잘 준비하기 위해 교구는 올 부활 시기부터 50주년 기념 영성 운동을 실시하고자 합니다. “잘 섬기겠습니다.”라는 영성 운동입니다. 안으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겸손과 섬김의 삶을 본받아 영적으로 새롭게 되고, 밖으로는 이를 이웃 안에 실천하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의 빛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증거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탐욕과 폭력으로 형성된 ‘죽음의 문화’8)를 추방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주님 안에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죄와 죽음을 이기고 ‘무덤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어 온 세상에 희망의 불을 지펴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늘 전구해주시는 우리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필요한 은총을 간구해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시며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아!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2012년 4월 8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수원교구 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1) 부활찬송.
2) 로마 6,3-4; 부활 감사송 1.
3) 부활찬송.
4) 아우구스티노,「요한 복음 주해」84, 1-2(CCL 36, 536-538. 성무일도 성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참조).
5) 대 레오 교황,「설교집」8,6-8(PL 54, 340-432. 성무일도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참조).
6) 교황 베네딕토 16세, 「2012년 사순 시기 담화문」 참조.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37-39항 참조.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27항 참조.
[원주교구]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
부활대축일을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허무함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부활은 삶이 절망에 이를지라도 그 절망이 끝이 아님을, 그 절망 너머에 희망이 있음을, 그리고 그 희망의 근원이 하느님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부활은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바꾸어 버린 사건입니다.
성경은 안식일 다음 날 무덤을 찾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존경하며 따랐던 예수님을 죽음과 함께 떠나보내고 슬픔을 닦고자 향유를 들고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시신의 주인과 쌓아온 지나간 추억을 나눌 수는 있지만 그와 함께 하는 더 이상의 미래는 담지 못하는 닫혀 있는 무덤, 그곳은 ‘절망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열려 있습니다.
‘닫혀 있는’ 무덤이 아니라 ‘열려 있는’ 무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흰 옷의 젊은이가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마르 16,6)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있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통해 절망으로 들어갔던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전하여 줍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되살아나셨다고, 그래서 닫힌 무덤 속에 계시지 않다고, 보라고, 그분의 시신을 모셨던 무덤이 열려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절망 속에서 머무르지 않는 그분이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희망은 절망 속에 갇힐 수 없는 법입니다. 부활은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희망은 때로는 절망의 틈새에 갇히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거쳐 무덤에 머무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절망의 늪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절망의 늪을 통과하여 나타납니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닫혔던 무덤이 다시 열린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희망이 절망 속에 영원히 갇혀버린다면, 그것은 거짓 희망일 뿐입니다. 참된 희망은 어떠한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빛입니다.
우리는 부활성야의 예식에서, 어두운 밤에 촛불을 밝혀 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빛이심을 고백합니다. 세례 받을 때 받아들었던 촛불도 떠올려 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빛으로 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빛이니, 부활하신 예수님의 빛을 좇아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밝혀 들은 촛불이 속삭이듯이, 우리는 바람이 불면 곧 꺼질 듯한 나약한 인간이기에 지상에 살고 있는 나약한 인간 조건을 하나도 외면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울고 웃으며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손에 나약하더라도 분명히 빛을 밝히는 촛불 한 자루가 들려 있듯이, 울고 웃더라도 그리스도의 빛을 우리의 삶 안에 밝히고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 참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국민소득이 2만불이 넘어섰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갈수록 각박하게 느껴집니다. 물가는 오르고, 자녀들 교육비는 등을 짓누르고, 자영업자들은 열심히 일해보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고, 실업자에게 일자리 찾기는 너무 힘듭니다. 빈익빈부익부의 사회양극화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못살겠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을 볼 때, 사목자로서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삶이 비틀거린다 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시 중심을 잡으면 됩니다.
아니, 넘어져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닫혀 있는 무덤이 열리고 죽었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절망의 틈새를 헤치고 희망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십자가의 슬픔 뒤에 부활의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거쳐 마침내 부활시기에 이른 것처럼 슬픔과 절망 뒤에 기쁨과 희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희망과 기쁨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덤을 열어젖히고 갈릴래아로 가야합니다.
천사는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
갈릴래아,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먹고 뒹굴며, 삶의 체취를 남기셨던 곳, 당신과 제자들의 삶의 자리였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이루어질 참된 기쁨의 만남을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갈릴래아, 그곳이 바로 우리가 부활한 주님을 만나는 자리요, 우리의 삶이 부활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을 만난다고 일과 사람을 피해 심산유곡의 피정센터에 내내 머무를 필요는 없습니다. 부활한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들 모두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 가정, 직장 그리고 이웃 공동체는 부활한 주님을 만나는 삶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희망을 갖고 돌아가는 삶의 자리 갈릴래아,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에게 전해진 희망의 빛으로 주위를 밝히십시오.
아울러, 곧 이루어질 선거에 참가하여 올바른 선택을 권고합니다.
감정과 편견으로 인한 선택은 늘 국민들에게 아픔이었음을 기억하고, 과거에 대한 판단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바른 전망을 가지고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고 봉사할 보다 나은 지도자들을 일꾼들로 선출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 김지석 야고보 주교
[의정부교구]
“돌을 치워라”
-요한 11,39-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희망의 빛이 되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오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았던 무거운 돌이 치워졌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대상이었던 죽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삶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기쁨과 희망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요, 희망의 근거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부활은 믿는 이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부활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두려움도 절망도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역설이 부활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때로는 희생으로, 때로는 인내의 모습으로, 때로는 관용과 침묵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희생시키고 죽이고 부서뜨리는 일 없이 십자가의 죽음은 불가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명히 하나의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를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갈망하는 것은 헛되고,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빼앗긴 십자가의 삶은 단지 고통일 뿐입니다.
부활은 찾아왔지만 마냥 기뻐하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어두움이 많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생기는 자연재해가 우리에게도 예외일 수 없고, 특히 원전의 가공할 만한 위험이 있는 데도 편리함과 경제적인 이득만을 생각하여 원전개발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걸고 넘어온 북한주민들이 다시 잡혀 북한으로 강제송환 되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데도 우리는 아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관심한 채 있습니다. 또한 권력과 부를 위해서는 공동선이나 윤리는 안중에도 없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인격과 생존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는 원활한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세대 간 격차라는, 여와 야라는 등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집단이나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화나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 평화가 넘쳐흐르는 훈훈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만든 이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단호하게 배척하거나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참아주고 대화하면서 그래도 하나 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 장벽, 이 돌들을 치우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밝고 훈훈한 사회,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을 전하는 성경에서도 돌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었을 때, 그들은 돌이 치워졌음을 목격하고 나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들을 치워야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일치와 평화를 가로막는 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돌들을 치우는 일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고 화해하며 일치를 위해 한발 내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교구에서 올 해 들어 시작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바치는 묵주기도 7천만단 봉헌 운동도 돌을 치우는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갈릴래아로 가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찾은 여자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우리 역시 이 시대의 갈릴래아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명예와 권력이 있는 곳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있고 가난한 이들이 있는 변방의 땅입니다.
우리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가 가야 할 갈릴래아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갈릴래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찾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도록 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2012년 4월 8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의정부교구 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부활절은 모든 축일 중의 축일이요, 모든 주일 중의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예수님의 지상 탄생일이라면 부활절은 주님의 영원한 탄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허무하게 고통과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나라에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매우 어렵고 중요한 시기에 처해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대화는커녕 어느 때보다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 안의 정치권도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갈라져있으며 이와 함께 국민의 마음도 갈라져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정치의 근본원리는 당리당략 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 추구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는 모름지기 모든 국민의 행복과 지역 균형발전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국민의 선거로 그 일꾼을 뽑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국회의원 총선거와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 주권자인 국민의 보다 적극적이며 신중한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생명의 승리요, 절망을 이긴 희망의 승리입니다. 또한 거짓을 이긴 진리의 승리요, 미움을 이긴 사랑의 승리요, 어둠을 이긴 빛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세상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절망이 있을 수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삶이란 어떠한 어려움에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는 삶이며, 과거의 구태의연한 삶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삶이며, 서로의 어려움과 고통을 서로 나누는 삶이며, 늘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사는 삶 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이 가르쳐주는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후에 새롭게 산다는 것만이 아니라 부활의 희망과 힘으로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야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이라는 이 기쁜 날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도록 다짐하고, 여러분의 앞으로의 삶이 행복하고 희망찬 나날 되시기를 빕니다. 다시 한 번 부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2012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청주교구]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2.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지 못하였고,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과(마르 16,4 참조)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지 못하였습니다(마태 28,4 참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힘으로써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이 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심으로써 한없는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분명, 예수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주님의 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우리 생명을 되찾아 주셨습니다(부활감사송 1).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졌듯이, 믿는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이,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 대축일 한 번만이 아니라, 매 주일마다 기념하고 경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 신앙인들은 주일마다 미사에 정성스럽게 참례하고,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하는 시편 노래를 함께 외쳐 불러야 하겠습니다(주님의 날, 1항 참조).
3.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묻히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인류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하시어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고,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16항).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함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으며, 부활이 없는 십자가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자유는 앞세우며 책임은 소홀히 하고, 권리는 내세우면서 의무는 등한히 합니다. 영광과 안일은 달가워하면서 십자가와 희생은 꺼려합니다. 역량 있는 사람은 많지만 사람다운 사람은 적고, 종교인은 많지만 종교인다운 사람은 적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신원을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참조).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자유와 권리에 앞서 책임과 의무 수행에 힘쓰며, 자신의 이익에 앞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4. 모든 신자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모든 신자는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에 이르는 은총”을 청하면서, 가정과 직장, 이웃과 사회에서 먼저 십자가를 용감히 져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23 참조)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져야할 십자가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는 일’,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하고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는 일’,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일’ 등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즐겨 실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고 부활을 선포하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생명경시풍조가 만연하여, 자살과 낙태, 학원폭력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저출산과 인구고령화는 국가의 미래마저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으로서 이 문제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과 사랑의 문화 건설에 투신함으로써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 최근 우리 사회는 심각한 청년실업률 증가와 가계부채 상승, 권력형 비리와 고리 원자력발전소 정전사고,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움직임 등으로 불안과 걱정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신앙인은 온갖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언제나 희망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 가정과 주변에 어두움이 짙고 희망이 없어 보인다 하여도, 우리는 언제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모두는 온갖 두려움 대신 희망의 기쁜 소식을 가족은 물론 이웃과 온 세상에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허락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4월 11일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총선에서, 나라와 지역사회를 위하여 진정으로 헌신하는 분들이 선출되도록 모든 교우들은 소중한 선거권을 신중하게 행사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4월 8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청주교구 교구장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부활 - 영원한 삶을 향한 여정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곳곳에서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 계절에 우리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으시고 부활 축일을 기쁘게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죽음의 세력을 떨쳐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그분의 부활과 참 생명을 체득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1. 부활 사건과 신약성경
신약성경은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입니다. 이 텍스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다양한 진술과 고백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단지 사실에 입각한 사건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며(로마 10,9),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1코린 15,3-5)는 선언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을(1테살 4,14) 더 중요하게 다룹니다.
2. 부활 사건과 하느님의 행위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온 유다에서 일어 난 사건”(사도 10,36 이하)으로 파악합니다. 이 사건을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와 연결시킵니다. 하느님의 행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켜지신 우리 주 예수님” 또는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마 4,25) 와 같은 표현을 통해 드러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행위는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1코린 6,14).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보여주시는 행위”(에페 1,19; 콜로 2,12 참조)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행위를 통해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하느님은 “다시는 죽음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육신은 부패하지 않으시며,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으시는 분”(사도 13,34-35.37)이시므로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3. 부활사건과 그 의미
부활 사건은 진실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사건 그 자체 안에 부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부활의 의미를 함께 정리해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분의 부활을 계시하며 완성합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죽음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죽음을 통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분의 발현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일으켜지시어 올림을 받으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향하여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죽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하느님의 힘으로 지금 살아 계십니다”(2코린 13,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이 가져다주는 생명의 힘은 부활에서 완성됩니다. 이는 그분의 죽음이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자체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임을 드러냅니다. 이 생명은 죽음에서 해방되어 죽음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 생명은 또한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묵시 2,8)를 의미하고,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있는 이”를 의미합니다. 부활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명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생명(로마 6,8), 하느님의 힘(2코린 13,4)으로부터 나오는 생명,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생명이라는 특성을 지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과 인류의 근원적인 상황까지도 변모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막강한 힘으로 경험하는 권력들은 그 통치력을 상실합니다. 이로써 세상의 권세와 권력의 무장은 해제당합니다(콜로 2,15).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에페 1,20-21)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상의 흐름, 이념의 지배 앞에서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력들이 발휘하던 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죽음, 곧 “마지막 원수”는 파멸에 이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됩니다(1코린 15,25-26; 콜로 1,13; 2티모 2,12).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고(요한 12,31), 부활하신 분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세상의 권력이 행사하는 저항과 오만의 힘은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분께서는 세상을 위해 세상 안에서 존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결과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위임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 이하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모시킵니다. 인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용서를 받고 그분과 화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사도 5,31) 아울러 부활하신 분께서는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과 확실성을 제시해 주십니다(루카 24,30 이하; 요한 21,5; 사도 1,4; 10,41 참조). 만일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지은 죄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그러나 지금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으며,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은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고(로마 5,10; 2코린 5,18 이하), 의롭게 되었으며(사도 13,39; 26,18; 로마 4,25; 5,9), 성스러움을(1코린 1,30; 콜로 1,21-22; 에페 5,26)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길을 열어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분에게 의탁하고 순종함으로 생겨나는 믿음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분께서 주시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습니다.”(1코린 15,17)
만일 우리가 부활하신 분을 믿고, 그분에게 속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으므로, 우리도 부단하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로마 6,4; 7,4; 사도 3,26; 26,16 이하; 26,19-20). 옛 인간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얻는다면,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의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고,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필리 3,9 이하) 희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임을”(로마 14,7 이하) 거듭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의 존재 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믿음의 역설을 받아들임으로써 부활하신 분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약속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여 부활의 힘과 능력을 체험하도록 기원합니다. 부활은 죽음의 순간에 그 참 모습을 드러냅니다. 절망의 순간에 희망은 그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부활하신 분의 큰 축복 속에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여정에 동행하시도록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2012년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천주교 마산교구 교구장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안동교구]
부활의 기쁨, 희망, 평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온갖 어둠을 몰아내시고 죽음을 이긴 구원과 사랑의 승리자로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들을 밀쳐내시며 새로운 생명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를 물리치시고 부활의 새 아침을 여셨습니다.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하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듯했던 처참하고 절망적이고 어두웠던 그곳에서 찬란한 광채의 부활한 생명이 움터 나오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과 사랑의 놀라운 승리입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구원과 사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과 아픔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 기쁨을, 절망과 좌절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참 희망을, 미움과 분노와 원한의 상처로 서로 갈등하며 갈라져 있는 사람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부활하신 그분께 우리는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과 아픔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서 오는 고통과 아픔, 생활고로 인한 갖가지 시련과 환난, 혼자서는 도저히 견디어 내기 힘든 인간적인 온갖 두려움과 근심, 걱정 등으로 슬픔 중에 있는 이웃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당신의 사랑 안에 초대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도록 사랑의 계명을 주셨는데, 그 이유는 당신의 기쁨이 이들과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당신이 대신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들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심으로써 고통과 아픔과 슬픔 대신 아무도 빼앗지 못할 부활의 기쁨, 참 기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죽음보다도 강한 이런 사랑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났으며 이 세상에도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이제 고통과 아픔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함께 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의 기쁨을 세상에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될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과 슬픔에서 참 기쁨으로 건너가게 하는 것, 이것이 우리 부활의 증인들이 해야 할 일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좌절하기 쉽고 절망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살아갈 보람은커녕 살아갈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 현상의 심화로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젖어 실의에 빠져 있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난 3월 15일자로 발효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서민들의 이런 삶은 더욱 더 심화될 것입니다. 특히 지역 농민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물질적인 차원의 지원뿐만 아니라 교회 차원의 영적인 도움도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것만을 두고 희망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며 현세의 여러 어려움도 잘 극복할 줄 압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이시고(에페 2,12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1베드 1,3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런 부활의 희망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이 있는 그곳에 참 희망을 심어야 할 것입니다.
양극화 현상과 함께 사회적 갈등도 심각합니다. 남·북 분단으로 고착된 이념 갈등도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들을 푸는 데 앞장서야 할 정부와 정치권은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조장하기까지 하는 인상을 주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함께 있는 해라서 이런 갈등의 골은 더 깊어져 서로가 주고받는 상처가 더 커지지는 않을지 염려됩니다. 평화롭기만 하던 제주 강정 마을이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찬 갈등의 공동체가 되어버리는 작금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회적 갈등의 결과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불행한 일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였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6) 제자들을 참 평화를 전하는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 평화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에페 2,14) 그 평화는 그분께서 스스로 몸을 바쳐 이루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갈라서고 등을 돌린 양쪽을 당신의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서로 간의 적개심을 없애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에페 2,16 참조)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런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강정 마을의 평화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큰 기쁨과 희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이러한 부활의 선물들을 세상에 전하도록 여러분들을 파견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어두운 무덤을 막았던 그 육중한 돌들을 모두 치우시고 부활의 찬란한 새 아침을 여신 그분께서 친히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2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모든 이의 빛과 희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칠흑 같은 길고 긴 어두움을 뚫고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희망의 여명이 비추어 옵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졌던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죽음을 딛고 부활하신 주님의 충만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 모두에게 전하며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사랑과 평화, 진리와 생명, 구원과 행복의 길을 가르쳐 주시던 주님께서는 거짓과 편견, 질시와 미움, 불의와 위선에 사로잡힌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에 안장되고 그 입구는 커다란 돌로 막혀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파란만장한 예수님의 생애는 막을 내리고 모든 것이 영원한 침묵 속에 묻혀 버린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죽기까지 순명하신 아들 예수님을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빛 안으로 초대하시어 당신을 믿는 누구에게나 이 부활 생명에 참여토록 초대해 주셨는데 이것이 우리 희망의 근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삶의 어떠한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나 두렵고 떨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십자가 앞에서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끝이 결코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부활의 빛 속에서 힘겨운 우리 삶의 현실들을 살펴봅시다. 타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주위의 많은 이웃들, 특히 이주민, 새터민, 실업자, 가정과 학교폭력의 피해자, 장애인들 등 사회에서 소외되어 외롭게 생을 이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우리 개인의 삶도 순탄치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 생계에 대한 불안, 불안정한 가족관계의 갈등,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 갖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때로는 그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어두운 현실의 터널을 지나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크고도 무거운 십자가가 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사회 안에서도 죽음의 큰 세력 앞에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슬픈 사연을 접할 때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은 십자가를 극복한 사람들이 누리는 부활의 열매입니다. 예를 들면 시련 가운데서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도 힘들지만 말없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바로 이들은 부활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리는 부활을 체험하게 되고, 희망을 봅니다. 희망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포기이고, 절망을 딛고 일어선 희망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일 것입니다.
예수 부활이 우리에게 보여준 희망이 바로 그러한 희망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 죽음까지도 우리를 좌절시킬 수 없다는 희망 말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처지였던 주님께서는 오해와 불신, 시기와 질투, 미움과 증오 속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려는 노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우리를 도와주시며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있으며, 그 믿음 안에서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부활로 가는 여정이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이상이며 희망의 빛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만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피조물이 함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함으로써 부활의 기쁨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무절제한 욕심 때문에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조화가 깨어지고, 핵문제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에 대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2). 따라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여 함께 창조의 목적을 향해감으로써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부활의 생명을 누려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게 되면,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로마 8,19.21).
가정의 해를 보내고 있는 교형 자매 여러분!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분위기가 커져 가고 또 기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서로 나누고 키우는 가정으로 성장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과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모든 분들 위에 풍부히 내리시기를 기원하며 주님의 축복을 드립니다. 알렐루야!
2012년 4월 8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
[전주교구]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네 앞에 내놓는다
1. 오! 해피 데이
아침에 눈을 뜨고
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한다.
창문을 활짝 여니
오! 싱그런 바람이 뺨을 스치네.
오늘을 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이 있어라.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또닥또닥 된장을 지져 상을 차려
사랑하는 식구들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너무도 잘 먹여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테레비를 틀어 당신의 음성을 들을 때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쁨과 행복함이여...
뒷산을 다녀오는 아픈 남편을 위해
따뜻한 점심을 지으면서 다짐해 보네.
지극히 작은 자가 바로 나다 하셨으니
아픈 남편을 끝까지 사랑하며 보살피리라.
내 주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나도 그곳에서 정녕 죽으리.
어린 천사1)와 깔깔거리며 칼싸움하고
블럭으로 집 쌓기를 하면서
황혼에 받은 끔찍이 귀한 선물에 감동하여라.
어스름 황혼에 지쳐 돌아오는
예쁜 내 귀한 공주2)를 위해
부지런히 김부각 굽고
공주가 좋아하는 조기를 구우면서
나는 행복의 찬송을 부른다.
이제 밤이 깊었네.
엎디어 주님께 감사하면서 중얼거리네.
오! 해피 데이. 오늘도 너무나 행복했구나.
머언 훗날.
주님이 날 사랑하여 불러 가신 날
아무도 울면서 장송가를 부르지 마오.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축하해주오.
가난했어도 난 행복했었고
사랑으로 내 가슴은 터질 것 같았으며
천국에서 살다가 천국으로 옮겨가오니
오! 날마다 해피 데이
영원히 영원히
해피 해피 해피 데이!
1) 5살 난 손자
2) 며느리
2. 이것은 전주에 사시는 조정숙(요안나) 님이 틈틈이 써서 자손들이나 대녀들에게만 살짝 보여주셨던 글 모음에서 하나를 따 온 것입니다. 글을 쓰신 분은 70이 다 되신 할머니이십니다. 이 분은 살림에 별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심한 주벽까지 가지고 있다가 결국 큰 병에 걸려 대수술을 여러 번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남편을 끝까지 돌보고 사랑하였습니다. 가장을 믿고 살 수 없어, 어려운 살림과 자녀 교육을 위해 이불 장사, 반찬 가게, 음료수 장수 등 모든 노력을 다해 가정을 이끌어 왔습니다. 대녀에게 주신 이 글이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저에게까지 전해졌는데, 거의 4백 쪽이나 되는 이 글 모음을 거의 단 숨에 읽었습니다. 이분은 그나마 괜찮게 되던 장사가 구제금융 사태를 맞아 완전히 망해서 큰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고, 시어머님과 남편이 큰 병으로 몸져눕게 된 데다, 폭염에 어린 손자를 업고 병구완을 하는 등, 본인의 표현대로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만큼, 온갖 고난을 골고루 겪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으로 어떤 처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며,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을 맛보고 그것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순절에 들어서서 재의 수요일 바로 다음날 미사에서 들었던 신명기 30장의 말씀이 얼마나 큰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온 삶으로 증언하였습니다. -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 추방당하여 다른 신들 앞에 엎드려 그것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가 이제 요르단 강을 건너 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 잡고 오래 잘 사는 길이다(신명 30,15-20). -
3.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 - 이 두 가지 대조되는 상황 중에서 뒤의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생명과 행복과 축복을 원하고 죽음, 불행, 저주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두 번째 상황 속에 빠져 헤매고, 신음하고, 울부짖고, 그럴만한 힘마저 잃고는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많고, 그것이 극단에 이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까지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의 부자 나라들로 이루어진 경제개발협력기구에서 자살률, 저임금 노동자 비율, 노인 빈곤, 남녀 임금격차, 낙태율, 그리고 저출산율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불행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비율이 지구상에서 제일 큰 나라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살기를 원하고 행복과 축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타고난 욕망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나 나라 전체가 지난 한 세대 동안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해 왔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 축에 끼었다가 불과 한 세대 만에 제일 부자 나라 대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우리나라는 지구상에 유일한 경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나라가 부요해지면 모든 국민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너무나 실망스런 것입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에는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에도 수 십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각종 스트레스와 정신적 부담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국민 100명 가운데 20명 정도는 당장 정신과적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세계는 물질생활마저 그 바탕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가장 부자 나라라고 알려졌던 미국에서 시작된 <...을 점령하라!> 현상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의 구호대로, 1%의 사람들을 위해서 99%의 사람들이 희생해야 하는 체제는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4. 인류가 먹고 사는 문제를 두고 지난 세기에 경험했던 공산주의 유물론을 넘어서자마자, 21세기 들어 이번에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태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장의 논리에만 온전히 맡기는 식의 자본주의의 끝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일정한 통제를 벗어날 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얼굴과 힘으로 사람의 본성을 파괴하고 동물, 아니 그 이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목에서 금송아지의 유혹(출애 32장)에 빠졌던 역사를,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인류가 다시 한 번 되풀이하며, 그 쓴 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고들 했던 미국의 경제가 이렇게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고, 견디다 못한 국민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금송아지로 상징되는 물질에 대한 욕망이 일체의 통제를 벗어나 “굴레 벗은 말처럼 날뛰게”(출애 30,25)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돈이 종이가 아니고, 금이나 은 혹은 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무겁고 사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대신 금의 양만큼 종이돈을 만들어 유통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금으로 바꿔줄 수 있도록, 확보한 금의 양 만큼만 종이돈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달러도 마찬가지였고, 그 나라의 자본력 때문에 미국 달러가 국제적 상거래에도 쓰이는 세계 통화의 구실을 해 왔습니다. 그렇게 되니, 세계 거의 모든 나라와 개인들도 미국 달러를 경쟁적으로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71년 8월, 미국의 대통령은 달러를 더 이상 자기네가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에 맞추어 발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미리 확보한 금의 양 만큼만 찍어내던 종이돈을 그 때부터는 미국 정부가 원하면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금에 묶어두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야생말에게 고삐를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그 때부터 엄청난 양의 돈을 찍어냈고, 그만큼 달러의 가치는 줄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영향은 미국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모든 나라와 개인이 가지고 있던 달러에까지 미쳐, 그들도 가만히 앉아서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이 금본위 화폐 정책을 폐기한 1971년에 100달러를 금으로 바꿔 가지고 있었으면 2012년 현재 그 가치가 50여 배로 늘어났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미국 돈을 가지고 있던 세계 모든 나라와 개인이 그만큼 큰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부족하면 돈을 계속 찍어냄으로써 아주 편하게 나라의 살림을 꾸려갔고, 개인들은 은행에 넘쳐나는 돈을 장기 저리로 쉽게 빌려서 좋고 큰 집을 샀습니다. 그렇게 해서 편안히 산 것 까지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은행으로서는 돈 버는 재미에만 정신이 팔려 갚을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는 별로 묻지도 않고 계속 빌려주다 보니, 마침내 파산하는 가구가 늘어나 집값이 크게 떨어졌는데, 그 수자가 국가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규모에 이르렀고, 그 유명한 장기주택담보 부채 사건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다 부러워하던 미국의 안정된 삶(빡스 아메리카나)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나 공원에 천막을 치고 나 앉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은 가구당 빚이 약 1억 4천만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황금을 향한 욕망이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뛴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경제가 논밭이나 공장에서 하는 노동, 혹은 여러 3차 산업 분야에서 땀 흘려 수행한 노동에 기반을 두지 않고, 돈놀이나 투기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버는 식의, 말하자면 거품 같은 방식에 훨씬 크게(10배도 넘게) 의존하면서, 언젠가는 무너저내릴 수밖에 없는 구조 전체가 실제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4백 여 년 전, 남미에서 모을 수 있는 황금을 거의 다 가져다가 세계에서도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던 스페인이, 구태여 땀 흘려 일하거나 공장을 돌리지 않아도 호화롭게 잘 살 수 있었던 바로 그 점 때문에, 다음 세대에 가서는 생산 기반이 없거나 모자라서 유럽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전락했던 것과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5. 황금으로 상징되는 물질을 절대가치로 찾으면, 그 물질생활마저 제대로 유지될 수가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자를 만들어주겠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의 말에 쉽게 속곤 합니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런 장담이나 약속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텐데도 사람들이 번번이 넘어가는 것을 보면, 금송아지의 유혹은 사람의 살과 피 속에 녹아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황금 신상이나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예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 추방당하여 다른 신들 앞에 엎드려 그것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오늘날 글자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역시 수 천 년 전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그렇습니다. 다른 신들, 성서에서 우상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하느님처럼 섬기면,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물질, 성, 권력, 유행, 쾌락 등, 절대적일 수는 결코 없는 것들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고 그 앞에 엎드리면, 그 끝은 항상 죽음과 불행입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길 역시 수천 년 전에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그 말씀 속에 있습니다.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더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 31-34).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괴로워 신음하는 것은, 통제 장치 없이 날뛰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우리 모두의 집인 이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이 심한 병에 걸려 내지르는 단말마의 외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남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기후체계가 교란되어 극도의 추위와 더위가 반복되며, 녹지대가 사막으로 변하고, 하늘에서는 오존층이, 지상에서는 자연이 파괴되어 무수한 생물들이 사라지고, 오염된 환경 때문에 숨 쉬고 먹고 마시는 것마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이웃나라에서 발생한 지진과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로 유출된 핵물질은 앞으로도 수백, 수천, 혹은 수 만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 남아 생명을 위협할 것입니다.
6. 여기서 우리가 살 길은 단 하나, 참 행복의 길에 우리의 욕망을 붙들어 매고, 검소한 삶으로 돌아가 상당한 불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행복에 이르기 위한 길로서 세상이 선전하는 길, 곧 우리가 걸어왔으나 결국 쓴 맛만을 남길 뿐임을 확인한 그 길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미 여기에서 하늘나라를 체험하는 길이요, 자손 대대로 살아야 할 세상에 희망을 주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거쳐 이르신 새 생명은 이 길이 얼마나 큰 진리를 지니고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하고 체험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 길에 들어서면, 우리의 가슴마다에서 <오! 해피 데이>가 메아리쳐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것을 주변 세상에 알림으로써, 썩어가는 세상에 소금이 되고 절망의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이 될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채워서 얻는 행복이 아니라 비워서 얻는 행복"의 길을 깨닫고 이를 삶으로 증언하는 이 시대의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채워서 얻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네.
채워지면 더 큰 것이 갖고 싶어서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니
채워서 얻으려 하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어라.
비워서 얻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어라.
욕심도 욕망도 다 내던져버리면
그 빈자리에 기쁨과 평화가
감사와 만족이 소리 없이 채워지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 했으니
다 비워버리고 가난해져서
주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자.
다 비워버리면 얼마나 홀가분한가?
얼마나 영혼이 맑아지는가?
비우면 주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가 있으니
채워서 행복하려 말고
다 비우고 행복해지자.
조 요안나, <주님은 나의 목자>에서
천주교 전주교구 교구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제주교구]
[군종교구]
“그리스도 우리의 빛”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새 생명으로, 어둠을 빛으로, 불신앙을 신앙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는 기쁨 속에 경축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 그리고 넘치는 희망이, 전후방 각지에서 맡은 바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마태 28,7)
부활 성야에 장엄하게 노래하는 ‘부활 찬송’은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고 구원의 은총을 가져온 우리 주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이 밤은, 불기둥의 빛으로써 죄악의 어둠 몰아낸 밤.
이 밤은, 온 세상 어디서나,
그리스도 신자들을 세속과 온갖 죄악과 죄의 어둠에서 구원하여,
은총으로써 성덕에 뭉쳐 준 밤.
이 밤은, 죽음의 사슬 끊으신 그리스도, 무덤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밤.
오, 참으로 복된 밤, 하늘과 땅이 결합된 밤, 하늘과 인간이 결합된 밤.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인류를 밝게 비추시는 샛별이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은 죽음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명의 확실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며,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 체험하는 좌절과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을 열어줍니다. 또한 ‘불기둥의 빛으로써 죄악의 어둠을 몰아낸’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진실보다 거짓이, 희망보다 절망이 득세하는 듯 보이는 세상의 이치는 물러나게 되며, 이로써 ‘세속과 온갖 죄악과 죄의 어둠’에서 상처 입고 슬퍼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승리자로서 구원되고 은총 안에서 기뻐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하여 아무리 죄의 어둠이 두껍게 세상과 우리를 눌러도, 끝내 빛이 그 모든 어둠을 뚫고 이겨낼 것임을 확신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확실성을 믿는 우리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복음에 따라 언제나 옳은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 삶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와 같은 변화된 삶을 통해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이러한 증거의 삶은 성경과 교회 역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와 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한 첫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이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첫 신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곧 ‘첫 신자공동체의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신자들은 친교, 성체성사의 삶, 기도생활 그리고 공동생활을 통한 공동 소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는 나눔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 생활은 아마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 듯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가르치는 삶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첫 신자들의 아름다운 지향과 노력만은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재물을 포함한 경제생활이 옛날이든 오늘이든 언제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내 것’을 포기하고 ‘서로의 것’으로 하려고 했다는 점은 놀라운 변화의 시도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내 것’을 챙기는 경향이 심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공동 행복에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죄의 근원은 ‘내 것으로 해버리려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루카 9,23)를 늘 기억하고 ‘나를 버리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마태 28,8)
부활을 믿는 사람답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또한 우리 삶의 변화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기쁨과 희망을 나누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들이 크게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알렸고, 제자들 또한 이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했듯이, 우리도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서―어둠 속에서, 절망 속에서, 고통 속에서 허덕이며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에게―부활의 은총과 기쁨을 알려주고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축제의 삶을, 행복한 삶을 살도록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특히 군종교구민 모두는 한마음 한뜻으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있는 가족들과 전후방 각지에서, 소부대 단위에서 소외당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장병들을 찾아 위로하고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바를 나누어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는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2012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서둘러 나선 제자들처럼 부활의 메시지를 생활로써 힘차게 전하며 살아가는 부활의 증거자가 될 것을 결심합시다. 그리고 내 이웃과 형제자매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12년 예수 부활 대축일
천주교 군종교구 교구장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CBCK-
첫댓글 마리지기님 안녕하셔요? 제주교구 강우일주교님 부활메세지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별도로 올릴수도 있을테니까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