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73]‘솥에서 난 성자聖者’ 박중빈朴重彬
『소태산평전-솥에서 난 성자』(김형수 지음, 문학동네 2016년 펴냄, 459쪽, 16500원)라는 책을 3주에 걸쳐 읽었다. 소태산少太山이 원불교圓佛敎의 창시자 박중빈朴重彬(1891~1943)의 호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원불교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평전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지은이 김형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가 지은 『김남주평전』과 『문익환평전』을 너무 감명깊게 읽은 때문이었다. 그가 쓴 두 권의 평전을 보면서 그의 내공에 많이 놀랐기에, 종교 창시자의 평전은 어떻게 썼을까 궁금하여 서울의 친구에게 한 권 사 보내달라고 했다. 선물한 친구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서평은 아니더래도 한마디 써야 할텐데, 난감하다. 모르는 내용이 너무 많고, 평소 생각지 않았던 분야여서 힘들게 읽었는데, 독파하고 나서도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며칠 끙끙댔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한때는 서간문의 황제이었고, 현재는 생활졸문의 '달인'이 아닌가. 흐흐.
그러다 어제, 갑자기 생각난 책이 판화가 이철수님이 펴낸 연작판화집이어서 급하게 책꽂이를 뒤졌다. 이 책을 내가 왜 샀는지, 아니면 어떻게 내 손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책 제목은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그 봄꽃 소식 해라』(문학동네, 2015년 펴냄, 490쪽)가 그 책으로, 원불교 경전인 <정전正典>과 <대종경大宗經> 내용을 축약하여 판화 200점에 담았다. 오후내내 그 두꺼운 판화책을 보면서, 원불교라는 종교가 내 곁에 바짝 다가왔다. 그 다가옴이 두려울 정도로 실감이 났다. 평론가 김형수도 그러했을 터, 하여 평전에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그는 과욕이었다고 고백하지만, 역시 짱짱했다. 전기작가로 으뜸이다. 평전은 딱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역시 읽기를 잘했다.
백낙청 선생이 짧게 쓴 뒷표지의 내용만 봐도 그렇다. “전기작가의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으니, 그의 문학세계에도 우뚝한 봉우리 하나가 솟은 느낌”이라며 “교단敎團 안팎에서 두루 익힐 역작이다”고 쓰셨다. 역시, 세상은 이렇게 확실하게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백낙청TV>에서 도올과 원불교 교수를 초청, 소태산의 삶과 사상에 대한 말씀을 나누셨구나. 타이틀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라 했다. 그분들의 결론을 보자. “수운(최제우) 선생의 행적은 세상이 깊이 잠든 가운데 첫 새벽의 소식을 먼저 알리신 것이요. 증산(강일순) 선생 행적은 그 다음소식을 알리신 것이며, 대종사(박중빈)께서는 날이 차차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이라고 했다.
시인 안도현의 아주 짧은 추천사 “저기 현대사의 붉은 눈물 한복판을 가로질러 소태산이 온다./날마다 울며 날마다 개벽하며/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오고 있다../소태산이 오고 있는 풍경을 비로소 문자를 세워 그려내다./위대하다.>도 인상 깊다. 날마다 울며, 날마다 개벽하며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오고 있는 딱 한 사람. 지은이 김형수는 맨먼저 문익환목사를 불러 일으켜세우더니 ‘평범한 성자聖者’ 소태산을 문자로 세워 그려냈다. 최근엔 ‘시인이 아닌 전사戰士’ 김남주를 기리고 또 기렸다. 그저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을 잃는다.
아무튼, 소태산 박중빈이라는 성자의 프로필을 약술한다. 1891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치를 궁구하며 구도생활을 하다, 1916년(26세) 어느 신새벽에 동녘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홀연히 우주와 인생의 근본진리를 확연히 깨쳤다. 어떤 경전도 공부한 적 없이 홀로 깨달음을 얻은 후, 불교를 접하면서, 많은 부분(석가모니불의 행적과 말씀)이 자기의 깨달음과 부합되는 바가 많았다고 했다. 하여, 자기의 연원淵源을 불법佛法을 주체로 삼고 완전무결한 큰 회상會上을 이 세상에 건설할 것을 결심하며, 원불교圓佛敎(불법연구회의 후신)를 창시했다. 따라서 1916년은 ‘원기圓紀 1년’이 된다. 서기西紀와 불기佛紀, 단기檀紀는 알아도 원기는 낯설 것이다. 더구나 공기孔紀(공자 탄생한 해)는 어떤가? 서기 2023년은 단기로는 4316년이며, 불기 2567년, 공자 탄생의 해를 가리키는 공기는 2574년이다.
나는 원불교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백지상태이다. 언제 '일원종지一圓宗旨, 사은사요四恩四要, 삼학팔조三學八條' 등의 수수께끼같은 전문 종교용어를 언제 들어봤겠는가. 정전, 대종경, 등 원불교 경전 이름도 처음 들었지만, 개교開敎표어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의 의미는 어쩐지 많이 와 닿는다. 이렇게 멋진 표어는 처음이다. 개교 이후 소태산이 정리한 교리나 제도 등을 보니, 원불교가 왜 4대종교가 되었는지 충분히 알겠다. 생활종교, 실천종교, 민중종교의 다른 이름이라 하겠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도통道通을 한 이후, 내내 조합을 결성하는 등 사회개혁가, 농촌운동가로서 활동했다. 특이하다. 너무 겸손하고 너무 자상하다. 이웃집 아저씨같다. 무슨 질문을 하든, 구어체로 생각할 여지도 없이 쉽게 금방 대답을 한다. 오호라, 군더더기가 하나 없구나. 말이나 글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언행록을 묶은 <대종경> 몇 편을 읽었는데, 공자의 언행록인 고전 <논어論語>를 감히 뺨친다 하겠다. 편편이 어록語錄(analects)인 것을. 종교지도자께 어록이라면 실례가 될 듯하지만 말이다. 일상이 곧 수행의 공간이라며 '테이크 아웃 선'(takeout 禪)을 말씀하는 데야 기가 질린다. 선을 테이크아웃할 수 있다니? 테이크아웃, 얼마나 편리한가> 그 뒤에 곧바로 따라붙는 게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된다)이다. 재색명리財色名利가 무슨 개나발이던가. 얼굴 가난, 학식 가난, 재산 가난은 저 멀리 가라. 어떤 방법으로든 나의 분수에 편안한 '안분安分'이 으뜸일진저.
그러나저러나, 언제나 그렇지만, 하늘은 참 무심하다. 그렇게 힘들게 도통을 했건만, 어찌 그를 쉰셋의 나이에 불러들였단 말인가(1943년 별세?). 쉰셋이면 오늘날 요절이다. 살면서 참 이상한 일도 많지만, 나는 이런 일을 언제나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그렇게나 빨리 불러들인 것을 비롯해서 말이다. 200번을 읽어도 부족한 ‘인생독본’ 논어는 온통 한문문장이라 어렵고 해석도 각각이지만, 대종경의 숱한 말씀들은 쉬워도 너무 쉽다. 가방끈이 짧아도 상관없다. 원래가 감동을 잘 하는 순진한 성격이지만, 대종경(총 15품 547장이라 한다)을 보고 거듭 놀라고 감탄했다. 장차 신자가 될지는 모르지만(불길한 예감?), 당분간 머리맡에 두고 손때를 묻힐 것을 다짐했다. 스님들이 수도 끝에 도를 깨치며 하는 말씀이 오도송悟道頌일 터인데, 소태산의 '오도송'을 보시라. '청풍월상시淸風月上時 만상자연명萬像自然明'이다. 맑은 바람이 불고 동산에 달이 떠오르니, 삼라만상의 자연이 환해지도다' 멋지다! 선지식이 따로 있을 것인가?
이 땅에 태어난 ‘평범한 성자’들은 이러한 종교지도자, 종교인들 아니고도 쌔고 쌨다. 어찌 백 수명, 천 수명도 더 되는 그분들의 존함을 불러댈 필요가 있겠는가. 평범한 성자가 있는가 하면, 정치와 사회를 바꾸어보자고 일생을 건 민주와 통일의 투사들은 또 무릇 기하였으랴. 지금도 당연히 그러한 사람은 곳곳에 있다. 그들이 있기에 '뒤죽박죽 세상'은 그래도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하늘사람은 욕심이 담박하고 생각이 고상하여 맑은 기운이 차고 넘친다. 반면에 땅사람은 욕심이 가득하고 생각이 비열하며 탁한 기운으로 가득하다”고 말이다. 덧붙이는 말씀도 상기하자. “누구를 막론하고 다 각기 마음을 반성하여 보면, 자기는 어느 사람이며, 장차 어찌 될 것을 알 수 있으리라”. 하늘사람이 되고 싶은가? 땅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 글에서 어느 특정 종교를 전파할 이유나 까닭은 조금도 없다. 단지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민족종교로 내세울 수 있는 종교지도자의 삶과 사상을 보고 배울 것이 너무 많다는 것, 거기에서 삶의 교훈을 얻자는 취지로 관련 책들을 꼼꼼히 읽었을 뿐이니, 오해는 마시라.
아아-, 아주 심플한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보자. 이 동그라미를 원불교가 내세우는 ‘일원상一圓上’으로 보면, 이렇게나 심오한 철학이 숨어 있거늘.사랑을 뜻하는 하트 표시 대신, 누그를 만나든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면 어떨까? 나이든, 성별이든, 어떤 장르든 상관없이 한없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고 행복일 것인가? 역사도 배워야 하고, 문학도, 예술도, 사랑도, 종교도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라오따오쉬에, 이른바 ‘노도학老到學’이다.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소태산평전』 저자 김형수는 에필로그에서 “이 평전을 쓰게 된 건 순전히 거리에 가득찬 ‘숱한 오늘들’ 때문이었다”고 썼다. ‘숱한 오늘들’이 문제이다. 숱한 오늘들은 무엇을 말함인가? 후천개벽사상은 또 무엇인가? 모두 고맙고 감사하다.
후기: 이 졸문을 쓴 게 그제(수요일)인데, 정읍에 사시는 아는 형님이 정말로 '원불교 경전'을 곧바로 보내줘, 어제(목요일) 받았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으랴. 그 형님의 성의를 봐서라도 '대종경'만큼은 정독할 것을 다짐하다. 천도교의 '동경대전'도 아니고, 공자의 '사서삼경'도 아닌 것이, 한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고 순우리말, 한글로 경전이 되어 있으니, 이 아니 반가우랴. 제자들의 물음에 답하기는 공자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경전은 무엇이든 케이스별로 쉽게 곧바로 얘기를 하는 게 아닌가. 대종사가 인생상담소장같다. 빨리 겨울이 되면 좋겠다. 이 경전을 읽으면, 원불교 교당에 나가 종교활동을 하고 싶을까, 그것은 모를 일이지만, '평범한 성자' 박중빈 선생의 말씀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