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뒤에 숨은 사티의 목적- 2/2
그게 전통이었다고 하지만 사티의 희생자들은 죄인이 아니라 일반인들이고 특히 남편을 잃은 힘없는 여성이었다.
또 전 국민 인구의 절반이 잠재 대상이니 오직 무지몽매하고 반인륜적이고 또 악마적 사고를 가진 남자들이 만든 논리다.
지금도 일부 극극우 정당에서, 또 아주 소수지만 일부는 힌두의 전통법을 지키기 위해서 여성이 희생하는 것은 아름다운 미풍양속이라고, 힌두 전통을 보존해야 한다며 부끄럽고 매스꺼운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남편 사후에 남편에게 헌신하고 그 사랑을 보여주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는데도 그들은 꼭 장작더미에 올라서 남편에게 헌신하는 것을 보이라며, 또 그 전통을 복원해야 한다고 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한다.
꾀죄죄하고 썩은 냄새 진동하는 전통 논리에 쥐꼬리 같은 감투 때문인지... 아니면 죽기 전에 얼마나 더 많은 여자들을 더 죽이고 싶은지...
나이 꽤나 든 사람들이 잘못된 전통, 악습을 지키기 위해서 무고한 뭇여자를 더 죽여야 한다고 큰소리치며 모든 여성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
어디 내놓을 것이 없는 집안이라 그렇게 해서라도 뼈대 있는 집안을 만들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여기 결혼은 처음부터 경사진 운동장 같은 출발이다.
사실 기존 4-50대 이상은 일반적으로 여자와 5-8세, 또는 10살 이상 나이 차가 나는 결혼이었기에 남편은 나이만 아니라 일의 종류나 양, 또는 사고의 위험이 여자보다 많으니 자연히 또 평균적으로도 먼저 죽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 그런데도 남자들이 죽고 나면 남은 부인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라는 소리를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떠나 남편이 죽으면 바로 가족, 친척인 어머니, 아내, 딸, 누이, 조카, 또 장모도 그 대상인데 그들의 남편이, 또 오라비나 아빠가 정신없이 전통 회복, 사티 부활이라는 그 구호를 외칠 때마다 그 여자들은 치를 떨 것 같다.
일평생 그렇게 남의 과부를 죽이자고 떠들어댔으니 자기가 죽으면 과연 과부 된 자기 부인은 무사할까?
아마 그런 사람의 부인은 남편이 죽을 기미가 보이면 멀리 도망을 가야 될 것 같다.
어제까지 형수였고 숙모였고 누이인 가족을 과부가 되자마자 전통의 이름으로 그다음 날 바로 죽이려고 사티를 종용하는 것은 남편에 대한 헌신이란 명목 뒤에 감춰진 돈 때문이라고 한다.
전편에 약간 언급했듯이 남은 재산이 친청으로 빼돌려질까 봐, 또는 성이 다른 부인이 혼자서 그걸 다 차지할까 봐 재혼도 막아놓고 혹 딴 생각할까 봐 비참하게 살거나 스스로 죽는 것이 여자의 헌신이고 미덕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만들어 놓고도 그 이상의 욕심을 내어 남자 중심인 신화 이야기에서 따온 이야기를 짜깁기하여 돈을 목적으로 그 악습을 시행하는 것이다.
즉, 강제로 죽었더라도 자발적으로 사티를 했다고 소문을 내면 그녀는 여신으로 승격되어서 사원이 지어지고 가문의 영광만 아니라 그 가족은 전국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성금이나 헌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많은 돈이 들어오니 집안에 과부가 생기면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두기보다는 시집 식구 가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가족을 산 채로 불태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도 그 행사에 협조하는 것은 그녀의 죽음으로 그 동네가 장차 성지로, 순례지로 이름이 나니 여행객 때문에 각종 수입이 생기고 또 미천한 사람이라도 그 유명한 곳에 산다고 종교적으로 알량한 자랑거리도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 때문에, 남편이 남겨 놓은 빚 때문에, 또는 앞으로 살아갈 걱정 때문에 자원해서 스스로 장작더미에 오른 케이스도 있었다지만 누가 그런 죽음을 강요할 수 있을까?
그 사건 후 법원의 금지문 발포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사망한 지 13일째 기념식에 20만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액자 사진과 포스터가 판매되어 사업성을 가진 순례지가 되었다고 한다.
과부 된 지 겨우 하루 된 여자, 남편이 죽어서 슬플 뿐만 아니라 이젠 아무런 방어막도 없는데 지금까지 가족, 친척이라고 믿고 함께 살았던 시집 사람들이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는 죽음으로 몰아넣을 때 덜덜 떨며 통곡으로도 몸부림으로도 벗어날 수 없고 이웃 역시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불쌍한 과부의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다.
혹시 ‘형수님 이제 그만 일어나 가시죠, 형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는 ’눈 한 번 딱 감고 나면 신이 되는데 그걸 왜 망설이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찬양하고 매일 꽃을 바칠텐데요... 영광이잖아요... 이 기회 놓치면 없습니다...‘ 하면서 유혹하고 윽박지르지는 않았을까?
그게 그들의 형수도 될 수 있고 제수도, 숙모도 조카딸도 될 수도 있고 시집간 딸일 수도 있는데 그들은 명예뿐만 아니라 돈까지 챙길 수 있으니 그 가문은 가족인 그녀에게 은근히 같이 따라 죽기를 바라고 때론 신이 된다고, 영광이라고 스스로 불 속에 들어가라고 꼬드겼다고 한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은 절대로 따라 죽지 않으면서 힌두 사상에 찌든 남자들이 비겁하게 힘없는 여자들을 그렇게 죽이고 또 죽였다고 한다, 전통이란 이름으로, 힌두의 전례라며, 결국 돈을 목적하고는...
전통을 지킨다며 그 악습을 따라 하는 그 집안, 그 가문에 앞으로 누가 시집을 가고 마음 편히 살 수 있을까?
연애결혼이 불가능하고 오직 중매에 의해 결혼하던 시대, 그때 결혼한 그 딸도 중매결혼의 희생자다, 아빠의 결정으로, 집안의 결정으로...
결국 뼈대 있고 근본 있는 집안이라고, 결혼으로 무언가 생길 것 같은 희미한 기대로 딸을 내 준 그 집안도 피해자 이전에 암묵의 동의자다, 명예 때문에, 돈 때문에...
그런 일들이 지난 일들인데도 이 글을 쓰는 동안도 화가 나고 떨린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앞으로 언제 이런 문제가 다시 터질지도 모르고 지금도 시골에서는 비밀스럽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는데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다.
죽은 후에 사람들에게 신의 대접을 받는 게 뭐라고 남편 죽고 나서 망연자실한 과부에게 시집 식구들은 우리 집안은 그런 집안이라고... 따라 죽으라고... 장작더미에 올라가는 것이 신이 되는 길이고 최고라고... 유혹하고 압박했다고 한다.
우리를 위해 자살당하라는 회유와 압력은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한 모양이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시집의 온 남자들이 그녀를 강제로 묵고 마약을 주입하거나 기절시켜 장작더미에 올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당한 것은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것을 냉담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여자가 그렇게 불태워지자 이제는 신이 된 그 여자의 흔적을 만져보겠다고, 그 재를 만져보려고 난리를 쳤다고 한다.
강요되고 폭압적인 죽음, 그리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여놓고도 신이 된다는 논리도 이상하지만 그런 몸부림을 치며 죽은 것을 알면서도 신적 접근이니 또 복을 받겠다고 그 난리를 친다고 하니 그 사람들도 그 가족과 똑같은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사티는 그 예식을 주관하는 사제들과도 결탁되어 있다고 한다.
사제들은 사티에 임하는 과부에게 더욱 화려하고 비싼 장신구를 착용하고 죽을 것을 권장했다는데, 사티가 끝난 후 재 속에서 금붙이를 챙길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부패도 같이 나타났다고도 한다.
통치 기간(1556-1605) 군대와 제도 개편으로 제국의 힘을 키웠던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 페르시아계 이슬람인 그는 힌두와는 상관이 없지만 자기 백성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자 지역재판소인 코트와르(Kotwals, Courtware)의 허가 없이는 사티 금지 명령을 내렸다.
당시 그의 치세하에서 누가 사티를 하려고 하면 연금이나 선물을 주거나 재활 지원을 해서 사회 복귀를 위한 도움을 줘서 사티를 감행하는 것을 막거나 그 결정을 최대한 유보하도록 지시했다는데 그가 죽자 그 악습은 다시 원상복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인도를 지배했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프랑스도 자신의 영향권 안에서만 사티를 금지했지만 이를 폐지하지는 않았는데 당시 인도에서 어린이 살해, 인간 제물을 금지했던 동인도회사 총독 William Bentinck가 선교사들의 거듭된 간청으로 1829년 법률로 ‘사티방지법’(Sati Prevention Act)을 만들어 이를 위반한 사람들을 처벌했다고 한다.
그리고 금지된 사티가 실행된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경찰서, 또 고의로 과실이 있는 경우에는 책임 있는 공무원은 당시로는 거금인 200루피의 벌금 또는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당시 1루피는 11.34g의 은화, 당시 미화로 5.93 달러 정도,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1947년 인도 공무원 초임 월급이 55루피인데 당시 200루피면 엄청난 금액이고 집을 몇 채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3년 라지스탄에서 마하라자 만 싱 왕의 장례식 때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성 벽면에는 그의 15명의 아내들이 사티로 죽기 전에 남긴 손바닥 도장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법으로도 전통을 이기지 못한 것 같다.
모두가 사티를 행한 것이 아니고 일부이기는 하지만 높은 신분인 왕비, 왕족, 후궁들도 신랑이 죽으면 전통이란 악습의 희생자가 될 정도로 그게 나라에 만연했다고 한다.
인도 ㅅ교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윌리엄 캐리 ㅅ교사가 1802년 조사한 결과 인도의 캘커타 지방 주위 50km 반경 안으로 한 해 동안 438명의 과부가 사티 풍습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한다.
사티의 이면에는 그렇게 죽기 싫으면 신랑을 잘 건사하라는 메시지가 있기는 하지만 신도 아닌 인간이 생사 문제를 임의로 결정할 수도 없고 신랑보다 한참 어린 나이의 신부가 그것을 피하려고 신랑보다 임의로 먼저 죽을 수도 없고...
시집 식구의 명예욕과 재물 욕심, 사제의 재물욕, 동네 사람들의 호응, 국민의 광기 어린 힌두 종교심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흉물스럽고 부끄러운 전통이고 유산이다.
결국 인도 정부는 Roop Kanwar 가 죽고 온 국민이 들고일어나자 1987년 사티 예방법이라는 강력한 새 법률을 도입하여 사티를 저지르거나 이를 방조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형이나 종신형을 부과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그러나 당시 그녀의 사티 사건에 개입한 8명의 남자들이 37년을 끈 재판에서 작년(2024) 10월 결국 그들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항소를 포기한 그 주의 법무장관은 자기들 이전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 잘 모르는 일이라고...
사진은 사티로 죽은 Roop Kanwar의 신전과 당시 사티 전에 강물에서 곧 죽을 과부의 몸을 담그는 그림인데 중앙의 흰옷 입은 여자가 당사자이고 뒤쪽 연기나는 곳은 죽은 시신을 태우는 장소인데 신랑의 시신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