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 이성만으로는 어떤 행동도 유발할 수 없고 어떤 의욕도 불러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추정으로는 바로 이 (이성이라는) 직능응 의욕을 막거나 어떤 정념 또는 정서를 선택하려고 싸울 역량이 없다. 이것은 (지금까지 언급된 것들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성은 우리의 정념에 상반된 방향의 충돌을 주는 것 이외에는 의욕을 막을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우리가 이 정념과 이성의 싸움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엄밀하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결코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 p160
내용: 그는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념이란 무엇인지 그의 주장을 알아보겠다. 흄은 ‘정념’이라는 용어를 ‘감정’이라는 용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정념’과 ‘정서’도 같은 의미로 쓸 때가 많다(p275) 정념이라는 단어는 다시 말해서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바로 경험(흄은 본문에서는 인상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념을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선이나 악 그리고 고통이나 쾌락으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을 직접 정념이라 말한다. 그리고 간접 정념은 같은 원리에서 유래하지만 다른 요소와 결부되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구별을 정당화할 수 없고, 더 이상 설명할 수도 없다고말하며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간접 정념들이라고 파악하고 것은 긍지, 소심, diaid(ambition), 허영심(vanity), 사랑, 미움, 질투(envy), 연민(pity), 심술(malice), 관용(generosity)등과 함께 이것들이 수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 정념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욕구(desire), 혐오(aversion), 비탄, 기쁨, 희망, 두려움, 절망, 안도(security) 등이다."
그는 경험주의자로서 철저하게 이성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이성만으로는 어떤 행동도 유발할 수 없고 어떤 의욕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이것은 결코 하나의 편협한 주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감정이 이성을 속이며 진정한 판단과 의욕을 의지를 꺽는 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흄이 간접 정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랑, 미움, 질투, 연민, 심술 등의 것들을 모두 초월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의 번뇌와 고통으로 벗어나 이생의 욕심이 없고 그 업보의 끈을 끊는 것을 해탈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며, 이러한 경지에 오른 후 죽음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고 한다.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이러한 것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흄은 이성이 정념에 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고행을 하고 수련을 쌓는 불도들은 흄이 말한 그러한 간접 정념이라 불리는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들도 또한 나와 같은 인간이고 흄과 같은 인간이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해탈이라는 경지에 도달하고자하는 의지가 이성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탈이라는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불도들은 결코 단 한번도 해탈의 경지를 경험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의 판단으로 여러 가르침을 통해서 그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 바로 간접 경험이라고 불리는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 생각하면 흄의 말처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정념 즉 해탈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세상의 기쁨이나 환희보다 더욱 좋은 행복이라는 감정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이성의 작용이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불도와 똑같은 깨달음이 있었지만 세상의 것들을 이겨내지 못해서 해탈이란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정념은 해탈의 경지가 무엇보다도 좋다고 말하고 있지만 순간의 쾌락과 눈에 보이는 만족감을 이겨내지 못하고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용이 있기에 감정은 이성을 속이는 속임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순간의 것이 최고인 것 인양 여겨지기 때문에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순간의 쾌락과 감정을 최고로 느끼게 하는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약이다. 마약을 복용하는 순가 그 사람은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최대치를 경험하게된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느끼도록 만들어간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마약이라는 물질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된다. 마약중독자들은 이성을 잃어가게 된다. 급기야 마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게 된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버리고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마약과 바꾸어가면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 가운데 마약이라는 물질의 유혹을-설사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해도-이겨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성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이성을 통해서 자신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감정은 계속해서 마약을 원하게되고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이성이라는 것이 그것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는 정 반대의 행동을 요구하게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서 중독이라는 것을 들수가 있다. 비록 마약은 아니지만 수많은 것들은 우리를 중독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중 또하나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게임이다. 게임은 마치 우리가 그 캐릭터가 되어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착각하게 하는 주원인이 바로 이 감정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캐릭터가 레벨이 상승되었을 때 느끼는 쾌감은 마치 현실의 자신이 그렇게 강해지고 대단해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서 현실은 망각한 채 살아가게 된다. 비현실 속에서 현실가운데 가져할 바람직한 감정을 잊게되고 현실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을 대신 얻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은 이와는 반대의 길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감정의 속임수에서 벗어나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감정이 이성을 속이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랑은 마치 세상의 전부가 사랑이라고 불리는 감정에 기초하여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올바른 것 인양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랑에 따라서 살아가게 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불리며 세상의 존재의 근거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완벽한 사람이라고 보이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900일정도라고 한다. 이것은 핑크렌즈 신드룸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것이 분홍빛의 색깔로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이때 이성은 감정에게 지배당하게 되고 마치 원래부터 이성은 없었던 것처럼 돼버린다. 하지만 사랑이 사라졌을 때 이성은 다시 움직이게 되고 감정에 속아서 잘못된 것들은 하나둘씩 새롭게 바꾸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한두 번 해본 사람은 다시 이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 감정을 이성을 통해서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경험이 없는 어린아이는 무엇이 달고 무엇이 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쓴 것을 입에 넣어본 아이는 그것을 통해서 쓴맛이라는 고통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다시는 그것을 입안에 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먹이려해도 이성이 그것을 미리 차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이 없는 정신장애자는 한번 그것을 맛보아서 쓰다고 느꼈을지라도 다시 그것을 입에 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에 다시 그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이성은 감정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로는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하나를 완전히 지배하게 될 때 문제가 생긴다. 흄이 말한 것처럼 이성의 판단이 서기까지 경험의 산물이 감정이 없이 이루어지면 불합리한 것으로 가게될 수 있다. 하지만 흄의 주장대로 감정이 이성을 완전히 지배하여 이성이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릴 때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감정과 이성 둘 다 무엇이 가장 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경험의 산물인 감정의 결과가 없다면 이성적인 판단 또한 내릴 수 없으므로 이성 역시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1014단어
1. 우리는 이제 직접 정념, 즉 선이나 악 그리고 고통이나 쾌락 등에서 즉가 발생하는 인상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종류의 정념은 욕구와 혐오, 비탄과 기쁨, 희망과 두려움 등이다. p145
2. 의지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우리 신체의 새로운 동작을 유발하거나 정신의 지각을 창출할 때, 우리가 느끼고 의식하는 내부 인상일 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p 145
3. 감관이나 이성을 통해 어떤 대상들의 궁극적 연관이 발견될수 있는 단일 사례는 없으며, 우리가 물체들의 상호 영향력이 의존하는 원리를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물체의 본질이나 구성을 깊이 천착할 수는 결코 없다. p146
4. 원인과 결과의 관념에 들어오는 필연성은 정신의 결정일 뿐이면, 이 결정에 따라서 정신은 한 대상에서 그 대상의 일상적 수반물로 넘어가고 하 대상의 존재에서 다른 대상의 존재를 추정한다. p146
5. 우리는 동기의 성격 등에서 대등하게 귀결되지 않을 것을 행동의 불규칙성에서 결론으로 끌어낼 수 없다. p149
6. 결과적으로 우리기 물질의 운동에서는 필연성을 인정하고, 정신이 작용에서는 필연성을 부인하는 것은 명백하게 불합리하다. p150
7.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이런 방식으로 추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지의 작용이 필연성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실제로 믿고 있으며, 그 사람이 이런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는 자신이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p151
8. 원인과 결과 등의 관념이 이 대상들의 관념과 동일하며, 또 필연적 연관은 오성의 결론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지각일 뿐이다. p 151
9. 보상과 징벌이라는 이 두 동기는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선한 행동을 낳고 악한 행동을 방지하는 기초적 원리로 가정되는 것이 틀림없다. p 156
10. 정념과 이성의 싸움을 이야기하며 이성의 편을 들고, 사람은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만큼 유덕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은 물론 심지어 일상 생활에서조차 가장 흔하다. p158
11. 첫째, 오직 이성만으로는 어떤 의지 활동의 동기도 될 수 없다. 둘째, 이성은 의지의 방향을 결정할 때 결코 정념과 상반될 수 없다. p158
12. 어떤 대상으로부터 우리가 고통이나 쾌락을 예측할 때 우리는 이에 걸맞는 형오나 집착 따위의 정서를 느끼며, 또 우리에게 이런 불만이나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을 혐오하거나. 받아들이게 된다. p159
13.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에 결코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 p160
14. 정념은 근원적 존재이며, 사람들이 원한다면 (근원적) 존재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p160
15. 정념의 기초가 거짓 가정이 아니고 또 정념이 목적을 충족시킬 수 없는 수단을ㅇ 선택하지도 않은 경우에 , 오성은 그 목적을 정당화할 수도 없고 비난할 수도 없다. p161
16. 정념들이 동시에 현전할 때 그 정념들은 서로 무관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서로 혼입되므로, 선이나 악이 욕구나 혐오 따위의 정념뿐만 아니라 그 밖의 어떤 특정 정서를 유발할 상황에 있다면, 욕구나 혐오는 새로운 힘과 격렬함을 획득할 수밖에 없다. p165
17. 부대 정서는 쉽게 지배적 정서로 전환된다는 원리에서 이런 사실이 유래되는지의 여부를 나는 확정하지 않을 것이다. p169
18. 정념을 뒷받침하며 충족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호의적이며, 이와 반대로 정념을 약화시켜 힘을 빼앗는 것은 우리에게 언짢다. p178
19. 우리가 뜻하는 이성은 전자와 같은 종류의 감정들이지만, 덩구 차분히 작용하며 기분에 어떤 혼란도 유발시키지 않는다. p181
20. 욕구는 오적 선으로 간주되는 것에서 발생하며, 혐오는 오직 악으로 간주되는 것에서 유래된다.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