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쉬는 언덕 / 허주영
나는 팔을 잘라 사과나무 옆에 심었다 가지가 움터 올 때마다 양쪽 모두 기우뚱거렸지만 막다른 곳에서 숨이 찰 땐 끝을 멈추고 몇 잎의 새벽을 몰아쉴 수 있었다
사다리에 걸린 석양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그 언덕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나를 끌고 팔을 심은 곳이 어디냐 다그쳤다 인중과 미간이 엄격하게 구겨지고 다시 펴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 틈에서 불안이 뻗어 올랐다
사과는 뒤통수를 돌아 승모근으로 흐느꼈지만 향기만 들릴 뿐이었다
숨죽인 햇살이 저벅저벅 몇 바퀴 맴돌다 돌아갔다 사과나무는 나보다 더 자라나 그늘을 만들었다 나는 사과나무가 들여놓은 평원에서 축구를 해야 하고 싸움을 해야 한다 올 가을에는 나무에 사과가 너무 많구나
낮잠을 자는 나른한 오후를 나무에 걸고 싶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닌 몸의 기억이 나를 채우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가 필사적으로 점령해 온다 울림의 테두리에서 점점 부푸는 사과들,
나는 바닥 위로 팔을 뻗어 낙과 한 알 움켜쥐었다
― 2019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 /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민음사, 2023)
* 허주영 시인 1990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 한국어교육과 졸업 및 동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2019년 <시인수첩> 등단.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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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추첩 신인상 심사평]
기본적으로 신인에게 요구되는 기준들을 세웠다.
그 첫 번째는 작품의 이미지나 메시지가 선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언술에 함몰되어 정작 시의 메시지가 흐려지고 시의 초점이 지워지는 경우를 경계하였고, 맥락 없는 무의미한 소비적 상상력도 엄격하게 배제하였다.
두 번째는 구체적 현실과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 시들을 우호적으로 살폈다. 추상적 관념과 상투적 철학으로 점철되어 서툰 수수께끼와 같이 진정성이 희박한 작품들도 우선적으로 내려놓았다.
이렇게 하여 22명의 예심 통과작을 선별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 통과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서 다룰 작품의 응모자 3명을 각자 적어 오기로 하였는데, 세 사람이 모두 추천한 응모자가 1명, 심사위원 두 사람이 공통되게 추천한 이가 4명이어서, 이들 5명을 최종심에서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막판까지 치열하게 논의의 대상이 된 두 응모자를 공동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하였다.
- 심사위원 : 김병호 교수(협성대학교), 문학평론가 최현식 교수(인하대학교), 류신 교수(중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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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팔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내 것이 아닌 몸의 기억이 나를 채우”는 순간, 즉 사과나무의 기억이 나를 써 내려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나’를 내놓기만 하면 ‘나-여집합’이 ‘나’를 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때문인지 허주영의 시세계에서는 ‘나’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나’를 내려놓거나 이식할 수 있는 바깥 세계를 향한 열망이 크게 작동한다. 세계를 써 내려가는 일이 곧 ‘나’를 써 내려가는 일과 같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다수의 시편들이 ‘나’를 찾는 수색 작업과 동떨어져 보이는 세계의 풍경을 담고 있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김유림 시인 / 시집 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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