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어떤 사람들도 슬픔은 핥지 않았다 / 김건영
나무는 자라서 집이 된다는데 새들이 찾아오지 말라고 목매단 새들을 걸어 놓은 걸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에 사람을 이끌어 경고하기도 한다고 어디에서 들었더라 목이 막혀서 기억이 덜컥거린다
집보다 사람이 더 싸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거야 무너지는 게 있어서 그래요 무너지는 게
깊은 숲속에 소금을 핥으러 다닌다는 사슴이 우리나라에 있나 나비도 소금이 필요하다는 걸 백과에서 읽었다
암염(巖鹽)이라, 기억나지 않은 기억만큼 단단한 게 또 있을까 암염(暗炎)이라 그래 숲속은 어둡지 빛나는 눈이 보이면 짐승이 있다는 말이지 동물이 좋니 곤충이 좋니 어쨌든 우리가 사람은 아니잖아
눈을 감고 들어가 보면 전세(傳貰)가 보인다
저 집은 어떻게 지었을까 높고 깊은 곳에 지은 집을 보며 말하는 사람이 있다 돌을 이고 지고 거기까지 갔을까 집을 이고 가지는 못하니 집은 무겁고 비싸 무겁고 비싸다 그러니 사람은 절벽을 이고 동물적으로 가벼워져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 사슴들이 달려와 냄새를 맡고 고개를 젓는다 눈물 같은 닭똥이네
- 시집 『널』 (파란, 2024.08)
* 김건영 시인 1982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예술대 미디어창작부 졸업 시집 『파이』 『널』 2019년 박인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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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필요한 세 가지가 ‘의·식·주’라고 말합니다. 입고·먹고·사는(자는) 것의 중요성은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 세 가지 요소의 순위를 매긴다면 어떨까요? ‘순위를 매기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으나, 모든 것에는 순위가 있습니다. 올림픽만 봐도 그러하죠. 참가보다는 메달이, 그중에서 금메달이 가장 중요하게 대접받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식’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볼 것입니다. 날씨만 괜찮다면 집이 없거나 발가벗고는 살아도 음식 없이는 못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평양의 무인도에 고립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은 물을 포함한 음식입니다. 그래서 ‘의·식·주’중에 음식이 가장 앞선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위에서 설명한 ‘의·식·주’의 중요성은 생활보다는 ‘생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요 ‘의·식·주’에서의 ‘식(食)’도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일 뿐입니다. 옷이나 집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의복과 집이면 조건을 만족할 수 있죠. 이러한 관점에서만 보면, 우리의 다수는 ‘의·식·주’를 충족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것만으로 만족하실 수 있나요?
시에서 화자는 말합니다. ‘집보다 사람이 더 싸다고 말한다’라고요. 그런데 이 말에 화자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말은 왜 하는 거야’라고 맞장구를 칩니다. 당연한 말이라는 발화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이 말을 부정하지 못하는 저를 확인합니다. 사람보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비싼 집이 허다하니까요.
만약 30대초반의 회사원 A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고 합시다. 이 경우 그는 얼마의 보상금을 받게 될까요. 직업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3억 원가량(합의금 제외) 된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한 사람의 목숨값이 약 3억 원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목숨값과 바꿔 살 수 있는 집은 어느 정도일까요. 3억 원이면, 어디에 어느 정도의 집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얘기하는데 실제의 삶에선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일 뿐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또한, 원론적인 얘기일 뿐이니까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라는 민주의 구호는 오직 선거철에만 들리는 이야기일 뿐, 세상이 (돈과 권력을) 가진 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지배하는 우리의 세상에서 어느 한쪽으로 많은 에너지가 흐른다는 것은 그 반대쪽의 에너지의 밀도가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쪽으로만 쏠리는 부가 극단주의자들이 얘기하는 착취 때문은 아니더라도, 사회시스템이 불평등을 해소할 제도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최소한의 사회시스템이란 무엇일까요. ‘약자가 흘리는 눈물까지 핥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에서 말하는 전세도 아닌 월세로 생을 살아가는 거주민일 뿐일 수 있습니다. 제 시「계약직」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환승을 하듯 / 생은 누구에게나 / 계약직이다 / 계약직이 아닌 사람이 없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이 정규직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계약직으로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누가 이 땅 위에서 정규직을 주장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낮아져야 하겠죠. 같이 눈물을 흘려주지 못해도, 그 짠 눈물을 훔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 시 쓰는 주영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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