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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인 고려사절요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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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1년 10월, 정유일에 홍두적(紅頭賊 홍건적)의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 등 10여만의 무리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삭주(朔州)를 침범하니,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방실(李芳實)을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 삼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이여경(李餘慶)을 보내서 절령(절嶺)에 책(柵)을 세웠다.
○ 학성후(鶴城侯) 서(서)를 원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더니, 길이 중도에서 막혀 가지 못하였다.
○ 사신을 보내어 여러 도의 군사를 점검하고, 국내의 절에 명령하여 전마(戰馬)를 차등 있게 내게 하였다. 서울 사람을 모아서 성문을 수리하였다.
○ 임인에 홍두적(紅頭賊)이 이성(泥城)을 침범하니,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上元帥)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정휘(鄭暉)를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삼았다.
○ 모병(募兵)하는 방에,“무릇 모집에 응하는 자 중에, 사삿집 노비를 제외한 선비나 향리(鄕吏)에게는 벼슬을 주고, 궁(宮)·사(司)의 노예는 양민(良民)으로 삼든지 혹은 돈과 비단을 상주든지 그들의 소원에 따라라” 하였다.
○ 지숙주사(知肅州事) 강여(康여)가 백성의 집을 불태우고 도망했다.
○ 11월에 홍두적이 무주(撫州 平北 寧邊)에 둔을 치니, 저 쪽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다 하여 이방실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와서, 순(順)·은(殷)·성(成) 3주(州)와 양암(陽巖 平南 陽德)·수덕(樹德 平南 陽德)·강동(江東)·삼등(三登 平南 江東)·상원(祥原 平南 中和) 5현의 백성과 곡식을 절령(절嶺)으로 옮기자고 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이방실이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유계조(柳繼祖), 대장군(大將軍) 최준(崔準) 등을 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적을 쳐서 이겼다. 이방실은 또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제)와 더불어 개주(价州 平南 价川)에서 적을 쳐 1백 50여 명을 베었다.
○ 염제신(廉悌臣)을 파하고, 홍언박(洪彦博)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다.
○ 을묘일에 안우가 보낸 조천주·정이(鄭履) 등이 보병과 기병 4백 명을 가지고 박주(博州 平北 博川)에서 적을 쳐서 적 1백여 명을 베었다. 또 기병 1백 명을 거느린 이방실은 연주(延州)에서 1천여 명을 쳐서 20명을 베었다. 이에 안우(安祐)는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나가 둔을 치고 첩보(捷報)를 올리니, 왕이 명하여 안우를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 병진일에 적이 안주를 습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하여, 상장군(上將軍) 이음(李蔭)과 조천주가 죽었다. 적은 지휘사 김경제(金景제)를 사로잡아 그들의 원수(元帥)로 삼고 글을 보내기를,“군사 1백 10만을 거느리고 동으로 갈 테니 속히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 공(公)·후(侯) 이하는 전쟁에 쓸 말을 차등 있게 내놓으라고 명하였다.
○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 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로 삼고, 전 밀직제학(密直提學) 정사도(鄭思道)·김두(金두)를 보내어 절령(절嶺)의 책(柵)을 지키게 하며, 평장사(平章事) 이공수(李公遂)는 죽전(竹田)에서 둔을 치게 하였다.
○ 우리 태조가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1백여 명을 베고, 한 사람을 사로잡아 바쳤다.
○ 계해에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전 형부상서(刑部尙書) 유연(柳淵)을 병마사(兵馬使)로 삼았다. 적은 이 날 밤에 군사 1만여 명을 절령(절嶺) 책 옆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鐵騎) 5천 명으로 책문(柵門)을 공격하여 깨뜨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單騎)로 도망해 돌아왔다. 을축일에 안우가 군사를 수습하여 김용(金鏞) 등과 함께 금교역(金郊驛)에 둔을 친 다음, 용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최영(崔塋)을 왕께 보내어 서울 군사를 청하니, 왕이 일이 급함을 알고서 마침내 피난할 것을 생각하여 먼저 서울에 있는 부녀들과 늙고 약한 자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 날,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 黃海 牛峯)에 이르렀다.
○ 병인일에 왕과 공주가 태후를 모시고 장차 남쪽으로 파천하려 하는데, 날이 밝기 전에 김용·안우·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모두 아뢰기를,“경성은 지키지 않을 수 없읍니다” 하였다. 최영이 가장 통분하여 크게 부르짖기를.“원하건대, 주상(主上)께서는 조금 머루르셔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宗社)를 지키소서”하니, 재신(宰臣)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날이 밝자, 왕의 일행은 민천사(旻天寺)로 거둥하였다. 근신(近臣)들을 각각 거리로 나누어 보내서 큰 소리로 의병(義兵)을 모집하게 하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모집에 응한 자는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안우 등도 어찌할 수 없어 왕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여기 머물러 적을 막을 것이오니, 청하건대 주상께서는 나가소서”하였다.
이에 왕이 숭인문(崇仁門)을 나서니,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어미와 자식을 서로 버리고, 서로 짓밟은 자가 들판에 가득하였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왕의 일행이 통제원(通濟院)에 이르자 경성으로부터 오는 자가 아뢰기를,“적이 이미 가까이 왔읍니다.”하니, 드디어 임진강을 건넜다. 공주는 연(輦)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씨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하여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 왕이 산하를 돌아다보며 원송수(元松壽)·이색에게 이르기를,“풍경(風景)이 이와 같으니, 경(卿) 등은 마땅히 연귀(聯句)를 지을 만하다” 하였다.
○ 상주 판관(尙州判官) 조진(趙縉)이 군사 1천 4백 명을 데리고 왔으므로, 대장군(大將軍) 김득제(金得齊)로 하여금 거느리게 했다. 사평원(沙平院)에 이르니, 개령감무(開寧監務)가 와서 쇄마(刷馬) 1백여 필을 바쳤다. 광주(廣州)에 이르러 유탁(柳濯)을 경상도 도순문 겸 병마사(慶尙道都巡問兼兵馬使)로, 이춘부(李春富)를 전라도 도순문 겸 병마사(全羅道都巡問兼兵馬使)로, 이성서(李成瑞)를 양광도 도순문 겸 병마사(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로, 강석(姜碩)을 교주·강릉도 도순문 겸 병마사(交州江陵道都巡問兼兵馬使)로 삼았다. 중랑장(中郞將) 임견미(林堅味)가 재(宰)·추(樞)에게 말하기를,“적이 이미 경성에 들어 왔으니, 임진강(臨津江) 북쪽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청하건대, 모든 도의 군사를 뽑아 적을 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재·추들이 응하지 않으므로 임견미는 눈물을 흘리면서 바로 왕에게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지금 창졸간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 신미일에 눈이 내리는데 이천현(利川縣)에 다다르니, 왕의 옷이 젖고 얼어서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풀었다. 이 날 적이 경성을 함락시켰는데, 여러 달 동안 둔병(屯兵)하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베껴서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했다. 또 사람을 잡아서 굽고, 혹은 임부(妊婦)의 젖을 구어서 먹는 등 잔학(殘虐)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
○ 임신일에 왕이 음죽현(陰竹縣)에 다다르니, 관리와 백성은 모두 도망해 숨었다. 판각문사(判閣門事) 허유(許猷)가 쌀 두 말을 바치니, 왕이 안렴사(按廉使) 안종원(安宗源)과 안무사(安撫使) 허강(許綱)이 음식과 장막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하여 이지태(李之泰)를 안종원에 대신하게 했다.
○ 장군 홍선(洪瑄)이 자청해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려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남경윤 양광도관군 상만호(南京尹楊廣道管軍上萬戶)로 발탁하고, 조희고(趙希古)를 광주목사 양광도 부만호(廣州牧使楊廣道副萬戶)로 삼았다.
○ 12월 임진일에 왕이 복주(福州 慶北 安東)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였다. 왕이 파천(播遷)한 뒤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히 여겨서,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시킬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 여러 번 왕에게 청하기를,“속히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또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시어 징병(徵兵)을 독려시키시옵소서”하였다.
이에 왕이 드디어 정세운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정승되기에 기울이고, 천하가 위태하면 뜻을 장수되기에 기울이는 것이다. 시세(時勢)의 경중(輕重)은 오직 사람에게 있는데 어찌 삼가지 않으리오. 공경히 생각건대, 태조께서 국가를 이룩하시고 여러 성왕(聖王)이 서로 계승하여 백성들을 길러 오셨는데, 과인에게 이르러서는 태평 시대를 믿어 군사의 일은 폐하고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두적의 침범을 입어서 파천하여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매양 종사(宗社)를 생각하면 아프고 쓰라림을 어찌 견디리오. 이제 모든 장수를 나누어 보내니, 군사를 합하여 적을 쳐라. 이에 정세운(鄭世雲)에게 절월(節鉞)을 주는 명을 내리니, 가서 군사를 감독하며 명령을 듣고 안 듣는 자를 <가려> 상주고 벌주라”하였다.
정세운이 도당(都堂)에 나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나는 심히 한미(寒微)한 사람인데, 나 같은 것이 재상이 되었으니 국가가 마땅히 어지러운 것이다”하고, 유숙(柳淑)에게 말하기를,“내일 군사를 출발시킬 것이니, 공(公)은 돌아가서 군사를 점검(點檢)하시오”하니, 유숙이 말하기를,“군사가 이미 죽령대원(竹嶺大院)에 이르렀다”하였다. 정세운이 다시 말하기를,“만일 군사가 기한까지 당도하지 못하면, 공도 역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하고, 또 김용(金鏞)에게 말하기를,“지금 두 정승이 적을 구경만 하고 치려 하지 않으니, 누가 본받지 않으리오. 만일 적을 소탕하지 못하면, 비록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을지라도 어떻게 살아 있으며, 어떻게 나라가 되겠는가”하였다.
시중 이암이 말하기를, “이제 적이 몰래 들어와서 왕과 신하들이 파천(播遷)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부르짖은 그대가 절월(節鉞)을 가지고 군사를 거느려 떠나는데, 사직(社稷)이 다시 편안할 수 있는 것은 이번 한 싸움에 있으니, 공은 오직 힘쓰라”하였다.
○ 왕이 영호루(映湖樓)에 거둥하여 얼마동안 경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누(樓)에서 내려 배를 타고 놀므로, 구경하는 자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혹은 돌아서서 탄식하는 자도 있었다.
○ 정세운을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삼았다.
○ 염주(鹽州 黃海 延白)사람 검교 중랑장(檢校中郞將) 김장수(金長壽)가 주동이 되어서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적을 막아, 적의 유기(遊騎) 1백 4십여 명을 죽이고, 적의 위방(僞榜)을 그 고을 사람 최영기(崔英起)에게 주어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보고하게 하니, 김장수를 상장군 겸 만호(上將軍兼萬戶)로, 최영기를 서해도 안무사(西海道安撫使)로 삼았다.
○ 적 3백여 기(騎)가 원주(原州)를 함락시키니, 목사(牧使) 송광언(宋光彦)이 죽었다. 적 29명이 또 안변부(安邊府)에 이르렀는데, 이 때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술을 대접하여, 세 순배가 돌자 모두 때려 죽였다.
○ 강화부(江華府)도 적에게 거짓 항복하고, 적의 비장(裨將) 왕동첨(王同簽)에게 음식을 주다가 복병(伏兵)을 내어 모두 죽이니, 적이 감히 그 고을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임인 11년(원 지정 22년 서기 1362년) 봄 정월에 구묘(九廟)의 가주(假主)를 복주향교(福州鄕校)로 봉안(奉安) 하였다.
○ 갑자일에 안우·이방실·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안우경(安遇慶)·이귀수(李龜壽)·최영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천수사(天壽寺)앞에 둔을 쳤다.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모든 장수를독려하고 진군시켜 경성(京城)을 포위하게 하고, 정세운은 물러나와 도솔원(稻率院)에 둔을 쳤다. 이 때 막 진눈깨비「雨雲」가 내리는데, 적의 방비가 해이(解弛)하였다. 이여경이 숭인문(崇仁門)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의 휘하 호군(護軍) 권회(權僖)가 적을 정탐하여 <이것을>알고 말하기를, “적의 정예(精銳)군사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니, 만일 우리가 불의(不意)에 공격해 나간다면 가히 이길 것입니다“ 하였다. 을축일 동틀 무렵에, 권희가 군사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돌입해 들어가면서떠들썩 하게 북을 치며 날쌔게 공격하니, 적의 무리가 깜짝 놀랐다.
이 때 우리 태조가 휘하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대파하였는데, 점심때 쯤에 적의 괴수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니, 적의 무리들이 저희끼리 서로밟아 쓰러진 시체가 성 안에 가득하였다.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대개 10여만 명이요,원나라 황제의 옥새(玉璽)2개, 금보(金寶)1개, 금은·동인(銅印)과 병기(兵器) 등의 물건들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궁한 도둑을 모두 잡을 수는 없다”하고, 숭인 (崇仁)·탄현(炭峴) 두 문을 열어 놓으니,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등 10여만 명이 도망하여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고, 드디어 적을 평정했다.
성을 공격하던 날, 적은 비록<형세가> 궁해졌으나 누벽(壘壁)을 쌓고 굳게 지켰는데, 날이 저물자 우리 군사가 진군해 포위하고 육박했다. 태조는 길가 어느 집에 멈추고 있었는데, 밤 중에 적들이 포위된 것을 헤치고 달아나니, 태조가 동문(東門)으로 달려갔다. 적과 우리 군사가 문을 서로 다투니 혼잡하여 나가지 못했는데, 뒤에서 오던 적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사세가 심히 급박했다. 이에 태조가 칼을 빼어 앞에 있는 적 7,8 명을 베고, 말을 뛰게 하여 성을 넘었으나 말이 넘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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