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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고 지기를 한달여 반복하면 무자년을 맞는 어느 날, 꽃도 추워 몸을 움크리며 목부터 무릎까지 늘어뜨린 리본이 즐비한 신포동 거리는 큰 잔치라도 벌린 것 같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화랑이 개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대가 밝고 벅적대었던 것이다.
'인천갤러리!' 개항장 터진 개에 들어선 화랑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해방공간 때부터 개관, 폐관을 이어오던 이곳에 다시 문을 열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당연하고 기쁘고 있을 것이 생겼다함이 정말로 흐뭇하다.
갤러리나 화랑은 사전속에서 설명은 그림을 전시하고 문화(회화) 향유자들이 감상하겠금 배려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운영 경비나 이익을 위하여 대관 또는 그림을 판매하는 곳이기도 하다.
유구한 역사의 그늘을 덮고 있는 중구는 흘러간 시절에는 빼놓을 수 없는 인천문화의 중심지다. 그 명성에 맞게 있어야 될 화랑 하나 없이 지나왔다. 근자에 생긴 한중문화회관이 몫을 해 오고는 있지만 수요 충족에는 태 부족이고 구조 또한 만족수준은 아니다. 하여 탄생한 인천 갤러리(화랑)는 다시 이야기 하지만 부라보! 그레이트 힛트(Bravo! Great Hit)가 아닐 수 없다.
인천(신포동 일원)의 전시문화는 개항 12년 후쯤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인천지방법원(관동)이 있던 자리에 당시의 인천감리서 터가 오늘의 인천고등학교의 요람이었는데 1911년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인천공립상업고등학교로 되었다 단일화 되며 일본인이긴 하지만 회화와 서예를 가르쳐 1937년 개교 25주년 기념전이 인천 최초의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12월 내동 '금융조합'(현 중소기업은행) 2층에서 개최된 '해방 기념 미술전람회'의 인천전은 동년 10월에 서울 덕수궁에서 있었던 일부 작품을 인천에 유치한 전시회가 중구에서 열렸으니 문화일굼의 최초 역할은 곧 이 터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 이전 1948년까지 이어오다 폐쇄된 영국영사관(현 파라다이스 호텔)이 "우리 예술관" 이라 하여 비중있는 전시관의 역할을 하며 청전 이상범의 초대전도 개최한 바는 있었지만 '인천미술인회'를 창립한 '세루팡 다방'이나 중국에서 돌아온 우문국씨가 화가 이무영(다방경영, 화가)과 함께 신포동 '랑랑다방'에 상설전시를 하고 있었으니 이곳이 '인천예술인회'를 만든 곳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전시장(화랑)없이 시작된 표현예술의 공간은 자연히 다방으로 연결되기에 이르러 50년대와 60년대 신포동 일대의 다방은 다방 아닌 화랑으로 시민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1952년 우문국의 개인전이 '등대다방'에서 열린 것을 시작으로 55년 문총주최의 시회전이 '유토피아 다방', 59년 김종휘 수채화전이 '향도다방', 60년 김찬희 유화전이 '은성다방' 동년, 이재호 동양화전이 '20세기 다방' 등에서 열렸다. 그밖에도 인천다방, 명다방, 인영다방, 금잔디다방, 자월다방, 백궁다방, 유토피아다방, 통일다방에서 쉼 없는 전시회를 열었으니 공보관(사동)이 열리기 전까지의 인천 미술인들의 전시공간은 열악하기 이를 때 없었다.
예술하는 사람들 거의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의 경제여유로는 엄두도 못 낼 대관료 문제가 있긴하지만 마땅한 전시장이 없는 것이 더 문제였다. 문화시장(市長)이 몇 분 있었지만 미술관 하나 없음이 부끄럽다. 지금까지도 구월동의 문화회관이나 몇몇 문화회관 전시장이 있지만 하늘의 별따기처럼 대관 조건이 까다로운 현상황에서의 전시 공간은 더 늘어나야 되겠지만 전혀 비영리적으로 문을 열 수 없는 것이 경영자의 입장이고 보면 각 기초자치단체에서 문화기반시설을 보전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한다.
근래에 와 생겼다 문닫은 '사임당', '인천' 화랑도 있었지만 오래도록 남아있는 '인천갤러리'가 되어 중구(신포동)에 있을 것은 다 있는데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어졌다는 말을 부지불식 시켰으면 하는 마음 간절 또 간절하다. 장수하길 빈다.
/김학균 시인·前 인천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