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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60대 원문보기 글쓴이: 예나지나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에 형형색색의 고운님들이 속속 모였다.
조별로 늘어선 그 중에는 물보라마음님도 한머니님 덕양님 한산님 그 외에 평소 익히 잘 아는 얼굴들이 있다.
지기님과 해정이님이 바쁘다.
귀중품과 여권은 잘 챙겨야 한다. 대열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담당 여행사 직원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허기야 대부분님들이 해외여행을 어디 한두 번 했겠는가,
그래도 두 번 세 번 강조하고 강조해도 설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여행방 주선으로 인천에서 10:05분발 베트남 항공 vn417를 타기 위해 모인 아름다운 60카페 회원 49명이다.
베트남 현지 시간 12:00, 베트남 수도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 도착 했다.
두 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네 시간이 걸린 셈,
공항 규모야 작았고,
우기라기 보담 열대지방 특유의 스콜현상으로 비가 온 듯 땅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기온을 보니 32도이다. 후덥지근했지만 습기가 많은 나라의 그늘은 시원하다.
첫인상, 글쎄다. 중국이나 동남아 대부분의 특유의 향 때문인지 신선하지는 않았다.
업은 아이 3년 찾는다 했는가, 차에 실려 있는 여행 가방을 공항에 두고 왔노라고 삼십 여분을 지체했다.
도착해서부터 목이 말랐는데 생수만 먹되 조금씩 자주 마시라는 가이드의 말이다.
아쿠아피아 상표 생수의 맛이 그나마 잘 팔리는 생수인가 보다.
단체여행에서는 무엇보담 가이드 말을 경청하고 잘 따라야 한다.
여권과 귀중품은 수시로 체크하라, 개인행동은 금물이다. 안전사고 예방 등등
스마트폰으로 사진 한 장 한국으로 전송하는데 4만원이래나,
이곳에서 살면서 가이드생활 10년이라는 문규호가이드,
옛날 초창기 친절했던 가이드완 달리 자기말만 들으라고 거들을 떤다.
허긴 한 가지를 더 알고 보려면 가이드의 비위를 잘 맞추어 줘야하는 게 단체여행이니깐,
베트남에 대한 가이드의 소개와 나의 사견을 말한다.
하노이(월남전쟁 때 월맹의 수도)는 서울의 2/3면적, 인구는 오백만이고 오토바이가 삼천오백만대나 된단다.
당연히 중국과 이웃한 나라로 젊은 국가란다.
2차 대전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면서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였지만 싸워 물리치면서 분단되었고
미국이 도미노이론으로 월남을 도와 통일을 빌미로 8년을 넘게 전쟁을 벌였지만 베트남 특유의 지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전하여 물러났고 그 후 중국이 베트남을 넘봤지만 역시 물리친 베트남이 아닌가,
해서 전쟁으로 많은 남자들이 죽어(전쟁으로 베트남인 사백만이 죽었다함)
후손들이 국민의 주를 이루니 그럴 법도 하다.
해서 베트남은 잠재력의 나라로 인적자원은 물론 지상 지하자원(안남미 2모작, 밭농사도 두 번 하면서
풍부한 쌀과 채소는 물론이고 석유, 금, 고무, 석회석, 열대 아열대가 공존해 밀림의 원목과 과일
거기에 인도차이나 긴 바다를 가져 수산물 등)이 풍부한 지금은 가난하지만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 나라,
일 하지 않아도 굶지 않는 나라, 행복지수가 세계3위의 미래의 나라
어쩌면 20여년 후에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져 있을 나라가 베트남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을 좀 배우고 교육수준만 높아진다면
충분히 미래가 보장된 나라임엔 틀림없을 것이다.
솔직히 월남전 당시 많은 군인을 파견하여 미국을 도와 함께 싸우면서 별별 짓을 다한 우리나라를
처음엔 고운 시선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런 월남이 작금에 우리와 가까워진 이유는 우리의 꾸준한 노력과 도움 즉 공동개발과 협력을 통하여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준 결과 일 것이다.
이미 많은 공장과 도로건설을 해 주었고 대기업 롯데의 진출로 그들의 시각과 입맛을 맞추고 있었고
가장 높은 74층 높이의 빌딩을 우리가 지어주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공산사회주의 국가지만 중국식 공산주의를 멀리한 호치민이 그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만도 그렇다.
당시 월맹의 호치민은 총각으로 죽기까지 미국을 업고 통일을 시도한 당시 월남 고엔디엠 정부의 부정과는 달리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와 사랑으로 베트남을 통일시킨 그였기에 국민들의 추앙을 받음은 당연한 것이다.
물론 전쟁의 비극적 상흔이 남아 오늘 베트남 사회를 좀 먹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54개 소수민족이 사는 베트남에서 프랑스계 미국계 거기에 한국계 혼혈인의 문제
특히 미국계 2세들의 마피아조직 등은 꾸준한 자국의 노력 없이는 해결이 어려울 것이다.
또한 성숙하지 못한 국민의식 이나 질서의식 또한 하루바삐 교육을 통하여 함양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베트남의 경제권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있다.
여자가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고 남자들은 다만 전쟁이 나면 군인으로 싸우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것 같음(그만큼 전쟁이 많았음),
거기에 일부다처과 인정되는, 최근엔 여성들 자존심이 매우 강해져 이혼율이 굉장히 높아졌다고 함.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동력이 무엇이었는가를,
서독에 광부로 간호사로 우리의 인력을 파견하였고 가발을 만들어 수출에 기여했는가 하면
월남전에 삼십이만오천을 파병하여 수많은 희생을 감내한 것들이
그 동력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9월2일은 호치민이 베트남 전쟁을 승리한 날로 베트남 독립기념일이다.
3일간 연휴라는데 때를 맞추어 잘 가긴했지만 호치민 묘소는 참배치 못하였다.
개방을 앞둔 준비 기간이었기 때문에 통제되고 있었다.
시가지는 온통 오토바이와 전동차 그리고 전동손수레로 가득했고
골목마다 다른 상풍을 판다는 재래시장 36골목의 붐비는 진풍경이 이채롭다.
폭은 좁고 2,000키로의 해안선을 가진 긴나라, 그래서 그들은 집을 좁고 길게 만드나 보다.
옥상엔 쉴 공간을 만들고 집 전면은 각양가색의 색깔로 장식한다.
tv를 켜면 ytn이 나오고 각시탈이 나오는 오늘의 베트남이다.
도착하여 처음 먹는 점심은 쌀국수,
한국에서도 파는 쌀국수 많이들 먹어본 모양이다.
지기님과 몇 명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모양,
점심을 먹고 하노이 시내관광을 나섰다.
공자를 모시는 문학사원과 옥산사원을 관람 후 하롱베이로 이동한다.
문학사원,
문학사원의 문묘는 11세기에 지어진 대학으로 종교를 초월해 공자를 숭배하는
우리나라의 성균관 같은 곳이다.
연못을 끼고 긴 정원을 들어가다 왼쪽에 보면 거북 비석이 있는데
아마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한 듯,
문묘의 다섯 문은 삼강오륜을 접목 시킨 듯, 붉은 칠은 학문을 잘 닦으라는 의미요,
잉어 모양의 지붕은 잡귀를 쫓기 위함인 듯하다.
만세사표(온 세상의 스승)라고 붙은 사당엔 공자와 4명의 제자인 맹자, 증자, 자사, 인자의 상이 있었다.
사당에서 하마탑까지 시원스런 정원이 펼쳐져 아름다움을 더 한다.
옥산사원과 호안키엠 호수,
호수의 신에게 받은 검으로 전쟁에 이기고 돌아와 검을 돌려주려 하자 호수에 사는 거북이 검을 물고 갔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검을 돌려준다는 뜻을 가진 호안키엠 호수는 아침에는 상쾌한 바람이,
낮에는 시원한 나무그늘이 있고, 밤에는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남녀노소
모든 시민의 사랑을 받는 곳인 것 같다.
아직도 호수엔 거북이가 살고 있다 하는데 이 곳 중앙에 옥산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한국식당 서울가든에서 양주인 소주와 함께 삼겹살 구워 석식을 마치니 21:26이다.
몽탄하롱 호텔로 이동 조별로 모여 오는 도중에 사 온 과일 ‘나’와 ‘망고’ 파티 후 첫날밤을 보낸다.
2일차,
06:00 모닝콜,
아침 호텔 조식 후 벽계수님의 지도로 아침체조를 마치고
하롱베이로 이동 유람선 두 대로 관광을 시작한다.
하롱베이, 이 곳 사람들은 하롱바이라 그런다.
3,000여개의 섬 때문인지 파도가 없고, 갈매기가 없는 바다,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하롱베이는 물에 석회질이 많아 바다 특유의 짠 냄새가 없어
관광하기에 쾌적하다.
암탁과 숫탁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독수리 바위의 위용이 시야로 닥아온다.
티톰섬의 가파른 계단은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수 있는 넓이로 가쁜 숨 몰아쉬며 올라간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롱베이는 전체는 아니더라도 그저 아담한 자연경관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한려수도를 보는 것 같은 느낌, 해수욕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 한 곳, 바로 승솥으로 불리는 원숭이 섬이다.
하롱베이을 어떻게 설명할까?
승솥(원숭이섬)을 어떻게 묘사할까?
바다의 백록담이라면 어떨까, 조물주께서 여기에 이런 신비함을 만들어 놓았구나,
바다에 원형의 섬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신기하게도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하나 동굴만 있다.
모터보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고 오직 노를 저어 들어가는 동굴이다.
어디로 갔는지 절벽에 매달려 관광객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과일이나 먹이를 잽싸게 빼앗아 간다는
원숭이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장관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007 영화가 이런 곳을 놓치겠는가,
연신 구명쪼끼를 입고 10여명을 태운 배는 들어오고 나간다.
199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롱베이는 용이 내려와 앉았다는 전설의 지형으로
물 색갈이 온통 비취빛을 띄우고 있어 더욱 아름답다.
선상에서 점심으로 먹은 활어회가 다금바리라 하는데 우리나라 제주산 다금바리의 맛은 아니고,
모터보트를 모는 친구 무에 그리 바쁜지,
여러 절경을 사진 찍을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도니 은근히 성질도 난다. 말이 통해야 천천히 운전하라고 조르지,
하늘문, 낙타바위, 물소바위 등 갖가지 형상들이 자꾸만 시야로 다가 오고,
천궁동굴,
가파른 언덕에 천궁동굴로 불리는 동굴이 있었다.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석회석 동굴로 하롱 부두에서 남서쪽 4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 동굴이다.
주변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착장에서 내려, 입장권을 받고 가파른 돌계단과 숲으로 이어진 천궁동굴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
동굴의 좁은 입구에 도착한다. 동굴 안에 들어서니 입구와는 달리 백여 미터가 넘는 길이의 웅장한 동굴내부가 드러난다.
간간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햇빛과 잘 꾸며진 내부 조명으로 환상적인 자태가 연출된다.
동굴의 중심부에 ‘하늘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높고 웅장한 천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네 개의 기둥이 이를 떠받치고 있다.
종유석이 만들어낸 돌 커튼과 여러 종유석 사이를 휘감으며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동굴에서 흘러나온 물이 돌기둥을 휘감아 내리며 세 개의 작은 연못을 만든 후 동굴 밖으로 흘러 나간다.
전통수상 인형극장,
1,000년 전부터 이어온 베트남 수상인형극은 별로 즐길 거리가 없는 베트남인들의 심심함을 달랬다고 한다.
당연히 수상인형극을 하는 사람들을 장인으로 아주 높이 평가한다고 합니다.
단, 여자에겐 절대로 저 기술을 전수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다른 남자에게로 가서 기술이 전수될까 두려워서이다.
공연을 마치면 연출자들이 모두 나와 인사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베트남에 가면 한번쯤은 반드시 보아야 할 구경이 아니겠는가,
뷔페식으로 석식을 마치고 발마사지 후 호텔로 이동한다.
나의 발을 맛사지 해주는 25세의 아주 앳된 여자 발마사지사,
신랑이 있느냐 물으니 모터바이를 타다가 작년에 죽었다면서 하는 말,
‘아주 많이 잠자고 있어요.’ 한다.
3일차,
아침을 먹고 전용차량으로 다시 하노이로 이동했다.
호치민 영묘 분묘 방문 국경일이라 관람은 못하고 겉으로만 봄.
한기둥사원 관람
한 개의 기둥위에 새워진 사원이라 한기둥사원이며 '일주사'로 불린다.
베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하노이를 상징하는 곳이라 한다.
바딘광장(호치민묘 앞 광장),
베트남 남북통일에 일생을 바친 영웅 호치민이 잠들어있는 곳 앞의 광장이며
이곳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기념일이면 많은 베트남인들이 참배하러 오는 곳으로 아주 넓게 잘 꾸며 놓았다.
부근에 호치민 박물관도 있다.
스트리트카로 재래시장 및 구 시가지를 관광하고 분짜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
15:30분발 vn837편으로 크메르인이 사는 나라 캄보디아 씨엠립(태국을 물리쳤다의 뜻)에
도착하니 17:00가 조금 덜되었다.
시엠립 국제공항.
이름이 국제공항이지 747급의 대형여객기는 착륙이 불가능한 소규모 공항으로,
공항이 낙후한지라 게이트로 탑승 하는게 아니고 계단차를 이용.
참고로 캄보디아 공항에서 웃돈을 주는 국민은 우리 밖에 없다고 하네요.
우리 관광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버릇을 그렇게 들여왔던 것이지요.
단체 관광객들은 무조건 가이드 말을 믿고 5불씩 걷어서 바친다고 합니다.
그 댓가로 관광객들은 공항에서 비자받기 위해 줄서는 기다림 없이 바로 빠져 나오는
VIP(Very Idiotic Person=매우 바보같은 사람)대접을 받고 우쭐해 하죠.
그러면 뭘 합니까? 화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 정말 바보 같은 짓입니다.
캄보디아란 나라,
고대 부남왕조 진랍왕조를 거쳐 9세기말 야소바르만이 앙코르에 수도를 건설
1113년 수르야바르만 2세 때 크메르 예술의 최고 걸작이며,
자신의 무덤이기도 한 앙코르왓트 등의 힌두 사원을 건축했으나 1181년 불교를 받아들인
자야바르만 7세 때 앙코르톰을 건설하여 앙코르 톰을 중심으로 바이욘, 타프롬 등의
불교 사원을 건설하였다.
13세기 원나라와 태국의 침공으로 샴족(태국)이 점령하게 되자 앙코르는 종말을 맞았고
밀림에 묻혀버렸다.
1887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어 식민지가 되었고 2차 대전으로 일본의 침공이 있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다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그 후 시아누크 국왕의 끈질긴 독립 운동으로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고 비동맹 중립국이 되었다.
1965년 북 베트남을 공격한 미국과의 단교를 선언하였으나 1970년 3월 미국은 친미 론놀에게
시하누크의 공산국가 외유를 틈타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여 크메르 공화국을 수립케 하였다.
론놀은 정권을 취하면서 베트남계 주민을 박해하였다.
이 후 론놀은 1970년 4월 호치민 루트를 분쇄하기 위해 미군과 남 베트남군을 지원하기 위해 자국을 참전시켰다.
게다가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을 전역으로 확대 허락하면서 국민의 반감과 반정부 활동을 격화시켰다.
론놀의 쿠데타 이후 시하누크는 캄푸차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반론놀 공동투쟁을 호소하였는데
당시 모택동주의(마오이즘)에 심취한 폴 포트, 큐 삼판 등이 지휘하는 공산주의 세력 즉, 크메르루즈였다.
시하누크를 옹립한 폴 포드와 론놀 정권과의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1973년 3월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전하여 철수를 시작하자 론놀은 하와이로 망명하였고,
1975.4.30. 사이공이 함락되자 베트남 전쟁은 종결되었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해 1976년 1월에 캄보디아 민주 헌법을 공포하여
국명을 민주캄푸차로 개칭하였다.
이 후 크메르루즈는 화폐제도를 폐지하고 도시주민의 강제 농촌이주와 강제노동 등
극단적 공산사회 정책을 실행하였다.
이른바 반란협의자, 구정권 관계자, 도시의 부유층이나 지식층 등을 대량 학살한 킬링필드의 시작이었다.
1978년 12월 베트남군은 망명 캄보디아 난민으로부터 캄프챠 민족구국통일전선을 조직 해
크메르루주 장교로 베트남에 망명한 헨 삼린을 옹립해 폴 포트 타도를 내걸어 캄보디아에 침공했다.
시하누크는 다시 북경으로 도망갔으며, 폴 포트 등 크메르루주는 태국 국경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헨 삼린은 친베트남의 캄프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으나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라는 이유로
세계 각국의 승인을 얻을 수 없었다.
이 후 중국군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의 보복으로 베트남을 공격하지만 중국은 지형적으로 유리하고
실전경험 풍부한 베트남군에 참패하고 철수하게 되는데,
이로써 베트남은 프랑스를 이기고 미국을 이기고 중국을 이긴 나라가 되었고,
이 후 베트남 자국 사정과 동남아 국제사회의 비난 등으로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20년 캅보디아 내전은 종식되고 국제적 감시를 통하여 격동의 세월을 거친 후 시하누크의 재집권과 함께
입헌군주제가 되었고 국가명도 캄보디아로 재 개칭하였다.
*참고 :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
1975년~1979년 사이, 폴 포트의 민주캄푸차정권 시기에 크메르루즈라는 무장단체에 의해
3년7개월간 저질러진 학살을 말한다.
크메르루즈에 의한 희생자 수(병사한 사람과 굶어죽은 사람 포함해서)는 800만명 중 170만명-250만명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민주캄푸차는 종말을 고한다.
캄보디아의 저널리스트인 ‘딧 프란’은 "내가 독재정권을 탈출한 이후의 기간"이 킬링필드 시기라고 말했다.
1984년 영화 '킬링필드'는 ‘딧 프란’과 ‘하잉 응고르’가 겪은 일들을 보여준다.
석식으로 불고기를 먹고 ‘파라다이스 앙코르 빌라’호텔로 이동 셋째 날을 보낸다.
4일차,
호텔조식 후 앙코르 유적군을 보기 위해 앙코르톰 남문에 도착했다.
앙코르왓트와 함께 캄보디아 관광의 쌍벽을 이루는 앙코르톰은 한 변의 길이가 3키로나 되는
정4각형의 성으로 붉은 흙인 ‘라테라이트(홍토)’로 7미터의 성벽을 만들었고 성 밖으로는 외침이나
무단출입을 막는 너비 100여 미터의 수로로 둘러져 있다고 한다.
들어가는 입구 다리 양쪽 난간엔 돌로 조각된 수십기의 험상궂은 거인상이 대칭해 줄지어 있다.
양쪽 맨 앞에는 아홉 마리 코브라가 조각된 뱀 상이 서 있고
남문 지붕 위의 돌탑 4면에 조각된 얼굴상, 자세히 보니 온통 조각돌로 붙여 만든 집합물이다.
남문 양쪽에 붙여 세운 조각물에도 사람의 얼굴과, 받치고 있는 손 위에는
그들이 가장 숭배하는 뱀의 모양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조각되어 있다.
옛날 이 문의 문지기들은 검문을 통해 죄인과 개는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하였는데
지금은 관광 매표소가 되었고,
각 변 중앙에 문이 있으며 동문 북쪽에 또 하나의 문(승리의 문)이 있다.
각 문(고푸람)은 특징적인 인면탑으로 누문(樓門)이고,
누문 바깥쪽 통로 좌우에는 많은 석조 거인이 나가(용)를 안고
일렬로 늘어서 있다.
사방의 문에서 곧바로 뻗은 도로의 교점, 즉 도성 중심에는 중심산 사원으로서 바욘이 솟아 있다.
바이욘사원(얼굴사원) ,
바이욘사원은 불교사원이다.
모든 건물에 얼굴이 붙어 있다. 한 면 두 면 아니 사면 모두에 얼굴이,
어쩌면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었을까,
역시 하나의 돌이 아닌 여러 조각으로 조합을 이룬 건축물이다.
앙코르와트와 함께 훼손이 심해 70%가 복구불능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10년 계약으로
현재3년째 복구공사 중이며 입장수입의 30%는 일본 몫이라는데 그들의 경제 논리가 놀랍다.
바푸욘 사원과 레퍼왕 테라스,레퍼왕 상은 7m의 단상 위에 있었던 조각상으로
원품은 프놈펜의 중앙박물관 정원 한가운데에 있다고 하고,
우아한 수염을 가진 온화한 모습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고 레퍼(Leper)왕이란,
‘문둥병왕’을 말하며 전설에 의하면 한 승려가 왕 앞에서 엎드리기를 거부하자
왕이 칼을 던져 그를 죽였는데 그의 피가 튀어 왕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한다.
화장터 크레앙은 실물크기의 코끼리테라스를 지나면서 보았는데
가이드의 여행객에 대한 배려는 그저 빨리 보고 지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프롬사원(나무사원)
토픽뉴스나 사진으로만 보던 신기한 나무였는데 직접보고 만져보고,
배경으로 한 컷도 찍어본다. 줄서서 기다려야 한 장을 찍는다.
지기님, 사진 찍는 열성이 대단하다.
서서 찍고 앉아서 찍고 누워서 찍고 엎드려서 찍고,
한머니님의 고전무는 한국관광객이 지나가면 이름모를 악기로 타는
그들의 아리랑에 맞춰 여기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가이드는 갈길을 재촉하고.
언제 시간과 여유 되면 단체여행 말고 천천히 여유 부리며 몇 명이 함께 다시 돌아보고 싶다.
여행의 매력이면서 마력이 이런 건가,
여하튼 '타프롬 사원'과 담을 휘감은 ‘자이언트 팜’ 나무에 감탄사 연발,
3년만 자라도 엄청나게 큰 다고 하는 나무의 무서운 성장속도 설명에 다시 한 번 놀란다.
프랑스 식민지 때 프랑스 생태학자들은 성장억제제를 투여하면서도 자연의 파괴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서 방치를 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현지식으로 중식을 먹고 앙코르톰에서 전동차인 에코카를 타고 앙코르와트 도착했다.
앙코르왓트,
세계7대 불가사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앙코르왓트는 언제까지 건재 할 것인가,
앙코르 와트 군데군데의 기둥마다에는 천녀 또는 압사라라고 불리는 조각들이 새겨져있다.
외부인의 침입을 막고, 생활용수로 쓰기위해 해자를 만들었고,
입구에서 참배길을 한참 걸어가야 본 사원을 들어가는데.
캄보디아가 국기에 그려진 앙코르왓트, 캄보디아의 자랑 중 자랑이다.
다섯 개의 탑은 인도 신화에서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메루산을 상징한다는데,
앙코르 와트가 크메르 왕국의 수도 중심지에 세워진 만큼 잘 어울리는 탑이다.
앙코르와트에는 모두 네 개의 회랑이 있는데,
벽마다 이렇게 힌두교 신화속의 전투나 크메르 왕조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것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앙코르와트를 만들 당시가 크메르 왕조의 황금기이지요.
얼핏 보아 수영장 같아 보이는 복판 장방형 큰 구조물은 치료의 목적으로 목욕을 한 곳이라고 한다.
천 년 전 이 돌덩이들을 어디서 가지고 왔으며 시멘트 없이,
로마양식의 아치형 건물을 그리고 무게를 지탱할 특수한 공법 없이 쌓아 만들었으니
그냥 감탄만이 전부다.
사암들을 강을 통해 수송했거나, 코끼리 아니면 인력을 사용했을 것이고,
지금의 기술로도 300년이 걸린다는 이 건축물을 40년 만에 완공한 것이 놀랍다.
앙코르와트 발견당시 크메르인이 아닌 로마인들이 만든 유적이라고 생각한 프랑스 학자도 있었다 한다.
사원 앞 광장에서 고 앙드레김이 패션쇼도 열었다고 한다.
보석의방에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석을 찾아도 보고, 통곡의방에선 소리도 질러보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으리라.
건축물과 조각 하나하나에 크메르인의 생활과 문화와 그들의 우주 신앙관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는 듯하다.
11월에서3월 건기가 무덥고 습한 날씨를 피할 수 있어 앙코르왓트 여행적기라는데,
관람 내 내 내리지 않던 비가 관람을 마치고 전용버스로 가는 중에 쏟아지기 시작한다.
프롬바켕(중앙산)사원,
고 유적지 프롬바켕사원,
영화 ‘튬레이더’에서 보던 건물군이다.
저렇게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을 유적이 세월의 풍상과 침략으로 본래의 모습을
차츰 차츰 잃어버리고 무너지고 훼손되었다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라가 부강하지 못하여 남의 손을 빌어 복원하는 지경이 더욱 그렇다.
이곳서 보는 일몰이 그렇게 좋다고 했는데
잔뜩 낀 구름이 일몰을 도대체 보여 줄 기색이 없어 발길을 돌린다.
석식으로 압살라민속쇼를 보며 현지식 압살라디너(부페식당)를 먹었다.
압살라, 크메르 처녀를 그렇게 부른다.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천상의 무희라고 불리는 압살라들의 모습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민속춤으로써
라마야나, 공작 춤 등 캄보디아 전통 민속공연을 볼 수 있는 식당이다.
열대림 편백나무에서 생성되는 피톤치드로 상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상점 주인은 역시 한국인이었다.
설명을 듣고 체험을 하고 작은병 하나를 사서 나왔다.
가습기나 발향기를 이용 실내향으로 뿌려도 좋고 아토피피부, 무좀, 습진,
장기간 입원 등으로 생긴 등창, 욕창에도 좋다나,
이번엔 전신맛사지를 한단다.
통상 맛사지는 남자는 여성가 여자는 남성가 해 주는데,
여기 캄보디아는 남성시술사가 부족해서 인지 여자도 여성이 해 주어 별로 시원치 않았다는 후문,
연일 관광에 조금은 지친 기색들도 있다.
호텔로 가서 넷째 날을 보낸다. 소주를 한 잔하고
5일차,
조식 후 전용차량으로 톤레샵 호수로 향했다.
가는 도중 강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수상위의 집을 보면서,
오늘 보게 될 톤레샵 호수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궁금하다.
인간의 의식주 중 환경에 맞추어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지혜가 놀라운 것이다.
수상촌을 보는 날 이여서 그런지 톤레샵호수에 도착하니 하늘은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온통 황토색으로 일렁이는 물위에 부표를 띄워 집을 짓고 사는 난민촌 수상가옥.
호수라면 맑고 푸른 물을 상상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탁한 물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배가 출발하자마자 다가오는 수상촌 사람들의 모터보드,
가난하지만 모터보드는 그들의 생활 수단이기에 필요한 것이리라.
어린아이를 태우고 캔 등 음료수 과자들을 싣고 다가오는 것이다.
물건을 팔기 위하여 아니 반은 구걸하기 위하여, 어떤 아이는 목에 뱀을 감고 있고
어떤 아이는 둥근 프라스틱을 타고 저어 오기도 한다.
언제 다가 왔는지 일행이 탄 배로 쏜살같이 건너와서 손 내밀며 1불을 요구한다.
분명 거기에도 어떤 집은 꽃을 기르고 있었고 식당도 시장도 마켓도 있었고 우리기업로고의 학교,
선교사가 파송되어 운영하는 교회도 있었다.
그리고 물 위에는 도로 표지판도 방향표시도 있었다.놀라운 것은 선착장에 내 모습을 어느새
자기접시에 새겨 넣고 값을 요구하는 대는 할 말이 없다.
한식으로 중식을 먹고 와트마이(작은 킬링필드)관람
앞서 얘기한 킬링필드의 참상을 보기 위해 와트마이로 향했다.
모든게 현실로 보여졌고, 프놈펜에는 그리고 캄보디아 곳곳에는 더욱 참담한 모습의 킬링필드가
후세사람들에게 경종과 교훈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민속촌관람,
관람에 앞서 관광 상품판매소 초대방에 앉아 여러 상품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선물로 보타닉오일 등 두 가지를 세트로 샀다.
안내 팜플렛을 보니 민속촌은 21만㎥의 자연 너비에 수상부락 등 11개 소수민족 마을로 구성
다양한 건축물과 캄보디아 여러 민족들의 풍습과 관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각종 공연 관람 등
체험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
캄보디아 여행에 지쳐 있는 여행객의 마지막 관광지로 그리고 휴식처로 충분했다.
시간이 있어 재래시장과 민속촌 중에 민속촌을 선택했는데 아주 잘하였다.
여러 가지 공연 중에서 부잣집의 전통결혼식, 꼴라마을 공작새춤, 크롱마을 신랑고르기 등을 관람하였고
크메르마을의 전통축제와 프농마을의 풍년제는 볼 시간이 없었다.
혼자 사진을 이곳저곳 찍으며 간 곳이 염라동굴 귀신집 체험이었다.
다른 나라에서의 담력훈련은 혼자서는 겁이나 마침 들어오는 관광객과 함께 체험을 해보았는데
아주 리얼하게 잘 꾸며 놓았다.
민속촌 수상부락 호숫가에 앉아 메모를 한다.
캄보디아의 하늘은 참으로 맑고 아름답다.
호텔에서 밤하늘을 보니 별이 초롱초롱했다.
옛날 우리나라가 그랬지,
이곳 노동자가 하루 종일 일하고 받는 돈은 겨우 3달러 정도라 한다.
베트남처럼 자원은 풍부하겠지,
아베세 관광상품 판매소, 영어 abc를 캄보디아에서는 아베세로 발음하는가 보다.
상품판매소로 버스가 안내한다. 버스가 안내하는 건지 가이드가 안내하는 건지,
솔직히 패키지여행에서 눈살가게 하는 건 바로 가이드 아니 여행사와 현지 상품 판매소와의 연결이다.
오래전에 이곳으로 이주하여 라텍스이불 베게 등을 개발하여 판매한다는 설명이 장황하다.
시하누크왕의 별장이 있는 왕실정원의 나무에 여기 저기 매달려 있는 박쥐들이 크다.
황금박쥐라고 하는데 참인지는 모르겠고 하여간 붙은 이름 박쥐공원이다.
망원랜즈를 꺼내 담으려고 하니 비가 내렸다.
상황버섯으로 성공한 한국인,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란다.
갚지 않아도 좋지만 떼어 먹은 것에 대한 매일 매일의 스트레스는 생명을 단축시킨다나,
마지막 현지식으로 석식을 마친 후 공항으로 이동 할 것이다.
캄보디아 전통주 불개미주가 한 병에 9불이다. 맛은 별로였고,
k6822편으로 호치민(구 사이공) 공항에 도착하니 22시가 훨 넘었고
23:35분발 vn408편으로 호치민공항을 출발,
아침으로 먹는 기내식은 먹는둥 마는둥 모두들 잠자고 있었고 비행기 창문 너머로 일출을 바라본다.
인천에 도착하니 9월6일 06:40(우리나라시간)이었다.
한국 정부에서도 앙코르 지역 내 급증하는 교통 차량으로 인한 진동 유발과 대기 오염 등으로부터
유적 훼손을 방지하고 지속 가능한 활용을 지원하기 위해 2005년부터 2012년까지
1,42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유적 주변으로 36km에 이르는 순환도로를 건설하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호사다마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소지품을 잘 챙겨야 했지만 그러나 실수와 주위가 산만했음을 어쩌랴,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다한다. 똑딱이 카메라를 잃어버렸단다.
급기야 우리조 대장 산팔자님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단체여행은 서로 간 배려와 폭 넓은 이해가 무엇보담 요구된다.
아쉬운 몇 가지가 있다면 두 대의 차량, 두 대의 선박으로 나뉘어져 모두와 함께 하지 못 한 게 그렇고
하롱베이 절경을 보다 가까이서 사진에 담지 못 한 점이다.
여행내내 웃음을 짓게만든 산팔자님,
사진 찍어달래고 보채는 몇몇님들, 이제는 모두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4박을 함께한 쥐띠방 징기스칸님의 배려에도 감사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