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독립운동
출애굽기 34:29-35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교회력이 바뀌는 시기이다. 주현절은 오늘이 마지막주일이고, 오는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된다.
오늘은 3.1절 106주년 기념주일이다. 교회가 3.1절 기념주일을 지키는 것은 일제강점기 36년을 기억하고, 해마다 기념하는 일은 원수 갚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용서하되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잊으면 망국의 역사는 되풀이 될 것이다.
나는 3.1운동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시기로 생각한다. 정말 대단한 만세운동이었다. 한국교회의 가장 위대한 시기요, 절정이었다.
일제시대 36년은 한마디로 광야의 삶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악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 홀로코스트 기념관 앞에 새긴 바알 쉠 토브의 말이다. “망각은 유랑으로 인도하나, 기억은 구속의 비밀이다.” 그러니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이다.
오늘 색동교회 SDMC(색동교회 Running Crew) 회원 4명이 일본 미우라국제마라톤대회에 출전한다. 트레이너와 통역을 합쳐 7명이 선수단을 꾸렸다. 색동교회 현수막도 마련하였고, 가슴에 태극기를 붙인다고 한다. 용기있는 일이다.
색동 러닝 크루가 유니폼을 마련하면서 목사의 것도 장만했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지만, 큰 압력이기도 하다. 이참에 봄바람 핑게를 대고서라도 천천히 내 삶의 독립운동을 하듯 뛰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중이다.
마치 어린 하늘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자기 인생의 독립운동을 시작하듯이, 우리 모두는 날마다 내 인생의 독립운동 중이다. 그런 여러분을 응원한다. 으랏차차!
1)
모세는 유대교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명문화된 율법을 유대인에게 전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성경 율법서 5권을 가리켜 모세오경이라고 부른다. 모세는 유대교 최고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유대교는 모세의 종교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종교, 마호멧의 종교는 있지만 모세의 종교는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모세의 신실함 때문이다.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모세는 ...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히 3:5)라고 말한다. 모세는 종교를 세운 주인공이 아니라, 신앙을 수호한 충성스러운 종이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허겁지겁 홍해를 건너고 시내 광야에 도착한 후 1년 동안 머물렀다. 그 기간 중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계명을 받았다. 40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시간을 참지 못하였다. 아론과 백성은 지금 모세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모세가 가리킨 여호와 하나님 대신 그 유명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마음으로부터 배신하였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니,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에 예배하고 있었다. 모세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토록 소중한 십계명 돌 판을 내팽개쳐 깨뜨려 버린다.
사람이 분노하면 말을 조리있게 하지 못한다. 게다가 모세는 본래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가리켜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 4:10)라고 하였다. 그러니 화가 날수록 더 말조심을 해야한다. 더 큰 실수와 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모세는 크게 분노했지만, 그럼에도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어진 지도자였다. 아론과 백성들을 무섭게 책망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백성을 위해 조르고 또 사정하였다(출 32:32).
그런 배신과 분노,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모세는 다시 “내가 친히 가리라”(출 33:15)는 하나님의 동행 약속을 받아내었고, 또 40일 밤낮을 시내 산에서 머물며 두 번째 십계명 돌 판을 받게 되었다.
2)
본문은 모세가 다시 시내 산에 올라가 새 언약을 확인한 후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내려오는 모습이다. 엄청난 우여곡절, 폭풍전야를 겪은 후 장면이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29).
어떻게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을까?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광채는 모세의 권위가 얼마다 대단한가를 보여준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영적 권위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말주변이 없는 모세는 그 덕분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적인 대화 곧 깊은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모세는 인간의 수단인 말로 해결하려고 들지 않고, 영적인 감동과 진실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다. 우리는 말로 기도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 감동과 고요한 침묵으로 진실하게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깊으면 사람의 표정이 밝고, 평온하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적인 깊이를 보고 아론과 백성들은 두려워했을 것이다.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된다.
주현절 마지막 주일은 ‘변화주일’이다.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과 함께 산에 오르셨다. 누가복음은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눅 9:28)라고 전한다.
기도하시는 중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9). 그것을 예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한다. 성화를 보면 화가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영광을 둥근 광채로 표현하고 있다. 후광, 아우라라고 부른다.
이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헬라어로 별세는 ‘엑소더스’이다)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깊은 잠을 자던 베드로가 깨어 이 모습을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졌다. 복음서는 베드로가 본 것은 “예수의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눅 9:32)이었다. 그가 초막 셋을 짓고 이 산 위에 머물자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잠꼬대가 아니었다.
아마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본 모세의 모습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것은 모세에게 깃든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모세의 광채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 빛으로 모세의 권위는 한없이 높아졌고, 산에서 내려온 그의 얼굴은 광채가 났다.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모세가 자기에게 깃든 영광을 스스로 가렸다는 점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33).
모세의 위대함은 그의 겸손함 때문이다. 그는 광채 나는 얼굴을 자랑하지 않고, 수건으로 가렸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모세의 겸손함은 그의 영광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모세가 전할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지, 그 얼굴의 광채가 아니었다.
그런 겸손함이, 그런 진실한 충심이 유대교를 모세의 종교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으로 그 전통을 바르게 세울 수 있었다.
3)
처음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가져왔다. 광야는 식민지 백성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인이 되기 위한 훈련장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머무는 동안 인생의 독립운동과 신앙의 만세운동을 부른 셈이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고난의 광야와 같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절망의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역사가들은 그 현실을 공동묘지와 같았다고 말했을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출애굽과 같았다. 그 시대에 출애굽기는 가장 위험한 책이었고, 또 사랑받는 책이었다.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580장)은 얼마나 아름다운 찬양일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일제강점기 때 내가 살았다면 독립운동을 했을까 아니면 친일파로 살았을까 스스로 물어본다. 여러분은 어떤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일이다.
아마 현실에 눈감고, 숨죽이고 살았을 것이다. 봄바람에도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하룻밤에도 숱하게 근심 걱정을 하며 불면을 밤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날마다 순간순간 자신을 당당히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러니 지금 인생의 광야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좌절하지 말라. 내가 마주한 광야를 뒤집어라. 내 인생의 만세운동, 내 삶의 독립운동을 시작하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2의 모세라고 불리는 사람은 벤 구리온이다. 그는 이스라엘 초대 수상으로 유다 광야를 정착지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였다. 그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광야에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광야를 정복하지 못한다면 광야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말 것이다.”
초대 수상으로서 이스라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벤 구리온은 죽을 때까지 인생의 마지막을 남쪽 광야를 일구며 보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광야의 불가능을 뒤집는 일이었다.
모세의 광채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인정하는 빛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 얼굴의 광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걸림돌이 될까 두려웠다. 자기의 교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얼굴에 수건을 썼다.
심지어 모세는 자신의 무덤도 남기지 않은 인물이다. 신명기 맨 마지막 장을 보면 그는 죽었으나, 무덤을 두지 않았다(신 34:6). 아마 모세의 무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마치 이슬람의 메카처럼 유대교의 성지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만 쓰임 받는 종이길 원하였다. 그런 모세는 광야 시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친밀하심을 말한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따뜻하게 비취고 부드럽게 빛나는 여호와의 얼굴에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그 은혜와 관심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얼굴이 그 보호하심과 평강이, 위로부터 오는 복이 나를 향하신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되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이러한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비추신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나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마 5:14)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들어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우리 민족과 함께 하셔서,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깊이 사랑하고, 서로 섬기는 그런 하나된 민족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을 받은 성도로서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은총 가운데 머물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독립운동이다.
그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영적인 깊은 교제를 통해 빛나는 내 삶의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