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오미자 농장을 가다
강원도 평창으로 향하는 길은 산을 몇 번이나 넘고 계곡을 따라 굽이친다. 여름과 가을이 맞닿는 계절, 산허리는 짙은 녹음을 두르고 있었고 구름은 봉우리 사이를 천천히 흘렀다. 길가의 바람마저 맑았다. 높은 하늘 아래 펼쳐진 산골 풍경은 도시에서 잊고 지냈던 느린 시간을 되찾게 했다.
평창의 한 오미자 농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초록 잎 사이로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열매였다. 작은 구슬을 한데 엮어 놓은 듯한 오미자는 햇빛을 받을 때마다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열매마다 생명의 윤기가 어려 있었다. 초록과 붉은색이 만들어 내는 대비는 자연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색채였다.
농장은 생각보다 넓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지주를 따라 덩굴이 자라고, 그 사이마다 탐스럽게 익어 가는 오미자가 끝없이 이어졌다. 멀리서는 붉은 폭포가 산기슭을 따라 흘러내리는 듯했고, 가까이에서는 작은 열매 하나하나가 제각기 계절을 품고 있었다.
오미자는 이름 그대로 다섯 가지 맛을 지녔다. 신맛과 단맛, 쓴맛과 짠맛, 그리고 매운맛이 한 열매 안에 함께 깃들어 있다. 처음 들으면 믿기 어렵지만, 실제로 맛을 보면 혀끝에서 차례로 다양한 풍미가 번진다. 자연은 하나의 열매 안에 서로 다른 맛을 담아 인간에게 조화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농장 주인은 붉게 익은 열매를 손으로 조심스레 따 보였다. “오미자는 서두른다고 빨리 익지 않습니다. 햇볕과 바람, 그리고 시간이 함께 키워 줘야 제맛이 납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오래 남았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성급하게 결과를 얻으려 할수록 속은 단단해지지 못한다. 기다림을 견딘 시간만큼 삶도 깊어진다. 수확한 오미자는 커다란 물통에 담겨 여러 차례 깨끗하게 씻긴다. 물 위를 떠다니는 잎과 줄기를 골라내고, 잘 익은 열매만 다시 선별한다. 붉은 열매들이 물결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작은 꽃잎들이 춤추는 풍경 같았다. 농부의 손길은 서두름이 없었다. 좋은 열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정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손끝이 말해 주고 있었다.
세척을 마친 오미자는 청으로 담기거나 건조 과정을 거쳐 차가 된다. 병 속에 차곡차곡 담긴 붉은 열매는 계절을 저장한 보석처럼 빛났다. 겨울날 따뜻한 물 한 잔에 우러나는 붉은 빛은 여름 햇살과 가을 바람이 다시 피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농장 뒤편으로는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구름은 산등성이를 스치고, 바람은 오미자 잎을 흔들며 지나갔다. 자연은 열매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함께 익혀 가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시계가 시간을 알려 주지만, 이곳에서는 햇살과 비, 바람이 시간을 말해 준다.
붉게 익은 오미자를 바라보며 문득 삶을 떠올렸다. 사람의 인생도 한 가지 맛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나를 만든다. 달콤함만 있었다면 깊이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신맛만 있었다면 성장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맛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삶은 향기를 얻는다.
평창의 산바람은 돌아오는 길에도 오래 따라왔다. 자동차 창밖으로 멀어지는 오미자 농장은 여전히 붉은 열매를 품고 있었고, 산은 아무 말 없이 그 시간을 지켜 보고 있었다.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익숙한 삶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일이다. 평창의 오미자는 다섯 가지 맛보다 더 귀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인생의 깊이는 달콤한 순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들이 조화롭게 익어 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