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68
4월22일[부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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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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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wP4Wu6YiZY
(이나라 사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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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초대 교회 문제는 곧 우리 공동체의 문제!>
예수님께서 이끄시던 제자 공동체의 균열과 나약함도 컸지만, 사도들이 이끌던 초대교회공동체도 다양한 문제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와 똑같습니다. 헬라계 그리스도인 홀대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절은 “제자들의 무리가 늘어나게 되자 헬라계 사람들이 히브리계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과부들이 매일의 배급 봉사에서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전합니다.
사실 먹는 것은 우리 일상생활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아무리 초대 교회 신자들이었다고 할지라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는 것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부류의 사람들이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 식탐이 꽤나 많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엄청 웃깁니다. 먹는 걸로 자주 상처받고 삐치고 그런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은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어져, 누가 많이 먹든, 적게 먹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지는 것이 화려하든 초라하든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누가 맛있는 반찬 왕창 집어가면, 그걸 못 참고, 너만 먹냐? 우리는 뭐 먹으라고? 하며 따졌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식량 배급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 앞에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사도들의 신속하고 구체적인 대응입니다. 사도들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평판이 좋고 영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에게 매일의 배급 봉사를 맡기려고 사람을 뽑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도들이 문제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과 책임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지니고 있었던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사도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것은 오늘 우리 공동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문제는 곧 오늘 우리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커다란 도전과 문제 앞에서 세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되풀이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① 무한한 인내와 용서
② 끊임없는 대화와 의견수렴
③ 때로 단호한 조치
사도들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이제 성령의 은총으로 지혜를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사람만 좋은 게 아니라 초대 교회 신자들의 성화를 위해 갖은 고민을 한 결과 이제 밀당도 할 줄 알고, 강약조절도 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바람직한 공동체 건설을 위해 참으로 필요한 노력이 틀림없습니다. 때로 무한한 인내와 용서를 베풀고 끊임없는 대화와 의견 수렴도 행했지만, 아니다 싶은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지만 가차없는 단호한 결정도 내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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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FfoGmQDm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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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영하는 마음과 잠을 청하는 마음은 같다>
저는 성체를 영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을 먹이시고 이어 오늘 복음처럼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이 이야기 다음에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성체성사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와 같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40년을 버틸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체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가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바로 모든 어려움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은 마치 풍랑 가운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처럼 두렵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남도 처음엔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걱정, 근심, 두려움, 염려를 당신만 받아들이면 사라지게 하시는 분으로 오십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을 때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는 곳에 가 닿았다고 말합니다. 더는 큰 바람이 일으키는 큰 물결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오며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과 근심은 내가 죽어야만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나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해주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십니다. 성체는 그렇게 내가 죽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지게 하는 효과를 줍니다.
저는 성체를 영하는 이 순간이 ‘잠’을 자기 전의 기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잠은 상당한 모험입니다. 잠은 죽음과 가장 가깝습니다. 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을 청할 때마다 두려움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잠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날 상쾌한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힘 있게 하루를 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잠에 관한 두 개의 영화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나는 ‘슬리핑 뷰티(Sleeping Beauty)’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루시는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입니다. 아무리 죽도록 일을 해도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월세도 못 낼 정도입니다. 그런데 고액 알바가 들어옵니다. 그냥 수면제를 먹고 한숨 자고 나오면 됩니다. 신체의 어떤 손상도 입지 않습니다. 그녀는 점점 부유해집니다. 그러나 어떤 알바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자신이 잠잘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봅니다.
알고 봤더니 돈은 많지만 잠이 오지 않는 노인들이 자신 옆에서 잠을 청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노인들은 삶의 허무함을 느끼고 불안하여 잠이 오지 않습니다. 구약의 다윗도 젊은 여인을 옆에 두고 잠을 청했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떤 노인들은 그녀 옆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잠이 곧 죽음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잠을 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모험을 하려면 자신을 언제나 받아줄 것만 같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노인들은 잠자는 젊은 여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영화는 ‘세븐 파운즈(Seven Pounds)’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7명의 가족과 애인을 잃게 됩니다. 잠도 안 오고 두려워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 때문에 생명을 빼앗긴 사람이 일곱이니 자신도 일곱 명에게 새 생명을 주기로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심장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심장을 내어주며 편안히 죽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잠이 들기 전에 내 죽음을 책임져 줄 누군가를 원합니다. 위 영화에서는 자신을 받아줄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잠 자기 두려운 것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면 물에 빠질 염려가 없습니다. 그분은 죽음이라는 물 위를 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죄책감’ 없이 죽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세븐 파운즈에서는 일곱 명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며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역할을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성체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해서가 다니라 그분이 의로우셔서 우리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과 죄책감을 성체로 해결하면 우리는 편하게 잘 수 있고 편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진정한 목적지입니다. 결국 우리 모든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편하게 잠들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 안에 성체로 들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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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선종(善終)은 "선종(善終)"이란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라는 말의 준말로, 서거를 뜻하는 교회의 용어입니다.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란 일상생활에서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살다가 복되고 거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올바른 길을 가야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종이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병중에 있다가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른 죽음은 선종입니다. 저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께서는 식사 잘 하시고 주무시다가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2달 정도 아프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1년 정도 아프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의 순간과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 선종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기 위해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삶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모두가 다를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도 모두가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았다면 선종입니다.
수녀님께서 경험했던 할머니의 죽음을 읽었습니다. 수녀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84세인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너희들은 항상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형제들 간에 우애 깊게 지내 거라. 나는 오늘 밤 자정에 하느님 곁으로 가니 잘들 지내라. 지금 가는 화장실이 마지막이 될 것 같구나.’ 건강하신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니 ‘할머니의 덕담이 또 시작 되었나 보다.’ 생각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있던 자명종 벽시계가 ‘땡’하고 울리는 순간 약속이나 한 듯이 가족들은 할머니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수의 옷을 곱게 갈아입고 누우신 상태에서 묵주를 손에 드시고 마지막 숨을 내쉬시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일이 사실임에도 가족들은 죽음의 시간을 예고하고 수의를 스스로 갈아입고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놀라워서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단호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할머니께서는 지금 착한 죽음을 맞이하시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으니, 할머니께서 바치시던 묵주기도를 우리가 바쳐드리자.’ 하시며 묵주기도를 읊으셨고, 가족들은 할머니 주변에 둘러앉아 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선종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종은 일상의 삶에서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으로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던 삶의 현장입니다. 그곳에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저에게 갈릴래아는 매주 신문이 만들어지는 신문사입니다. 저에게 갈릴래아는 매주 미사를 봉헌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입니다. 저에게 갈릴래아는 동북부 엠이 모임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부활의 표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다리는 선종이 아닌 살아가는 선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의 표징을 간결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쁠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중에도, 시련 중에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만 감사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때가 찾아와도, 병이 찾아와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동차의 기름과 같습니다.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기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사도들은 선종을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드리고, 늘 기도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선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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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16-21: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빵의 기적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태워 카파르나움으로 가게 하시고는 당신은 산으로 피하시어 늦도록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배를 타고 떠나간 것처럼 보이게 하여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려고 제자들에게 먼저 떠나라고 하신다. 배를 타고 갈 때, 그 상황이 제자들을 더욱 절박하게 한다. 파도치는 물결 위에 연기처럼 떠 있는 너무나도 캄캄한 밤은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배를 어디로 저어가야 할지 몰랐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을 일으켜 높은 파도가 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17절) 그들의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은 사나운 폭풍 속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상황은 적어도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분의 거룩한 법에서 떠난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밟고 인간의 모든 교만을 내리누르며 물 위를 걸어오신다. 교회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가며 이러한 일은 계속될 것이다. 재난이 찾아오고 이런 일이 많아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파도를 밟고 건너오신다. 그러나 너무 어려움이 커서 끝까지 견뎌내려 노력하는 이들마저 자기가 이겨내지 못할까 하여 두려워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 복음과 성경을 통해 답을 찾아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럴 때 예기치 않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구해 주신다. 당신의 권능으로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0절)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은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고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기대 이상의 것을 실현하게 해 주시는 힘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다.”하시며 귀에 익은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2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적을 똑똑히 보도록 배 위에 오르시지 않고 물 위를 걸으셨다. 제자들이 그분을 배에 모시려고 하는 동안 놀라운 속도로 배와 주님께서 모두 뭍에 닿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이미 목적지에 닿았다고 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중에서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믿고 의탁할 때, “어느새”(21절) 바람이 걷히고 목적지에 닿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풍랑을 만난 제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파의 난관, 박해자의 손길, 그 안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아가야 하겠다. 그분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려 노력하는 삶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는 우리,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항상 목적지에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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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9-2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사도들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고(33절-35절),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현장에서 모든 일을 직접 목격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성모 마리아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9,25), 엠마오의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클레오파스’와 요한복음에 있는 ‘클로파스’는 동일 인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엠마오의 두 제자는 클레오파스와 그의 아내입니다.>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간 때는,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천사가 전해 준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예수님께서 아직 신자들과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은 때였습니다.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의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하고 술렁거리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아직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 입장에서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던 상황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일을 사도들에게 전한 때는 엠마오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난 뒤였을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와 사람들의 심정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면,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엠마오로 가는 길을 ‘그릇된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집에 가자고 생각하고서 집으로 돌아간 일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 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원래의 인생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뿐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 사도들은 모두 달아났고, 공동체도 흩어졌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태 26,31)
그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일은, 흩어진 공동체를 ‘복구’하기 위한 일, 즉 원래의 인생으로 되돌아갔거나 되돌아가려는 신앙인들을 하나씩 불러 모으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도’ 나타나셨다고 증언했습니다.(1코린 15,5-6)
따라서 엠마오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일은, 두 제자만 체험한 일이 아니라, 당시의 신자들이 모두 체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인데, 교회가 교회로서 본격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과 그 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갖게 된 때부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 체험과 확신을 바탕으로 한 종교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25절-27절) 메시아의 수난, 죽음, 부활을 이해했고,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눈에 보이면 좋고 안 보여도 상관없는 신앙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예수님의 부활을,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증언하게 됩니다.
그 체험과 확신과 증언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각자 나름대로 어떤 체험을 하고, 확신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체험과 확신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좀 서툴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변함이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 자체가 훌륭한 증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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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수원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 교수)]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에 관한 이야기를 부활 제3주일의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루카가 전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를 듣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부활 증인’입니다.
주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한 날에(24,1-12 참조)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약 1.1km)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걸어갔던 그 길은 ‘그릇된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어야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장소로,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실 터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여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입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시고 나란히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때는 그분께서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올바른 길’로 돌아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피하려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걷는 길 위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수난과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그릇된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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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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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도행전 저자는 공동체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히브리계와 그리스계 유대인들의 신자들 사이에 시비와 불평이 일어난 공동체의 한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이방인인 그리스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히브리계 유다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그 문제의 발단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는데 홀대를 받는 데 있었습니다.
교회의 고유 사명은 바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인데 공동체가 큰 조직이 되다보니까 말씀의 선포와 공동체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식탁 봉사를 할 수 있는 봉사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식탁 봉사’라고 하겠지만 지금로 말하면 사회복지 차원의 일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말씀의 선포의 소명을 맡고 있는 사도들이 ‘식탁의 봉사’까지 맡는다는 것은 무리이기에 그들은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내세워 안수를 하고 공동체의 봉사자로 세웁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행전 6장 4절)라고 말한 대로 복음 선포에 전념하고 식탁의 봉사자들은 사람 관계와 살림을 하기때문에 공동체는 날로 성장합니다. 이런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 불가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1)
교회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거룩하지만 그 구성원은 죄인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지만 또한 그 안에 갈등도 있고 분열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함께 해 주셔서 인간이 한계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신 후에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그분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그들을 피해서 조용한 곳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그 자리에 계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향합니다.
큰 바람이 일어 큰 물결이 일어나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싸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 출신들이라 배의 생활에 익숙하더라도 어두움과 풍랑 앞에서는 두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더군다나 어두운데 물 위를 걸어오는 정체불명의 모습을 보고 그 두려움은 더 컸던 것입니다.2)
어두움에서 걸어오시는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복음 6장 20절) 제자들은 스승을 알아보고 배 안으로 모셔 들이는데 배는 이미 카파르타움에 닿았습니다.
제자들이 다가오시는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움에 싸여 있듯, 우리도 같은 상황을 겪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두운 물 위를 걸어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다가서시며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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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 불가(佛家)에서도 이 비슷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말에 이래도 저래도 안 되는 막다른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이판사판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그 말의 유래는 불가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그 뜻에는 수도하는 스님을 일컬어 ‘이판(理判)’이라했고. 절 살림과 재산, 행정을 맡은 스님을 ‘사판(事判)’이라고 했다. 불가의 구분하는 이 말이 오늘처럼 전혀 다른 뜻으로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정의하기가 어렵다.
2)
요한복음은 시간을 밝히지 않았지만 마태오와 마르코는 이튿날 새벽녘이라고 설명한다. (마태 14,25; 마르 6,48)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그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고 했는데 요한은 이 부분이 생략되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로 다가 오셔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거리에 대한 설명이 없는데 제자들이 바람을 만나 고생하다가 스승을 만나 카파르나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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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삶의 풍랑에 개입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십니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요한복음 6장 17절)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의 부재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요한 복음 6장 18절)
물 일에 익숙한 제자들이 큰 바람을 예견 못하고 배에 오릅니다. 천재지변에 의한 환경적 어려움을 맞닥뜨린 것이 오늘 제자들을 뒤흔든 첫째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요한복음 6장 19절)
두 번째 두려움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옵니다. 사람이 물과 관계하는 방식은 물에 잠기거나 헤엄치거나 둘 중 하나니까요. 체험했든 전해 들었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월적으로 보면 신비일 테지만 기괴하게 보면 유령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복음 6장 20절) 예수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계시의 말씀으로 제자들이 겪는 두려움을 없애 주십니다.
"주님의 소리가 물 위에 머물고 ... 주님께서 크나큰 물 위에 계시네."(시편 29장 3절)라는 시편 작가의 고백처럼, 물 위를 걸어 호수의 성난 힘 위에 우뚝 서신 분께서 말씀으로 제자들의 내적 동요까지 가라앉혀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의 부재가 그분 현존의 권능과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여정이 되기도 하지요. 없어 보아야, 잃어 보아야 현존의 행복을 알 수 있으니까요.
영성 생활에서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주님의 부재 상황이 우리를 갈증과 두려움으로 삼켜 버리게 허락하지 않으려면,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 성난 힘 위를 당당히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리라는 믿음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 안에 직무가 분화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6장 1절)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따르며 유다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선 이들 안에 갈등과 소요가 생겨납니다. 아무리 뜨거운 마음과 선의로 시작한 길이어도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도 새어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들이 느낀 차별과 불공정은 공동체의 수치스런 흠집이 아니라, 개선하여 더 나아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오늘의 독서 대목은 사도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이를 잘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사도행전 6장 4절)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소명을 지키면서, 다른 선량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봉사의 직무로 초대합니다.
주님의 지체가 저마다 받은 모든 소명이 소중하고 가치로우며, 사람들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참여함을 한 걸음씩 익혀 나가는 여정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세상 안이든 교회 안이든 왜 불일치와 갈등이 없겠습니까. 그런 고통과 어려움의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귀 기울이고 지혜를 모아 찾아 나가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잠시의 혼돈을 넘어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라나"(사도행전 6장 7절)는 놀라운 체험까지 덤으로 받을 겁니다. 교회는 넘실거리는 어둠의 물 위를 항해하는 배입니다. 우리는 그 배 안에서 외부적 어둠과 바람과 파도는 물론, 내부적 갈등과 충돌의 아픔까지 떠안고 가야 하지요.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분 몸의 지체인 서로를 믿고 기다려 주며 무지와 의혹의 밤바다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등대와 같은 위로이고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예수님 목소리에 위로와 힘을 받는 오늘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뒤흔드는 문제들을 바로 그 예수님께서 압도해 짓밟으시며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이 여정을 통과하면서 "배는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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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온 힘을 다한 것으로 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파르나움으로 떠났고 어둠이 짙어졌을 때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 없이는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들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면 두려움이 사라져버립니다. 그 순간 이미 뭍에 발을 딛게 됩니다.
이 상황은 우리 인생 항로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바람과 큰 물결은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보충할 수 있는 단련과 정화를 위한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고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비바람이 지나간 뒤에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무지개입니다. 주님은 큰 바람, 돌풍이 없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돌풍 안에서도 두렵지 않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풍랑에 굴복하지 말고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 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십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도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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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쉼 없이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정신없이 바쁩니다. 조금 쉬면서 일하라고 하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삶을 즐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삶의 여유가 생겼을 때 즐겼던 것보다, 삶이 고단할 때 마주한 아름다움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시간이 더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멈췄지만, 그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꼭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출발 전까지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제가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지순례를 다녀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지순례를 통해 얻은 힘으로 더 열심히 그리고 힘차게 살 수 있었습니다.
삶이 고단할 때 오히려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나의 삶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드는 시간임을 깨달을 때 지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여유’가 지치지 않는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열정적인 삶을 만듭니다.
우리의 삶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신 하느님이셨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보시니 참 좋은’ 참이 될 수 있을까요? “힘들어, 어려워”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고단하게 만드는 삶이 아닙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드는 삶이어야 좋은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유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지금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을 찾고 그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이 나의 주님이며, 이웃이 나의 주님이며,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주님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어디서도 누리지 못했던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둠 속에서 작은 배에 탄 채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 모습에 제자들은 주님이 아닌 유령인 줄 알고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 상황이 지금의 우리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센 바람과 높은 물결과 같은 고통과 시련으로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다가와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움 속에 빠질 뿐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 뵙고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하려는 마음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을까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에만 집착하며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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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내시는 분>
요한 6,16-21 (물 위를 걸으시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길을 내시는 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시공간조차도
그분께서
나에게 오심을
막을 수 없으니
길이 있어
그분께서
나에게 오심 아니요
그분께서
나에게 오심으로써
길이 나기 때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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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안전하게 하느님께 가는 공동체>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오늘 제자들 공동체는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어찌 주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들끼리 출발합니까? 주님 없이 가면 어디로 갈까요? 제대로 갈 수 있을까요?
제자들 공동체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주님을 모셔 들여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볼 수 있듯이 주님께서 늦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배에 모셔 들이려고 했을 뿐인데도 제자들의 배는 이내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이 풍파를 만난 것은 어쩌면 자중지란, 곧 외부 풍파가 아니라 내부 풍파일지도 모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고 하듯 말입니다.
구심점인 선장이 없으면 이리 가야 한다는 사람과 저리 가야 한다는 사람으로 배가 표류하고 심지어 산으로 올라가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께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느님께 가는 길을 제일 잘 아시는 주님을 모셔 들여야, 아니,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께 가는 길이신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안전하게 하느님께 가고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기도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걱정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의논하거나 기도하지 않고 불평하고 싸움이나 하는 공동체가 아니어야 함은 물론이고,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 공동체가 안전하게 하느님께 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초대 공동체처럼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사람들을 잘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속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오늘 초대교회 부제들처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속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은 우리 공동체를 세속적으로 이끌 것이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야 공동체가 영성적 공동체가 되도록 이끌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성적 공동체는 율법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를 이끌 봉사자들은 아무리 열심한 사람일지라도 주님께서 그토록 나무라신 율법 학자와 같은 사람이어선 안 될 것입니다.
차라리 덜 열심하더라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 낫고, 어수룩한 구석이 많아도 겸손한 사람이 낫고, 그러면서도 오늘 봉사자들처럼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지적으로 똑똑한 사람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식별할 줄 알고, 우리 공동체가 영적 공동체가 되기 위해 늘 영적으로 식별할 줄 알며, 거짓 열성과 성령에 이끌리는 열성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 없이 떠나는 공동체입니까? 초대교회 공동체입니까? 우리 공동체는 초대교회처럼 기도하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인간적으로 근심하고, 의논하고, 그러다 다투기나 하는 공동체입니까?
더 중요한 것, 나는 공동체를 위해 종종 기도합니까? 아니면 불평을 더 많이 합니까? 내가 공동체 봉사자라면 어떤 봉사자입니까? 영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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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온갖 두려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없이 호수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제자들 얘기인데, 올해는 다른 주제로도 묵상할 수 있지만, 우리의 두려움에 대해서 묵상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이란 무엇이고 어떤 두려움이 있으며, 왜 있는지 뭐 이런 것들에 대한 묵상이지요.
두려움이란 '위협이나 위험을 느껴 마음이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느낌'이라는 사전적 정의도 있지만 제 생각에 내가 싫어하는 것이 내게 닥칠까? 꺼리는 극도의 부정적이고 불안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에게 나병 환자는 만나게 될까 두려운 존재였지요. 그러니까 웬만큼 싫어하면 두려울 것까지 없지만 너무 싫어하면 싫어하는 일이 내게 닥치거나 그런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하지요.
그런데 그 싫어하는 것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두려움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첫째는 존재적인 두려움입니다. 존재적인 두려움이란 존재의 안위와 생사와 관련한 두려움입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은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말끝마다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늙으면 죽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죽는 걸 두려워하기 마련이고, 같은 맥락에서 병고를 두려워하고 요즘 같으면 코로나를 두려워합니다.
둘째는 일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성공하길 바라고, 특히 남자들은 일의 성공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끼는데, 그만큼 일의 실패나 좌절이 두려워 자기 전부를 걸다시피 하고, 반대로 실패할까 봐 아예 일을 벌이지도 않거나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도 하지요.
셋째는 관계적인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립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관계의 단절이나 이별을 두려워하고, 심지어 거절이 두려워 부탁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넷째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밤에 두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밤이 볼 수 없게 하고 알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같고, 모르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종합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필이면 어두운 밤에 길을 떠납니다. 풍랑이 일어 몽땅 죽을 지경입니다. 갖은 애를 써도 헛수고이고 그래서 기진맥진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나타나시는데 바다 위를 걸어오시니 유령 같습니다. 낮이면 주님인 줄 금세 알아챘겠지만 밤이어서 그리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자 배는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다다르고 제자들의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고 같이 계시면 두려움은 즉시 사라지며 우리는 목적지에도 어느새 도달케 됩니다. 주님 없이 길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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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언제나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33,18)
“나다.” 참 정다운 우리말이자 오늘 복음에서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알게 되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은 바로 “나다(I AM)”인분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탈출기3장14절에서 모세에게 하느님 자신이 밝힌 이름이기도 합니다.
“나다.”란 말을 맨처음 들은 것은 약50년전 제가 20대 청년 교사 시절 1970년대 중반 흥사단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김동길 박사에게 들었습니다. 당시 20대 젊은이들의 진리를 찾는, 민주화를 향한 열정은 참 뜨거웠습니다. 김박사님 말고도 함석헌 선생님, 안병욱 교수님, 김형석 교수님, 안병무 박사님등 많은 기라성같은 저명 민주운동인사들과 민중신학자들의 강연을 즐겨 들었고, 법정스님의 책은 모조리 구입해 읽었으며 많은 분들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또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와 '사상계' 잡지', 함석헌 옹의 '씨알의 소리', 안병무 박사의 '현존'을 챙겨 읽었고, 독일의 저항신학자 본훼퍼의 '옥중서간'도 애독했습니다. 또 초등학교 제자들에게는 생일때 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눈속에서의 3개월','어린왕자' 등 다양한 명작을 선물했습니다.
김동길 박사님의 설명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아버지가 밤 늦게 집에 돌아오셨을 때 대문을 두드리면, 아들이 방에서 듣고 나와서 “누구세요?” 물으면 “나다.” 대답할 것이고, 이때 아들은 저절로 아버지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에게 “나가 누구냐?”고 묻는 아들이 어디있겠는지요.
바로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구는 2012년에 세워진 저희 요셉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성심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로 수도원을 찾는 많은 이들이 위로와 평화를 얻는 성구이기도 합니다. 예나 이제나 두려움에 포위되어 사는 사람들같습니다. 성경에도 무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가 무려 365회 나오는데 하루하루 날마다 상기하라는 것이겠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밤중 물위를 걸어오던 예수님께서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어났을 때 두려움에 떠는 배안에 있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오늘 인생 항해 중인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이겠습니다. “나다(I AM)”란 하느님 이름이 은혜롭습니다. 늘 반복해 들어도 새롭습니다. “나다(I AM)”를 보강하여 다음같이 쓰면 완벽해집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바로 하느님은, 부활하여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성구도 이를 입증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이런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해서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한후 광적으로 몰려드는 군중을 피해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산으로 물러가셨고,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목적지를 향해 항해 도중이었습니다. 서른 스타디온은 5km 정도 거리로 갈릴리 호수의 절반 거리에 해당됩니다. 호수라 하지만 호수 한복판에서는 바다처럼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호수 한복판에서 한밤중 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드높아 질 때 제자들의 두려움도 점점 커졌을 상황에서 유령처럼 자기들을 향하여 걸어오는 이가 있었으니 제자들은 참 무섭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들려온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다정한 말씀은 얼마나 위로와 평화가 되었겠는지요! 주님은 멀리서도 기도중에 제자들의 곤경을 환히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삼 두려움에 대한 근본 처방은 주님의 이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함께 할 때 두려움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인생 항해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살다보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지요. 바로 이럴 때 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언제나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음성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시편 23장에 나오는 모두가 좋아하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1절 말씀도 기도로 바치면 좋겠습니다. 말마디를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불안할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무서울 것 없어라.”로 바꿔 고백기도로 바쳐도 좋겠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혼자든 함께 든 여기 수도자들처럼 늘 시편 성무일도를 습관화하여 평생 날마다 규칙적으로 바칠 때 늘 주님 현존 의식 중에 빛속에 살 수 있을 것이며 두려움의 어둠도 걷힐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이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순식간 목적지에 가 닿았으니 그대로 기적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 온 뒤안 길을 보면 어느새 여기까지 와있나 놀랄 때가 있을 것이며, 순간 주님은 늘 함께 해 오셨음을 은혜로이 깨닫기도 할 것입니다. 제가 여기 요셉 수도원에 1988년 7월11일부터 정주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35년 공동체 배안에 몸담고 인생항해여정중인데 살아온 35년이 순간 같으며 그동안 주님께서 늘 함께 해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대로 인생항해여정중인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흡사 제자들의 공동체란 배가 분열의 위기에 처한 불안한 분위기입니다. 바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렸으니 그들의 과부들이 배급을 받을 때 홀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분열만큼 큰 해악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일치를 꾀하나 사탄을 분열을 꾀합니다. 바로 공동체를, 내 자신을 분열시키는 죄입니다. 외적의 침략이 없어도 내적으로 분열하면 저절로 망합니다. 바로 우리나라가 극히 경계해야 할 사항입니다. 내적 분열로 인한 혐오와 증오가 도를 넘었고 대립과 갈등이 너무나 격화되어 있습니다.
밖의 적과 대결하기도 역부족인데 내적분열로 서로가 적이 되면 이보다 어리석고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한국이란 공동체의 배가 안전 항해 할 수 있도록 각별히 다양성의 일치에 유념하며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사도행전의 열두 사도의 리더십이 빛납니다. 이런 지혜로운 처방은 순전히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식탁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사도들은 참으로 지혜롭게,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여 신속하게 우선 순위를 확실히 하고 역할 분담으로 공동체의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여 일치를 이룹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니 이제 탄탄대로의 인생항해 여정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입니다. 여전히 계속될 어려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인생항해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의 경우 요셉 수도원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35년간 인생 항해 여정중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은 미사와 강론을 통한 주님의 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됐음을 은혜로이 깨닫습니다.
"주님, 우리가 당신께 바랐던 그대로, 어여삐 여기심을 우리 위에 내리소서."(시편33,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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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오늘 복음(요한6,16-21)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가파르나움으로 떠납니다. 때는 밤이었고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십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두려워하자,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밤과 큰 바람 그리고 예수님!>
어두운 밤과 호수 위에서 만난 큰 바람은 악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큰 바람이 일고 있는 물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7년에 개봉된 '오두막'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 막내 딸 미시가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오두막에서 살해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맥은 큰 슬픔과 증오에 빠지게 되고, 죽음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영화의 결정적 장면은 그런 맥이 어둠과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하는 모습입니다. 그 부활의 중심에 임마누엘이신 주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시며, 맥의 손을 잡고 함께 물 위를 뛰어가시는 모습이 큰 인상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생의 험한 여정에서 예수님과 분리되면, 곧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멀어지게 되면 영적인 어둠과 죽음 속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 어둠과 죽음에서 해방되는 길은 다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해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친 호수 위에서 만난 어둠과 죽음의 공포는 예수님을 만나고 받아들임으로써 끝이 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손을 꼭 잡고 힘차게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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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45c248BT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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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 6, 21)
신앙은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이를 먹고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우리들 내면의
풍경이
바로 풍랑입니다.
뜨거운 심장만큼
뜨거운 믿음이
필요한 우리의
삶입니다.
거센 풍랑의
시간 없이
풍요로운 믿음에
이를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밤에도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믿음을 사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하시듯
호수 위를 걸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믿음 안에서는
폭풍도
축복이 됩니다.
풍랑 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깨끗하여 지는
순간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
탈출기의
서막입니다.
역사의 시작은
어둠을 극복하고
시련을 극복하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찔리고
아파하며
우리의 믿음은
탈출기의 믿음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를
묻는 새로운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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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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