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내일 있을 연합회 행사를 위해 모여서 기도하고
여러 가지 준비 사항을 체크해야 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행사, 영혼 구원의 행사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본문 주해)
16~19절 : 언약궤를 옮기는 일이 순적해지자 다윗은 너무도 기뻐서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춤을 춘다. 그것은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을 세워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의 표현이었다. 블레셋을 물리친 후 나라가 안정되니 그 감격은 더 커졌다.
그러나 거창하게 법궤를 모셔들이고자 했던 첫 번 시도가 실패하였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 다윗의 기쁨은 하나님 앞에 추는 춤으로 표현된다.
이런 모습을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마음속으로 다윗을 비웃는다.
다윗이 함께 기뻐한 모든 백성들에게 축복하고 그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자 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20~23절 : 다윗이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 궁으로 들어올 때 미갈이 다윗을 맞이하며 기어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뱉는다. 다윗에게 채신머리없다고 빈정거린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새번역)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심에 대한 기쁨의 춤이 미갈의 눈에는 방탕하고 염치없는 모습으로 보인 것이다. 이런 미갈에게 다윗이 말한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새번역)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게 된다.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김으로 인하여 자녀를 가지지 못한 것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미갈과 전 남편인 발디엘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었다고 한다. 즉 미갈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다윗과의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는 것은 다윗의 씨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인 것이다.
(나의 묵상)
다윗을 이해하지 못하고 빈정거리는 말을 쏟아내는 미갈이 참으로 안타깝다.
오늘 본문에는 미갈이란 이름 앞에 ‘사울의 딸’이라는 표현이 세 번(16, 20, 23절)이나 붙어 있다. 이는 미갈 역시 아버지 사울처럼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갈급함이 없음을 나타낸다.
언제나 하나님께 묻기를 원한 다윗.
그가 언약궤를 옮겨오고 싶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번 실패를 맛보았고 이제 다시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궤를 옮겨올 때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니 어찌 다윗이 기뻐하지 않겠는가? 체면이고 뭐고 어찌 막춤이라도 추지 않을까?
그런데 언약궤에 대한 태도 자체가 심드렁한 미갈은 다윗의 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다윗의 이 춤이 너무 좋다.
하나님 주신 기쁨이 충만하여 춤추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그 마음이 너무너무 이해가 된다.
30년도 더 전에 우리 교회 부목사님으로 계셨던 목사님이 자신이 드리는 새벽기도를 하나님 앞에 추는 춤이라고 표현했었다. 그때 내 마음에 참 감동이 되었었다.
나도 그 세련되고 우아한 춤을 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나도 하나님 앞에 춤추는 자가 되었다.
그런데 나의 춤은 세련되고 우아한 춤이 아니라, 오늘 다윗이 춘 춤처럼 막춤이다. (세련되고 우아했다면 미갈이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 주시는 기쁨에 반응하며 덩실덩실 춤추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액션으로-비록 촌스럽기 그지없지만-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으로.....박자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는 춤이지만 그 주제는 한결같이 ‘감사와 기쁨’이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십자가 보혈의 은혜, 매일 주님을 알아가는 영생을 누리게 하심에 대한 감사, 내 삶에 효력을 발생하는 복음에의 기쁨, 이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감하는 은혜....이 모든 것에 반응하는 나의 이 막춤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춤을 멈출 수가 없다.
내 춤을 보고 ‘굳이 꼭 그렇게 믿어야 하나?’ 하는 목소리가 주변에서 여전히 들린다. 그것은 다윗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갈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나는 다윗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새번역)를 외치고 또 외친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 앞에서 기쁨의 춤을 추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련되지 못하고, 촌스러운 몸짓이지만
주님을 기뻐하는 마음이니 무슨 모양인들 상관이 있을까요?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 기뻐하며 뛸 것이요’
만방에 외치는 목소리,
만방에 보여지는 춤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