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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질문에서 시작된 ‘우리끼리’가 아닌, 낯설고 불편한 사람들을
공감하고 환대하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
이 책은 교회에 의해 저질러진 유대인대학살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중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대학살이 교회에 의해 아무런 가책 없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런 상황들을 저자는 의심하지 않는 신앙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의 메시지를, 교리를, 신앙을, 성서를 하나님을 의심하라고 한다. 그 자체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그리고 변화된 상황에서 새롭게 제기된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라고 한다. 바른 질문은 훌륭한 답을 찾아내고, 그 답은 행위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는 제대로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교회에서 ‘우리 자신과 사람들, 우리 시대의 상황, 그리고 우리의 전통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신학’을 공부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자로서 저자는 오늘날 교회가 낯설어하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유대인은 물론이고, 성소수자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교회의 많은 일을 감당하면서도 능동적인 지위에서 대체로 제외된 여성들이 포함된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가운데 그는 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돌보며 살아가라고 주신 선물이라고 한다. 이 책으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이성적인 신학으로 찾아가는 낯선 이에 대한 공감과 환대가 교회의 존재 이유임을, 기독교 신앙인의 태도임을 이해한다.
🏫 저자 소개
클락 M. 윌리엄슨
클락 M. 윌리엄슨(Clark M. Williamson)은 트랜실배니아대학교에서 종교와 철학(B.A), 시카고대학교 신학원에서 신학(M.Div., M.A, Ph.D)을 수학하였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회 소속 목사로서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소재, 크리스천신학교(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의 부총장 및 대학원장 그리고 신학부 교수로 오랜 기간 근무하였고, 현재는 그 대학의 명예 교수이다.
기본적으로 교회신학, 대화신학, 신新과정신학, 후기-쇼아유대인대학살신학, 그리고 성서신학자이다. 수많은 논문이외에,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하나님은 결코 부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거부하셨는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만날 때》, 《이스라엘의 집에서 손님: 후기-홀로코스트 교회 신학》, 《교회와 유대 백성》과 공저로 《신뢰할 수 있고 시의성 있는 말씀: 과정신학과 설교》, 《성령의 모험: 과정신학의 관점에서 예배 안내》 등이 있다.
📜 목차
추천의 글
감사의 글
서론
1. 축복, 생명, 대화: 신학적으로 사고하기
2. 길의 방향: 계시
3. 길을 위한 빛: 성서와 전통
4. 창조자 하나님과 생명의 구속자
5. 창조, 섭리, 악
6. 함께 길을 걷는 이웃들: 인간
7. 예수 그리스도: 우리 신앙의 창시자
8. 새 생명의 성령
9. 길 위의 동료들: 교회
10. 길을 위한 도움: 설교, 성례전, 그리고 사역
11. 길의 목표
옮긴이 후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 책 속으로
성경적 기원에 충실한 기독교 신앙은 평화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이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에 의해서보다는 공동체와 함께 걷는 길이다. 생명의 길로서 그것은 사망을 거래하는 세상의 길들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다. (…) 미래를 향해 역사를 통과하며 함께 걷는 낯선 길이다.
---p.34
신학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우리 시대의 상황, 그리고 우리의 전통과의 지속적인 대화이다. 신학은 산꼭대기에 앉아서 저 아래 계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인간 삶의 투쟁을 내려다보면서, 혼자서 완전히 수립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Truth)가 아니다. 신학은 역사의 수많은 공포를 통과하면서 평화와 생명과 축복의 길을 신실하게 걷기로 작정한 공동체에 의해 생성된다.
---p.47
불행하게도 기독교의 도덕적 담론 역사에 우리에게 위탁되어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은 이들 이웃 중에 유대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기독교로 개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백성일 뿐이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슬픈 기록을 보면,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의무를 거의 실감하지 못했고, 그들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였다. 따라서 신학은 유대인, 여성, 환경, 그리고 우리의 모호한 역사 속의 모든 “소외된 타자”와 관련하여,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을 다시 시작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p.60
기독교 전통은 하나의 석비(石碑)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창조적이고, 자기-비평적이며, 수정 가능한 사회사적 탐구 과정이다. 그것은 앞선 세대들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들에 대해 구원의 말을 거는 방식들을 찾아낸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 세대를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이며, 이를 성실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p.65
교회는 아주 오랫동안 이 다른 점을 수용하는데 있어 매우 인색했다. 우리는 차이를 상호 축복의 기회로 삼기보다, 외계인 대하듯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유대인, 여성, 성소수자, 소수민족, 타종교의 구원, 생태계 자연, 다른 종파의 기독교들은 우리와 상종할 수 없는 표적이 되어, 우리는 그들을 헐뜯고 악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을 줄곧 보여 왔다.
우리가 만일 안녕과 샬롬(평화)으로 모든 피조물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목적의 정황에서 기독교 이야기를 재배치하여 이해한다면, 다름은 무조건 나쁘다는 우리의 악한 성향을 능히 극복하고, 그들과 화해가 신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pp.136,137
하나님은 바르게-세움의 하나님이요, 사물을 올바르게 세우시려는 의도를 지닌 하나님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될 필요가 있으며,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는 깊은 자아-거부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우리 이웃들을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 단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소외되었던 다른 단체들과 화해될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하나님의 집 “안의 사람”과 “바깥 사람” 사이에 놓여있는 “분단의 벽(막힌 담)”을 허무는 것을 하나님의 화해행위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상호간에 그리고 하나님에게 화해된다(엡2:11-22).
---pp.171,172
우리 시대는 하나님을 어떻게 진술해야 하는가에 관련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은유 사용과 관련한 중요한 이슈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같이 진술하는 방식 때문에 상당히 곤란을 겪고 있다. (…) 신학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타자이며, 딱 잘라 말해서 고유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본성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껏해야 그분들이 하실 수 있는 선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사랑하고,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이지도 않고 왜곡되지도 않는다. 그의 사랑은 순수하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어머니-사랑의 언어로든 혹은 아버지-사랑의 언어로든 표현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p.175
모든 인간이 이성애자는 아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게이 남자와 레즈비언의 지위에 대한 질문은 논쟁적인 이슈이다. (…)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 행위에 의해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 사이에서 의로워져서 궁극적으로는 화해된다. (…) 하나님은 지금 있는 그대로 우리를 창조하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활기차게 살 수 있게 하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결혼한 성직자들에게는 정절을, 독신자에게는 금욕을 요구하면서 “틀을 깬 개방적인” 게이 남자들과 레즈비언들의 성직 서품을 거절한다. (…) 이런 실행의 옹호자들이 빈번하게 주장하는 것은 소돔의 죄가 동성애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J. 제랄드 잔젠은 “소돔의 시험은 (천사들에 대한) 환대의 그 문제를 완전히 뒤집는다"고 말한다. 마티 스테어시는 “손님들의 윤간은 성적 취향과는 아무 상관없는 성폭력”으로 논평한다. 그녀는 에스겔 16:49이 소돔의 죄악을 동성애로 돌리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 너의 아우(자매) 소돔의 죄는 풍족한 음식물이 있었음에도, 교만과 태만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돌보지 않았다.”
---p.269
성과 성행위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일반적으로 기대된 것보다 훨씬 덜 명료하다. 반(反)동성애와 반(反)레즈비언 입장을 방어할 요량으로 인용된 증거-본문들은 이미 그의 명확함을 상실했으며, 신약성서의 유일하게 명확한 구절도 그 사용법이 서로 상충된다.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온 몇몇 구절들(남성의 정자 보존; 가족 구성원들의 성에 대한 가장의 소유권)의 이면에 놓여있는 윤리적 추론도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분명하게 비난받고 있는 한 가지, 곧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에 맺은 언약에 대한 충성의 위반은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파기한다고 생각하는 언약 폐기자들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사회 안에서 불일치가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논의에 참여하는 모든 당사자들이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간에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결함과 안녕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거부이다.
---pp.275,276
예수가 이끌었던 운동은 차별이 없는 평등주의였다. 누구에게나 “안”과 “밖”간에 경계가 없었으며, 합류하는 데 있어서 절차의 요구가 없었으며, (쿰란 공동체와는 현저하게 대조를 이루며) 정결예식에 대해 뚜렷한 관심도 없었다. 그 운동은 잃어버린 양, 빈곤한 자, 천한 자들을 겨냥했고, 성별과 상관없이 모든 이를 포함하였다. 복음서에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이방인에게(panta ta ethne)” 가라는 명령(마 28:19)과 함께 이 운동의 포용성을 지속하고 넓혀 나간다. 그분의 운동은 이런 의미에서 평등주의였다.
---p.344
반유대교의 억압 이념으로부터 해방된, 예수는 억압으로부터의 모든 이의 진정한 해방자로서 수행할 수 있다. 반유대교로부터 해방된 예수는 모든 하찮은 자들을 위해 거기에 꼭 맞는 행동을 하신다. 우리가 만일 예수의 다름, 우리와 다른 그분의 차이, 그분의 유대인임을 인정하고 확인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예수가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른 모든 차이를 확인하고 함께 누릴 수 있게 하고 그들을 우리의 새로운 형태의 차별로는 전환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유대인 예수만이 우리 자신이 설정한 순결의 경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가난한 자, 불결한 자, 무식한 자, 칠칠치 못한 자, 성적 취향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게 한다.
---p.347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억압과 불의에서 해방시키도록 부름을 받아서, 가난하고 악취가 나는 자들을 우리의 공동체로 받아들이고 인간의 존엄성이 망가진 곳에서 그것을 되살려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사랑을 회복시켜야 한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 자유와 정의, 사랑이 뿌리 내리고 꽃 피울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pp.383-384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게 축복과 안녕을 안겨주는 하나님의 목적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삶 가운데서 인간 공동체의 구조를 분열시키는 민족, 계층, 인종, 그리고 성별과 같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사명을 받는다.
---p.389
교회는 자체 세력을 정당화하거나 강화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보다 더 적합한 것이 되기 위해서 그 자체 교리를 세워야 한다. 신학과 기독교의 증언은 항상 교회들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에 사용되어야 한다.
---p.406
주일 아침에 어느 평범한 교회든 주변을 한번 둘러보면, 남성보다도 여성이 교회에 더 많이 참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 생활에서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이 교회의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 교회의 어마어마한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성은 공식적인 지도력의 위치에서, 성직에서, 교단의 중요한 직책에서, 로마 가톨릭교회 같은 경우에, 성직의 계급에서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그동안 여성에게 우호적인 위치를 배려하지 않았다.
---p.408
교회는 “함께 길을 걷는 동료들”의 운동이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의 친교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교회는 비록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건물을 세우기는 하지만, 교회가 건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동료들(companions)과 함께(cum) 빵(panis)을 먹는 사람들로 구성된, 일종의 특유한 친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들이며 상호간의 친구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먼저 우리를 친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 그것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지속적인 동료의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표를 향해 길을 함께 걷는 동료들의 공동체이다.
---pp.420,421
떡을 뗌에는 예상되는 많은 윤리적 함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만을 언급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인종, 연령, 계급, 종족 집단, 혹은 교단, 혹은 다른 성적 취향을 가진 구성원들이라 해서, 그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 우리는 예수의 사역의 주요 특징이 굶주린 자들을 먹였고, 성만찬에 대한 가장 이른 초기의 증언도 그것이 단지 상징적인 만찬이 아니라 “완전한 식사”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떡을 뗌을 기념하는 우리는 반드시 굶주린 자들을 먹여야 한다. 다른 이슈는 성만찬에 어린아이들도 과연 참여할 수 있는가이다. 믿는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푸는 교회에서, 아직-세례 받지-않은 어린아이들은 떡을 떼는 일에서 대체로 제외된다. (…) 떡을 뗌은 예수가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이에게 손을 내밀어 환영하신다는 증언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실천을 성격 지었던 일종의 개방된 환대를 가장 두드러지게 재연하는 곳이다. 개방된 식탁의 환대는 어린아이들도 포함해야 한다.
---pp.443,444
예수의 메시지와 사역의 윤리적 귀결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이다. 각자 죄인은 회개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초대 받는다. 그분의 메시지와 선교는 예수의 삶과 사역 안에서 실현되었다. 사회적으로, 이 돌아섬은 관대한 치유와 관대한 호의, 관대하고 개방적인 식사, 그리고 낯선 자에 대한 호의적인 환영을 보여주고, 차별이 없는 평등주의의 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12:28-31). 이 위대한 명령이 예수 운동의 특징이다. 그 사랑의 표현을 저해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한 쪽으로 제쳐놓아야 한다.
---p.462
종말론을 경시하는 교회는, 영향력 있는 자들에게만 호의를 보이는 힘의 방식에 의해 사회의 혜택에서 배제되었던, 이들 중 지극히 작은 자, 고아와 과부를 경시한다.
---p.468
🖋 출판사 서평
오늘의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부딪히는 문제들 앞에서 던진 질문들
_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가?
_교회는 여성과 성소수자의 차별에 어떤 태도를 갖는가?
_교회는 환경문제에 적극적인 태도인가?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인이 알아야 할 기독교 사상을 전체적으로 잘 정리해서 소개하고 있다. 성서와 계시, 전통, 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교회, 종말 등의 소주제들을 하나하나 밝혀주면서 오늘의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현재의 이슈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선택하며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이라 할 이 주제를 저자 윌리엄슨은 신학도나 교직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신도들 누구나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로 접근한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을 오늘의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출구를 찾아가는 교회의 모임을 위해 저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으로써 저자는 대학과 전문적 영역의 신학을, 각계각층의 일반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 현장에서 함께 읽고, 대화하고, 토론함으로써, 공동의 생각과 신앙, 삶을 엮어내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이 되게 한다.
저자의 독특성은, ‘기독교 대화신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기독교가 이제까지 소홀이 했던 주제들과 경향들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그 결과들을 수용한다는 데 있다. 저자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시야를 훨씬 넘어서 현대의 다양한 신학사상들, 폴 틸리히와 해방신학, 과정신학들과 대화하고 그 결과들을 수렴했다. 또한 다른 종교들 특히 유대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기독교의 영성과 사상을 넓혀주고 풍부하게 했다. 주지하듯이, 서양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박해했으며, 때로 학살하기도 했다. 특히 독일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치하에서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쓰라린 역사는 전후 세계에 안티-세미티즘, 더 넓게는 인종주의에 대한 큰 경종을 울리면서, 이를 계기로 인류사회는 인종주의 타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반 사회들에 비해 교회의 노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었으나, 저자는 수십 년 간 유대교 랍비 등 지도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대화하면서, 성경과 기독교의 내용이 유대교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그동안 유대교와의 차이와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의 정당성을 밝히고, 거기서 정체성을 만들어왔지만, 저자는 오히려 유대교와의 연속성들을 주목하면서, 마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구별되고 차이가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기독교 경전이듯이, 유대교와도 그런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한 저자는 기독교 신앙이 생명의 길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모두 인류와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의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에 있다는 것이다. 그 ‘생명’에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만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즉 육체적이고 신체적인 면들까지 포함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저자는 특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여러 형태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약자, 소수자들, 그리고 파괴되어 균형을 잃은 지구 생명체들의 계속되는 고통과 신음, 호소, 항변을 주목한다. 그리고 기독교 고유의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그들의 문제를 끌어안아서, 인류와 자연 전체의 정의와 평화, 생명을 위한 방식으로 담론을 전개한다.
성경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임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 보면, 많은 의문을 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성경에는 어려운 부분들도 있고, 우리 시대와 동떨어진 교훈이나 메시지들도 담겨 있다. 주제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기도 하다. 그런 저런 이유로, 성경이 담고 있는 좋은 내용들을 충분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더구나 기독교인들은 성격을 읽으면서 뿐만 아니라 교회생활을 하면서, 구체적인 사회현장에서 살아가며, 신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게 되는 일이 많다. 이 책은 성경 전체의 주요하고도 핵심적인 사상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현대사회의 여러 이슈들과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성경과 기독교적 삶에 대해 질문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