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암사동 유적 세계유산 등재 기원 문학작품 공모전 동화부문]
우수상
빗살무늬 두더지 / 김완수
‘두두두! 두두두! 두두두! 두두두!’
오늘도 어김없이 두두가 암사동 놀이터에 모습을 보이려나 봐요. 소심하지만 참을성 많은 두더지 두두가 나타날 때면 이렇게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곤 했지요. 그런데 오늘따라 두두의 등장 소리가 더 크고 빠르게 들리는 걸 보면 오늘 두두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해요. 두두는 땅굴 파기의 도사인데, 평소 햇빛을 싫어하는 두두가 이렇게 밤중이 아닌데도 호들갑을 떨며 나타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지요. 착하지만 장난기 많은 털복숭이 강아지 컹컹이는 땅속이 파헤쳐져 흙무더기가 만들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두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어요. 순간 땅속이 잠시 잠잠해지더니 이윽고 뻥 뚫린 구멍에서 흙빛의 몸빛을 띤 두두가 제 길고 뾰족한 주둥이를 쑥 내밀었어요.
“컹컹이가 와 있었구나?”
해 질 녘이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햇빛 탓에 작은 눈을 가늘게 뜬 두두가 컹컹이를 보며 반가워했어요. 그런데 컹컹이는 두두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두두의 발밑에 웬 낯선 물건이 삐죽 불거져 나와 있었던 거예요. 컹컹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건을 내려다보자 두두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어요.
“아, 이거? 내가 어제 집을 고치려고 땅속을 깊이 파 들어가는데, 뭔가 발에 걸려서 자세 히 봤더니 이게 나오지 뭐야. 아이, 피곤하다.”
두두가 하품을 늘어지게 했어요.
“근데 이걸 어디에 쓰려구?”
“처음엔 그냥 놔둘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게 꼭 필요할 것 같더라구. 그동안 내가 땅 위에서 너희들과 놀 시간이 별로 없었잖아. 근데 안이 텅 빈 이것을 보니까 내가 안에 들어가 있으면 너희들과 실컷 얘기를 하며 놀 수 있겠더라구. 그래서 너희들에게 한 번 보여 주려고 가져와 본 거야.”
두두가 말을 마치자마자 허리를 구부려 삐죽 나온 물건의 모서리를 잡고 힘껏 끌어 올렸어요. 컹컹이가 도와주자 두두의 말대로 곧 아랫부분이 갸름하고 안이 깊숙이 들어간 항아리 같은 물건이 보였지요.
“어유, 무거워서 혼났네.”
두두가 물건 앞에 털썩 주저앉고는 한숨을 쉬며 땀을 닦았어요. 컹컹이는 낯선 물건에 다가가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킁킁 맡아 보다가 다시 한 발짝 떨어져서 물건을 꼼꼼히 살펴봤어요.
“금이 좀 갔지만, 신기하게 생겼다……근데 이건 뭐지? 겉면에 무슨 무늬 같은 것이 있는 데?”
하지만 두두는 별 관심을 안 보이고 마냥 행복한 표정만 지었어요.
“앙큼이가 좋아하는 생선뼈 같기도 하고 물결 무늬 같기도 한데, 참 희한하다. 너도 한 번 봐 봐!”
그제야 두두는 고개를 돌려 물건을 힐끗 바라봤어요.
“땅속에 오래 있어서 돌 같은 것에 긁힌 거겠지. 햇빛만 가리면 되니까 나한텐 아무 상관없 어.”
두두가 건성으로 말하고는 제집 드나들듯 신나게 물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어요. 컹컹이는 물건을 바라보며 계속 고개만 갸웃거렸지요.
“이거 혹시 부적이 아닐까? 승리의 V자 같이 생긴 걸 보면 분명 무슨 부적이 틀림없어. 봐, 아랫부분에 이상한 구멍도 숭숭 뚫려 있잖아!”
“정말?”
물건 안에서 막 빠져나와 다시 들어가려던 두두가 구멍이라는 말에 냉큼 컹컹이의 곁으로 와 물건을 살펴봤어요.
“이건 분명 땅속에 사는 거인이 싸울 때 이기려고 구멍 사이를 끈으로 묶어서 목걸이로 사용했을 거야.”
“땅속에 거인이 어떻게 산다고 그런 무서운 말을 해? 그리고 아무리 거인이라도 이렇게 무거운 것을 목걸이로 사용할 수 있겠어?”
두두가 큰소리를 쳤지만, 어느새 얼굴은 겁에 질려 잔뜩 굳어 있었어요.
“그럼 이따가 앙큼이가 돌아오면 물어보자. 좀 엉뚱하긴 해도 앙큼이는 밖을 많이 돌아다 녔으니까 이게 뭔지 알 수 있지 않겠어?”
“그래, 그럼 나는 그동안 땅속에서 잠시 쉬다가 나올게……아니다. 그냥 이 안에서 한숨 자고 있을 테니까 이따가 깨워 줘.”
두두가 갑자기 땅속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했어요. 두두는 재빨리 자기가 뚫고 나온 구멍을 흙으로 메우고는 냉큼 물건 안으로 들어갔지요. 컹컹이는 그런 두두를 보고 피식 웃었어요.
엉뚱하지만 영리한 고양이 앙큼이가 사냥을 나갔다가 밤늦게서야 돌아올 때까지 두두는 물건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어요. 앙큼이는 물건을 보자마자 꼬리를 살랑거리며 호기심을 보였어요.
“두두가 정말 이렇게 신기하게 생긴 것을 땅속에서 발견했단 말야? 어, 이건 내가 좋아하 는 생선뼈 같은데?”
앙큼이가 물건 겉면에 새겨진 무늬에 입을 가져가며 말했어요. 그런데 컹컹이에게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어요.
“그건 물결 무늬야!”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앙큼이가 순간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어요. 그때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두두가 눈을 비비며 물건 안에서 나왔어요.
“앙큼이 왔구나? 네가 보기엔 이게 뭐 같니?”
고개만 갸우뚱하던 앙큼이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건 쪽으로 다가가더니 날카로운 발톱으로 물건의 겉면을 긁기 시작했어요.
“뭐하는 거야?”
두두와 컹컹이가 동시에 소리쳤어요.
“누군가 그린 그림일 수도 있잖아! 나도 한 번 그려 볼까 하구.”
그런데 두두와 컹컹이가 앙큼이의 엉뚱함에 아무 말도 못할 적 갑자기 저만치서 땅이 요란하게 파헤쳐지더니 꼬리는 짧은데, 기다란 귀와 뒷다리를 가진 동물이 커다랗게 뚫린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냈어요. 세 친구는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어요.
“거, 거인이다!”
두두가 벌벌 떨자 컹컹이와 앙큼이도 잔뜩 겁을 집어먹었어요. 낯선 동물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몸을 탈탈 털고는 벌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세 친구를 바라보며 입을 씰룩거렸어요.
“거인?……난 땅속에서 화석으로 살던 토끼라고 해. 아주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자고 있었 는데, 아까부터 땅이 울려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나는 오늘 너를 처음 보는데?”
두두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거야 당연하지. 너와 난 사는 층수가 다른데. 어, 근데 그건 빗살무늬 토기 아냐?”
세 친구는 토끼의 말에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어요. 두두는 혹시라도 토끼가 자기의 물건을 탐내지는 않을까 걱정돼 가슴이 조마조마해졌어요. 토끼는 물건 쪽으로 껑충껑충 뛰어가더니 물건을 쭉 훑어봤어요.
“와, 정말 오랜만에 토기를 보는구나. 이 귀한 걸 어디서 구한 거니?”
두두는 경계의 눈을 뜨고 물건 옆에 바짝 붙어 섰어요.
“땅속에서 구한 건데, 땅 위에서 지낼 집으로 쓰려고 가져온 거야.”
“집? 너희들은 이게 뭔지 알고 그러는 거야?”
세 친구는 토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멀뚱멀뚱 떴어요.
“이건 신석기시대라는 먼 옛날에 살던 사람들의 도구야. 빗살무늬 토기라고 해서 그때 사 람들이 물가에 집을 지어 농경 생활을 하면서 주로 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쓰던 것이지.”
“토기? 네 이름과 비슷하구나? 근데 거인이나 우리 두더지 조상들이 쓰던 게 아니라 사람 들이 쓰던 거라구?”
두두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그러엄! 흙으로 만든 그릇이란 뜻인데, 사람들이 불에 굽고서 시문구라는 도구로 무늬를 새기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
“와, 정말? 부럽다. 그럼 네 나이는 도대체 몇 살인 거야?”
컹컹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어요.
“지금 토끼들의 조상이고 너희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너희들과는 그냥 친구로 지내 면 좋겠어.”
토끼가 껄껄 웃었어요.
“궁금한 것들이 있는데, 물어봐도 돼?”
앙큼이가 나서서 토끼에게 묻자 토끼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어요.
“이 토기는 왜 밑이 뾰족한 거야? 또 어떤 무늬길래 이렇게 예쁘게 그려져 있는 거야?”
“넌 참 호기심이 많은 친구구나? 그런데 그 이유는 너희들이 곧 알게 될 거야.”
세 친구는 눈만 끔뻑거렸어요.
“오랫만에 세상으로 나왔더니 피곤하다. 나는 이제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야겠어. 그럼 또 보자. 안녕!”
토끼가 갑자기 세 친구에게 인사하고 구멍 쪽으로 껑충껑충 뛰어가더니 아까 모습을 나타낼 때처럼 순식간에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어요. 세 친구는 토끼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토기 앞에 옹기종기 모였어요. 잠시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앙큼이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토끼가 왜 답을 안 알려 주고 갔을까?”
“난 꼭 무슨 귀신을 본 것 같아. 아무래도 부정 탈 것 같은데, 땅속에 도로 갖다 놓는 건 어때?”
컹컹이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하자 두두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어요.
“아냐, 난 낮에도 이 안에서 세상 구경을 하며 너희들과 놀 거야.”
그때 앙큼이의 눈이 반짝였어요.
“우리 이것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이 근처에 강이 있는데, 물가의 부드러운 땅이라면 세울 수 있지 않겠어?”
앙큼이가 강 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두두의 얼굴이 심각해졌어요.
“그러면 내가 이 안을 드나들기 불편할 것 같은데?”
“앙큼이 생각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서운 것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서 널 괴롭 힐 수도 있잖아. 또 강가도 구경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두두는 컹컹이의 말에 잠시 무서운 생각이 들어 몸을 움츠렸지만, 곧 얼굴이 환해졌어요.
“좋아, 대신 이것을 강가까지 옮기는 데 너희들이 좀 도와줄 수 있겠니?”
“물론이지. 내일 해가 질 때쯤 다시 여기 모여서 함께 끌고 가 보자.”
컹컹이와 앙큼이가 선뜻 대답하자 두두는 고마운 마음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어요. 그리고 세 친구는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어둠 속으로 뿔뿔이 헤어졌어요.
“영차! 영차!”
세 친구는 토기 밑부분에 난 구멍들을 끈 하나로 묶어 양 끝을 밖으로 길게 늘어뜨리고는 힘을 합쳐 끈을 잡아당기며 토기를 강가까지 끌고 갔어요. 모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강가에 이르자 세 친구는 흐뭇한 얼굴로 강가에서 땀을 시원하게 씻어 냈어요. 물을 무서워하는 앙큼이는 손에 물을 살짝 묻혀 고양이 세수를 했지요. 세 친구는 다시 토기 쪽으로 가 끈을 풀어냈어요. 두두가 토기 밑부분이 묻힐 만큼 무른 땅을 파내자 컹컹이와 앙큼이는 기합을 넣어 가며 힘껏 토기를 일으켰어요. 그리고 컹컹이와 앙큼이가 양쪽에서 토기를 붙잡고 있는 사이에 두두가 재빨리 흙을 메워 토기를 고정시켰지요. 토기가 반듯이 서자 세 친구는 동시에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어요. 그런데 토기 앞에 서 있던 두두가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처럼 토기를 힘껏 껴안았어요.
“지금 뭐 하는 거야?”
컹컹이의 눈이 동그래졌어요.
“토끼 말대로 사람들이 쓰던 거라면 뭔가 특별한 뜻이 있지 않겠어? 내 가슴에 무늬가 새겨 질지 모르니까 꼭 껴안고 있어 보려구. 혹시 알아? 내 가슴에 빗살무늬가 새겨지면 나도 너 희들처럼 낮에도 땅 위에서 맘껏 뛰놀 수 있을지.”
컹컹이와 앙큼이는 두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가을밤이라 주위에 제법 한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몸이 으스스해진 세 친구는 궁리 끝에 토기 앞에서 불을 지피기로 마음먹었어요. 여전히 토기를 껴안은 채 서 있는 두두를 위해서이기도 했지요. 컹컹이가 주위에 있는 낙엽들과 나뭇가지를 모아 입으로 물고 오자 앙큼이가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열심히 비벼댔어요. 얼마 안 있어 거짓말처럼 불꽃이 일더니 드디어 불이 피워지기 시작했어요. 세 친구는 또 환호성을 질렀지요. 불길이 점점 세져 온기가 감돌자 모두 행복한 미소를 지었어요. 불기운으로 두두의 엉덩이가 발그레해졌지만, 두두는 환한 달밤 아래서 토기를 꼭 껴안은 채 제 가슴에 따뜻한 빗살무늬를 새겨 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