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면서 스승의 날이 있는 달입니다. 특별한 은사 한 분이 계십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을 담당하셨던 조금석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께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오랜 시간 잊고 지냈는데 우연한 기회로 다시 사제의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빛고을노인건강타운에서 시 암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였습니다. 수업 중에 회원들이 앞에 나와서 암송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조 선생님이 나오셔서 노천명 시인의 〈푸른 5월〉을 암송하셨습니다. 시 암송을 너무 잘하셔서 무척 놀랐습니다. 이미 30여 편 외우고 계신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몇 번 수업에서 마주친 후에야 그 암송 잘하시는 남자 회원이 옛 은사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해도 옛 은사 앞에서 시 강의를 하는 게 송구스러웠지요. 선생님은 강사가 제자인 걸 아시고도 개의치 않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업에 빠지지 않고 나오셔서 옛 제자와 회원들을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한번은 선생님이 수업에 나오신 게 송구스러워 “안 나오셔도 괜찮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내 드렸더니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내 주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모인 곳이 그리 흔한가. 그곳이야말로 모두 착한 마음씨 가진 분들의 모임 아닌가. 시를 공부하기 위한 모임이니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앉아만 있어도 흐뭇해. 그래서 나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걸세.”
한번은 회식 자리에서 선생님께 시와 시 암송이 왜 좋은지 여쭸습니다. 선생님은 시의 가치에 대해서 “창조주가 세상을 창조했다면 시인은 세상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진(眞), 선(善), 미(美) 같은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전해 주는 존재이다. 즉 아름답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라고 하시며 “진실하고 따뜻하고 필요한 말만 군더더기 없이 지극히 절제된 언어로 겸손하게 표현하는 예술적, 심미적 가치를 지닌 시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행복〉에 나오는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이란 구절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서의 운동이 지루할 수밖에 없는 데 시 암송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운동을 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이제 100여 편의 시를 암송하시는 팔순에 접어든 선생님은 매일의 복습 덕분인지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셔서 나를 비롯한 회원들을 놀라게 하십니다.
5월이면 조 선생님은 시처럼 아름다운 산문인 피천득 선생의 〈오월〉을 외워 우리에게 감동을 안겨 주십니다. 이 계절에 참 어울리는 글이지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이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중략)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이번 장에서 추천하는 암송 시는 동화작가 정채봉 시인의 〈오늘〉입니다. 시와는 다르게 “오늘도 내가 나를 기쁘게 했네”라고 고백하는 하루 보내기를 바랍니다.
오늘/ 정채봉
풀밭에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 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져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암 송 사 랑/ 안계환(독서경영연구원 대표)
안상헌 씨는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외워 둔다고 한다. 그는 학창 시절 책뿐만 아니라 시를 많이 읽었고 그중에서 좋은 시가 있으면 꼭 외웠다고 한다. 실은 며칠 전에 시 외우기를 한 번 해 봤는데 뭐랄까 외우는 과정 내내 참 좋았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랄까. 좋은 시를 외우는 건 사실 글쓰기 수준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참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흔들릴 때마다 시를 외웠다,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행복한 시 암송(문길섭, 비전과리더십, 2016)’에서 옮겨 적음. (2019.12.02.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