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선
박길숙
아침 껍질을 자른다 둥글고 길게 자르면 나선 계단처럼 오전이 깊어진다
누수를 앓던 방은 새 벽지를 발라도 얼룩이 남는다
일어날 일은 각질처럼 일어나고 짝이 없는 양말과 2002 수정 머리방 개업
축하 수건은 버려야 한다 이가 빠진 스타벅스 머그잔과 목이 늘어난 면티까
지
주인이 방을 비우라고 전화가 왔다 우유가 담겨있던 유리병에 주워 온 스위
트하트 고무나무 가지를 꽂았다 빨간 배스킨라빈스 리본을 묶어주니 선물이
된다 쓰레기봉투는 점선을 초과하고 스카치테이프로 두 번 세 번 밀봉한다 완
벽한 쓰레기다 나는 버릴 타이밍을 놓쳤고 나무는 뿌리 내릴 타이밍을 잡았다
주인이 병을 비우라고 재촉한다
상자에 젖은 기분을 구겨 넣는다 버리지 못한 시집과 사이즈가 맞지 않는 헬
멧과 함께
나는 우주선에 가만히 누워 지나가는 구름을 본다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영희
와 민수의 미래를 본다 엄지와 검지로 코딱지를 굴린다 우주선 끝까지 빛처럼
쏘아 올린다
마지막 택배는 이 깊은 오전에 도착하지 않았다 새 주소지는 저 높은 밤이라고
써야겠다
박길숙
부산 출생. . 201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아무렇게나, 쥐똥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