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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가난 때문에 헤어진 아들, 결국 싸늘한 시체로 돌아와 | ||||||||||||||||||||||||
“불쌍한 내 아들 상동이, 장례라도 치르게 해주세요” 원주 ‘사랑의 집’ 사건 냉동고 속 시신의 친어머니, 조영실 씨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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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1명의 장애인을 친자로 입적시켜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고 감금 및 폭행을 자행한 장아무개 씨의 혐의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큰 공분을 불러일으켰었다(<함께걸음> ‘천사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기사(2012년 6월 30일 게시) 참조). 특히 2명의 장애인이 차디찬 시신으로 발견되고, 10년이 넘도록 병원 냉동고에 방치됐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겼었다. 또 2구의 시신 중 한 구는 실제 친어머니가 나타나 슬픔을 자아내기도 했다. 지금부터 풀어나갈 이야기는 수십 년 동안 찾아 헤매고 기다렸던 아들 상동이를 차가운 시신으로 만나고야 말았던 바로 그 어머니, 조영실(63) 씨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단지 조영실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벗어날 수 없는 힘겨운 가난 속에서 장애를 가진 자식을 비인가 시설에 맡길 수밖에 없는 극빈곤층의 가정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제대로 된 복지조차, 인간다운 삶조차 누리지 못하는 그들의 삶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그들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고,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폭력과 가난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오다 다른 사람에 의해 아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조영실 씨의 험난했던 삶을 이곳에 옮긴다.
제 이름은 조영실,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저는 화목한 집안에서 아무런 탈 없이 곱게 자라며 어린 시절을 보냈었죠. 그러다 제 나이 열아홉이 됐을 무렵, 나보다 12살이 많은 한 경상도 사내 한 명이 우리 집에 세를 들어와 살았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는데 그때부터 제 인생은 뭔가 잘못되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은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저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전부 의심했습니다. 저에 대한 의심은 워낙 심해 매일 같이 화를 내며 심한 잔소리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쏟아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말로만 끝내지 않았어요. 저는 매일 맞았습니다. 뺨을 때리거나 주먹으로 때렸냐고요? 아닙니다. 그 사람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이든 들고 저를 때렸습니다. 하루는 삽으로 때렸고, 하루는 몽둥이로 때렸고, 하루는 연장으로 때렸습니다. 잘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유도 없었어요. 잘못도, 이유도 그 사람이 전부 만들어냈습니다. 아팠습니다. 정말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눈물이 났어요. 하루하루 무서움에 떨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뱃속으로 상동이가 찾아왔어요. 상동이는 아픔과 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던 저에게 기적과 같은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폭행은 끊이지 않았어요. 그래도 저는 견딜 수 있었어요. 상동이가 잘못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혹시 이상한 성격이 되지는 않을까, 몸 어딘가 잘못되진 않을까, 아니면 설마…설마…. 그런 나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상동이는 뱃속에서 잘 자라주었고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어요. 그때 제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의 폭력은 계속됐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견딜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술에 취해 포대기에 싸여있는 상동이를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으로 집어던졌습니다. 그 사람에게 이유란 없어요. 길바닥에서 다 죽어가던 상동이를 이웃이 발견해 살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어요. 제가 맞더라도 상동이만은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폭력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갈 곳도, 피할 곳도 없었어요. 저와 상동이는 거의 매일 맞았습니다. 밥 먹을 때조차도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한창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할 어린아이의 뺨은 그 사람의 손찌검으로 언제나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몸은 상처와 멍투성이였습니다. 상동이의 시련은 집안에서만 그치지 않았어요. 밖에 나가도 늘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었고, 아이들은 그런 상동이를 또 때렸습니다. 상동이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에요. 상동이의 말과 행동은 또래의 다른 아이보다 뒤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이 상동이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상동이만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저는 엄마였지만 상동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났습니다. 매일 울었습니다. 견딜 수 없이 힘들었지만 우리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도망가더라도 그 사람이 쫓아와 죽일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 사람은 허리춤에 항상 칼을 차고 다녔어요. 술에 취해 칼을 휘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제 몸 이곳저곳엔 아직도 그때 칼에 입었던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칼로 머리를 찍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상처 때문에 한여름에도 밖에 나가면 머리가 시려 모자를 써야 한답니다.
그렇게 폭력을 일삼던 사람이 일은 제대로 했을까요? 그 사람은 영업용 차량 운전을 직업으로 삼던 사람이었는데 고작 며칠 만에 한 번씩 나가는 게 전부였어요. 그러면 뭐하나요. 벌어온 돈은 모조리 술값으로 써버려 정작 우리 가족이 생활할 돈은 한 푼도 없었던걸요. 우리가 가진 건 편히 쉬지도 못하는 방 한 칸뿐이었어요. 그러던 중 둘째 딸아이가 태어났고 그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하루하루가 공포와 불안의 연속이었고, 그 사람의 말과 행동, 폭력을 더는 견딜 수 없었어요. 저녁이면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그 사람을 피하려고 우리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추운 겨울밤에도 딸아이를 등에 업고 상동이는 손을 잡고 길에 서 있거나 남의 집 담벼락 아래, 처마 아래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술이 깰 때까지요. 그렇게 밤새 서 있다가 아침에 집에 들어가면 또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다가 왔느냐며 또 때렸습니다. 도망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친정집에 갈 수도 없었어요. 친정에 갔다는 얘기가 그 사람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친정집으로 그 사람이 쳐들어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기 일쑤였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친정어머니에게까지 주먹을 휘둘렀어요.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의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그렇게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요. 아니 8년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과 있었던 시간은 제 기억마저 흩뜨려 놓았기 때문이에요. 폭력과 가난은 저와 상동이와 딸아이의 몸과 마음을 만신창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죽을 각오로 그 사람에게서 도망쳤어요.수원에 있는 한 아는 사람 집에 잠깐 숨어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 공사현장식당에서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폭력과 가난으로 얼룩진 제 몸은 그런 고된 일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맞기도 엄청나게 맞았지만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질 못했고, 그 사람의 폭력을 피해 다니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며 지냈기 때문에 정신상태도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견뎌야 했어요. 저 말곤 의지할 사람이 없는 두 아이를 위해 이를 악물고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어요. 특히 상동이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상동이를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하고 내쳤습니다. 당시 세상은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장애는 곧 죄였으니까요. 상동이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받아주는 일자리는 없었어요. 그래서 상동이를 친정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같이 살고 싶었지만 세상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친정집도 형편이 나빠 상동이를 맡기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 후 저는 상동이와 다시 같이 살날을 꿈꾸며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습니다. 상동이가 보고 싶어도 친정에 갈 수 없었어요. 그 사람이 저를 찾으러 자꾸 친정집에 찾아왔기 때문이에요. 항상 칼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만약 저를 보면 그 칼로 저를 죽일지도 몰라 무서웠어요. 게다가 제 친오빠가 그 사람이 저지른 행동을 전해 듣고 화가 난 나머지 그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팼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저에 대한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음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저 하나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상동이와 제 딸, 제 친정 식구들까지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친정에서도 상동이와 같이 사는 것을 버거워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상동이를 예뻐하고 감싸고돌았지만 며느리들은 그렇지 못했거든요. 그러다 결국 올케가 제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저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상동이를 한 목사에게 맡겼습니다. 그 목사가 바로 장씨였습니다. 그렇게 상동이와 저는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친정에 맡겼을 때 저를 바라보던 상동이의 모습이 살아있는 상동이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잡았던 손을 놓지 말 것을….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상동이와 같이 살 것을…. 상동이가 장씨에게 간 뒤 1년 뒤에야 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올케는 그 사람이 좀 잠잠해지고 제 생활이 좀 나아지면 언제든지 상동이를 다시 데려올 수 있다고 했어요. 몇 년 뒤 상동이를 다시 찾기 위해 상동이를 맡겼다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장씨와 상동이가 살고 있었다던 ‘사랑의 집’은 이미 다 허물려 있었습니다. 놀란 저는 관할 구청을 찾아갔습니다. 구청에서는 담당했던 사람이 그만두고 또 교체되고 하는 바람에 사랑의 집에서 살던 아이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답변만 늘어놓을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장씨의 부인이 사는 곳은 알아낼 수 있었어요. 그 길로 곧장 그 사람을 만나러 갔습니다. 장씨의 부인은 연립주택 같은 곳에서 할머니 몇 분과 아이들 몇 명을 돌보면서 살고 있었어요. 그러나 상동이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사진을 보여줘도 그 부인은 상동이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장씨는 감옥에 있다더군요.
그래도 거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상동이의 흔적을 찾기 위해 동사무소로 가보니 어찌 된 영문인지 상동이의 주민등록은 말소됐더군요. 시설로 갔을 거라는 구청의 말을 믿고 그때부터 구청에서 일러준 인근 장애인 시설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시설에서는 내 자식을 찾으러 왔다고 해도 안에 있는 장애인들을 절대 보여줄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거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어요. 사무실 문 앞에 앉아 종일 울면서 상동이 대한 기록을 좀 찾아봐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랬더니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저에게 서류들을 내놓더니 저보고 거기서 상동이를 찾아보라는 것이었어요. 주민등록이 말소됐다면 분명 이름이 바뀌었을 텐데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앞이 막막했습니다. 그때 ‘사랑의 집’에서 그 시설로 왔던 여자아이 한 명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지만 희망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다른 시설들을 뒤져가며 상동이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렇게 지나간 세월이 3년이었어요. 3년 동안 상동이를 찾아다니다 결국 상동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고, 저는 지칠 대로 지쳐버리고 말았어요. 그 후 상동이는 제 가슴 속 깊이 박힌 응어리로 남았고, 저는 그 응어리 탓으로 생긴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갔습니다. 상동이와 헤어진 지 32년이 흐른 어느 날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티브이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티브이에서 시체를 누군가 영안실에 12년이나 버려놨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에 곧장 티브이 앞으로 달려가 티브이에서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을 유심히 봤습니다. 순간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상동이를 맡겼던 장씨. 바로 그 장씨가 나오고 있는 것이었어요.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던 그 사람, 평생 안고 살았던 상처를 남긴 바로 그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영안실에 누워 있는 저 시체가 혹시 상동이가 아닐까 하는 그런…. 곧바로 해당 방송국에 연락했고, 그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담당 피디님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 피디님이 갑자기 유전자 감식을 해보자는 제안을 하는 거예요. 설마 했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유전자 감식 결과가 나왔고 냉동고에 누워 있던 그 아이와 저의 유전자가 일치한다는 말에 저는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싸늘한 시체가 바로 상동이라는 것이었어요. 그토록 오랫동안 애타게 찾아 헤매고 기다려왔던 상동이를 그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예전처럼 엄마를 보며 미소 짓던 상동이를 만나 남은 인생을 우리 아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렇게 평생 가슴 속 깊이 품고 살았던 마지막 희망마저 무너졌습니다. 이 각박한 세상을 등진지 이미 12년이나 지난,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한 우리 불쌍한 상동이를 붙잡고 저는 목 놓아 울부짖고 말았습니다.
"이놈 상동아. 얼마나 외로웠니. 얼마나 힘들었니. 엄마 찾아오지 그랬어. 이렇게 허망하게 갈 것이었다면 엄마를 찾아오지 그랬어. 미안하다. 미안하다, 상동아. 다 이 엄마 잘못이야. 내가 다 잘못했어. 엄마를 용서해다오. 그때 꼭 잡았던 네 손을 놓았던 이 엄마를 부디 용서해다오. 상동아! 상동아!" 기가 막혔어요. 말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 저 아이를, 저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거짓으로 내 사랑하는 아이라고, 수십 년 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그 아이라고, 그렇게 기다려왔던 바로 그 상동이라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었습니다. 믿기 어려웠어요. 믿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벌어진 모든 일은 현실이었어요. 우리 상동이를 그렇게 만든 장씨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듯했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는 듯 뻔뻔한 장씨를 보니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그 수많은 세월을 보냈던 상동이를 생각하니 더 가슴 아팠습니다. 하지만 저 악마 같은 장씨도 처음에는 저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정말 장애인들을 도와주려고 시작했겠죠. 오갈 곳 없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장애인들을 그렇게 이용하려 하지는 않았겠죠. 다 이 더러운 사회, 이 세상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 거예요. "상동아!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한 우리 불쌍한 상동아! 너와 그렇게 헤어지고 엄마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단다. 잠들어 있는 엄마가 혹시 깰까 봐 배고파도 말도 하지 않고 조심조심 다니던 엄마를 위한 마음을 엄마는 아직 기억하고 있단다. 상동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 이 엄마 잘못이야. 그 긴 세월 동안 힘들고 무서운 삶을 살았을 너를 생각하니 이 엄마는 가슴이 무너지는구나. 지금도 너를 생각하면 목이 메고 눈물부터 흘러. 하지만 상동아. 이 엄마는 다시 힘을 내려 하고 있단다. 그래도 너를 다시 만났고, 내 손으로 너를 떠나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도 엄마를 다시 만났으니 이제 편히 쉬렴. 너를 이렇게 만든 이 세상에 대한 미움은 이제 다 접어두고 편히 쉬어. 다음 생에는 우리 꼭 다시 만나자꾸나. 그땐 절대 네 손 놓지 않을게. 엄마가 약속할게. 그리고 너를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사랑해, 상동아. 사랑해…우리 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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