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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후당의 글모음 원문보기 글쓴이: 후당
이순신 장군의 위업 /중국과 일본국에서 보는 이순신장군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기리며 ◎
그렇게 큰 덕과 무와 예를 갖추고서도 '자득'의 경지에 든
이순신 장군은 전라에도 경상에도 훤훤장부로 살아 있었다. 섬세함을 갖춘 '복장'으로. 진남관에서의 충무공이 임란에 뛰어들기 전 신중함에 신중함을 거듭하던 모습이었다면, 제승당과 수루에서의 충무공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제독 중의 제독이었다. 도량하고, 국가의 존속을 위해 몸바쳐 지키고자 한 오직 외길의 충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충무공은 우서 장수치고 몸이 약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강직하였습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괜히 백의종군한 것이 아닙니다.
충무공의 나라를 향한 충성과 구국의 정신 만은
◎ 이순신의 리더십 졸병(卒兵)이라도 자유롭게 말하게 했다.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과 부하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이라는 건물을 세웠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장수들과 함께 전투를 연구하였는데, 아무리 지위가 낮은 병사라고 하여도 군대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병사들이 군대에 관련된 일을 잘 알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으므로 전투에서 패하는 적이 없었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이순신은 신분의 벽을 허물고 졸병들까지도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순신은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청취하여 필승 전략과 전술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졸병들까지도 이순신이 자신들을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부하들의 주인의식과 충성심을 높이고 사기를 진작 시켰습니다.
자신만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잘 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지게 되면 부하들의 의견도 수렴하지 못하고 충성심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모든 조직의 리더들은 말단 직원들 까지도 직급의 벽을 뛰어 넘어 그들이 갖고 있는 생생한 정보와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고 부하들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복잡성과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부하들과의 빠르고 원활한 의사소통과 정보공유가 더욱 절실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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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 5명과
일본학자 7명 그리고 그 외 일본 사관학교(육사. 해사) 장교 및 중국
인민박물관장. 한국 해군사관학교 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간된 책입니다.
이 책은 크게 -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2권- 명나라가 본 이순신1권. - 1500~1600년 이 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토요토미 대 이순신 2권.
관한 책이 2권이 있는데.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일본 와키자카와 도도. 등 특히 이 두 사람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나다고 한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관심도가 남달랐을 것이다.
1.일본의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것과 일본에서 바라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묘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 정도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이란다.
대단했을 것이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 같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 졌는지 생각과 고민하는 글을 아래와 같이 남겼다고 한다. 다른 조선장수정도였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그는 여늬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라고 적었다.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한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후손들과 일본인들이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 오는가 봅니다.
2.명나라의 사신이 본 이순신
이렇게 기록했다.
살결을 찢는 듯 하니,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게 아닌가...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10살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 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 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 장수대 왜군이 아닌한 아버지 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마음 무엇 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3.명나라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튀어날 뿐만아니라 그 성품과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 수있을뿐 아니라, 저 오昊땅 모두를 우리 명(明)국으로 귀속 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 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 나이다." 국왕에게 충의를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 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 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께 충(忠)을 다 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 를 견제케 하소서)." 4.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더군다나 그 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 라는 한 인간을 보는 것이었다.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수 있었다.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다.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 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다.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 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대답이 없다.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영웅 중 청일전쟁 그 당시 누가 있었으면 (한 사람만)청나라를 구할 수 있었을까?"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한참 동안 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 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 일거라고 답해주자..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 것이다.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 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 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 보라. 스페인을 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것이다.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 중 한분이셨으며,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시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편입하는 작업에서 손수 물러나셨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나폴레옹도 그러했다.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였다.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
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했듯이.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 孝. 義. 愛. 善 을 가르치신 분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 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성웅 이순신장군! "
7. 충무공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중에서(14부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그에게는 단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 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조선의 멸(滅)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이남. 경상도부근에 이순신을 따르 는 군(軍)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또 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 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것이다.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전에 또 한번 강력한 이순신 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 록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 줄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등등)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 이동시키자.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있었음 알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을 끌어드려서 북의 오랑캐 (훗날 청나라)를 견제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낭떠러지에 몰린 조선 왕 선조와 조정대신 (이순신의 반대파 세력) 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 되고 비밀협약을 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해 되었을까 하는? 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정확이 아셨던 분이다.
그것도 한국 학자 가 아닌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저서가 된 책 그들은 우리를 알려고 하는데. 더 알아야 하지않을 까요?
우리는 얼마나 그 분에 대해 서 알고 있는지 그 분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지금까지 나온 "난중일기" 번역본 중에서 제일 완전한 형태로 나온 책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묻혀 있던 을미년(1595) 일기 및 누락 문장들을 모두 수록하고, 아울러 잘못 해석된 초서체까지 모두 검토해서 복원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나 이순신장군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쯤,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 여수 통영의 이순신 장군 유적 ○
전라우수영 본부가 있었던 진남관. 규모가 대단하다.
충무공 관련 최초의 사당인 충민사. 이억기 장군,안홍국 장군과 함께 모셔져 있다.
거북선의 건조와 피항이 이뤄졌던 굴강. 폭 45미터. 깊이는 2.5미터 정도였다.
잡인, 특히 군사지역으로의 민간인의 출입을 금했던 표지석인 벅수. ( "벅수" = 바보).
등대 그리고 섬이 그린 수채화
제승당으로 들어 가는 길에...
제승당 앞으로 가는길
◇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寒山島月明夜(한산도월명야)
◇ 무제(無題) 1 북쪽 소식 아득히 들을 길 없어 北來消息杳無因(북래소식묘무인)
◇ 무제(無題) 2 병서도 못 읽고 반생 지내느라 不讀龍韜過半生(불독용도과반생)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蕭蕭風雨夜(소소풍우야) -1594년 9월 3일-
◇ 선거 이 수사와 작별하며..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했고 北去同勤苦(북거동근고) -1595년 9월 14일-
◇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天步西門遠(천보서문원) ------------------------------------------------
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今臣戰船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微臣不死則賊不敢侮我矣 (미신불사 즉적불감모아의)
一夫當逕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
必生卽死死必卽生 (필생즉사 사필즉생)
此讐若除死卽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戰方急愼勿言我死 勿令驚軍 (전방급 신물언아사 물령경군) 해서는 안된다.
三尺誓天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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