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가 오시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바벨론 포로 시절부터 계속 다른 민족과 다른 제국에 의해 시달림을 받고 식민 지배를 받는 상황이 지속되었던 까닭에, 메시아가 오시면 다른 모든 민족과 제국들을 심판하시고,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강대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메시아를 간절히 바라던 중에 침례 요한이 메시아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선지자로 사역하였고, 드디어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침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자신의 이복(異腹) 동생 헤롯 빌립(Herod Phillip)의 아내인 헤로디아(Herodia)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은 것에 대해 헤롯 안디바의 잘못을 지적하자 헤롯 안디바가 침례 요한을 잡아다가 옥에 가둔 것입니다. 이렇게 옥에 갇힌 침례 요한에게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에 대해 보고하자(18절), 침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하게 하여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19절, 20절). 아마 침례 요한도 메시아가 오시면 그 시대의 악한 자들에 대해 심판하시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일으켜 회복하실 것이라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심과 사역을 보았을 때 침례 요한이 기대하는 바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아마도 확인을 위해 “당신이 오시기로 한 그 메시아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이 메시아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 마침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시고, 악귀 들린 자를 고치시고,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21절).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현장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눈으로 목격하였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본 것처럼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며, 못 걷는 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청각장애인들이 듣게 되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22절). 예수님께서 22절에 열거한 그러한 이적(異蹟)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이적들을 예언했던 내용들입니다. 즉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23절). 이 표현은 어떤 장애물로 인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시면서 그러한 장애물에 개의(介意)치 않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온전히 믿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예수님의 행하심을 메시아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으로 인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침례 요한을 비롯하여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침례 요한의 제자들을 향해 그들이 광야로 나가서 침례 요한을 따르게 된 것은 그 시대를 깨우는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면서, 침례 요한은 메시아의 앞에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러 온 선지자가 맞으며, 이러한 침례 요한은 매우 위대한 선지자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24절~28절). 예수님은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본 것이 정확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따르려는 자들이지만(29절), 침례 요한의 침례를 받지 않는 자들은 메시아의 오심이나, 하나님의 진정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지적하십니다(30절). 회개의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개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 불신과 영적 둔감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 대해,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 것과 같다고 빗대어 말씀하십니다(31절, 32절). 32절의 말씀은 그 당시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서 마치 소꿉놀이하듯이 노는 장면을 빗댄 것인데, 아이들이 모여서 혼인 잔치에서 피리를 불며 춤추는 놀이, 장례식에서 곡을 하며 우는 놀이 등을 비유한 것입니다.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며 반응해야 하고, 곡을 하면 함께 울며 반응하는 것이 놀이의 규칙이나 마찬가지인데,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거부(拒否)과 둔감함에 대한 지적입니다. 침례 요한이 와서 금식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귀신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세리를 비롯한 그 당시 죄인처럼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는 자들과 함께하시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둔감하니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때는 외면하고,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셔서 이 땅에 오셨지만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하길 일삼는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결국 이러한 지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만이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35절). 새번역 성경은 35절을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없기에 옳고 그름도 분간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편견, 우리의 선입견으로 하나님을 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때로 진리를 왜곡하거나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편의대로 풀어가면 잘못된 진리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조명(照明)하셔서 깨닫게 하시길 간구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제대로 풀어가야 합니다.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한 진리로 잘 깨닫는 지혜와 은혜를 주옵소서.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