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한 켤레
류 시 화
신발을 사야만 했다. 인도는 날이 너무 더워 한국에서 신고 간 신발을 더 이상 신을 수가 없었다. 며칠을 미룬 끝에 나는 특별히 올드 델리의 바자르(시장)로 가서 마음에 드는 슬리퍼 한 켤레를 샀다. 둥근 끈에 엄지 발가락을 끼워 신는 단순하고 편리한 신발이었다.
종이에 싼 새 신발을 가방에 넣고서 나는 서둘러 시장을 빠져나왔다. 북인도 올드 델리의 시장은 인산인해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이 맨발이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구두와 운동화들이 인도인의 맨발을 점령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인도는 맨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인도 뭄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맨 먼저 눈길을 끈 것도 여자 청소부들의 맨발이었다.
그러나 역사상 신발을 최초로 발명한 나라가 인도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전설에 의하면 아주 옛날에, 그러니까 신발이라는 물건이 전혀 이 지구별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 인도의 한 왕이 똑똑한 신하를 불러 말했다.
"여보게, 똑똑한 신하여, 길에는 돌이 많고 사금파리 같은 것도 떨어져 있어 걸어다니기가 힘이 드네. 사람들이 발을 다치지 않고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세상의 땅바닥을 전부 양탄자 같은 것으로 덮어버리면 어떻겠나?"
왕들은 대개 이처럼 무모하다. 하지만 그 똑똑한 신하는 정말로 똑똑 했기 때문에 가만히 어리석은 왕을 설득시켰다.
"왕이시여 . 대지를 전부 페르시아 양탄자로 덮어버린다면 꽃과 무우들도 싹이 틀 수 없고 지렁이와 개미 같은 미물도 생존이 불가능하답니다. 더구나 소와 당나귀들이 여기저기 오줌을 싸고 다니면 무슨 수로 그 많은 양탄자를 세탁하겠습니까,?" 왕이 그것도 그럴 법한 얘기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똑똑한 신하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발바닥을 양탄자 같은 것으로 감싸면 어떻겠습니까?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서도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위대하신 전하" 위대하신 전하께 서는 곧바로 인도 전역에 신발 포고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나이키와 프로스펙스에 이르는 신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찬드너 초크 시장 근처의 한 노천 식당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열심히 차파티를 부치고 있는 어린 종업원도 맨발이고, 종업원을 감시하고 서 있는 늙은 주인도 맨발이긴 마찬가지였다. 팔찌를 스무 개나 끼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 손님도 맨발이었다. 나 혼자만 신발을 신고 있고. 가방 속엔 새로 산 슬리퍼까지 들어 있었다.
내가 테이블에 앉아 바나나 라시 (요구르트처럼 생긴 것에 바나나를 잘 라 넣은 것)를 한 머금 마신 다음. 치 킨 카레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 였다. 한 떼의 손님들이 우르르 식당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흰수염 기른 노인도 있고, 고깔모자 같은 두건을 쓴 남자도 있었다. 테이블이 모자라 그들은 내 앞에도 앉고 옆에도 앉았다.
시장했던 터라 치킨 카레를 열심히 먹고 있을 때였다.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뒤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고깔모자의 인도인이 새로 산 내 신 발을 신고 황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밥을 먹고 있는 틈을 타 어느새 가방을 뒤져 신발을 꺼내 신은 것이다. 소유 개념이 불분명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이미 몇 차례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를 쫓아갔다. 신발 도둑은 다리가 긴 내게 금방 덜미가 잡혔다.
어려서부터 다리가 길어 타조라는 별명을 가진 나였다. 나는 그 인도인이 소유에 관한 철학적이고 복잡한 논리를 늘어놓기 전에 얼른 신발부터 빼앗았다.
그것도 불안해 아예 그 자리에서 신고 있던 허시파피 신발을 벗고 새 신발로 갈아 신었다. 이 정도면 그가 아무리 교묘한 말솜씨를 가진 자라 해도 신발을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인도인들은 남의 물건을 가져가고도 걸핏하면 '이 세상에 영원히 내거란 없는 것이여!' 하고 허풍을 떨기 일쑤였다.
나는 허시파피 신발을 인도인의 얼굴 앞에 흔들며 일장 훈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영원한 소유란 없다고 해도 남의 신발을 그렇게 함부로 훔쳐가선 안된다. 게다가 헌 신발이라면 내가 말도 안한다. 이제 막사서 한번도 신지 않은 신발을 가져가다니 . 그게 영적인 인도인으로서 할 짓인가.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아 보이는 그 인도인 남자는 내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지 지방 사투리로 따따부따 말이 많았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뿐더러 도둑질하다 들킨 주제에 대드는 것이 얄미워 허시파피 신발짝으로 잔뜩 위협을 했다. 남자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웃더니 오히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건 나였다. 나는 신발 도둑과 더 이상 장광설을 늘어놓기 싫어 치킨 카레도 먹다 만 채 그 자리를 떴다. 내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도 그 도둑은 계속해서 뭐라고 떠들어 댔다. 정말 무례하고 인간성이 형편없는 인도인이었다.
릭샤(세발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면서도 나는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입술 두꺼운 릭샤 운전수가 내 손에 들린 허시파피를 힐끔거리는 것도 못마땅해 나는 운전이나 잘 하라고 구박을 했다.
그날 오후. 나는 뉴델리 기차역 맞은편에 있는 파할간지의 싸구려 여관으로 돌아왔다. 허시파피를 신문지에 싸서 잘 모셔둔 뒤, 우선 공동 세면장에 가서 시원한 물로 샤워를 했다. 아열대의 더위와, 시장통의 먼지와, 신발 도둑이 안겨준 불쾌감까지 말끔히 씻어버렸다. 이제부턴 슬리퍼를 신고 다닐 것이기 때문에 더 자주 발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슬리퍼를 신으니 목욕을 하기도 더 편했다.
철썩철썩 슬리퍼 소리를 내며 방으로 돌아온 나는 수첩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다. 그곳에 누런 종이에 싼 어떤 물건이 들어 있었다 뭔가 하고 열어 보니 새로 산 슬리퍼 였다. 나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똑같은 모양의 슬리퍼가 그곳에 있었다. 아니, 그럼 이것은 그 인도인 남자의 슬리퍼?
나는 너무도 당황스럽고 창피해서 그만 침대에 얼굴을 묻고 쓰러지고 말았다. 용서를 빌기에도 이젠 너무 늦었다. 무례하고 인간성이 형편없는 건 그 인도인이 아니라 나였던 것이다. 백주 대낮에 남이 신고 있는 신발을 막무가내로 가로채다니 그것도 허시파피 신발짝으로 위협까지 해가면서.
난데없이 신발 도둑으로 몰린 그 인도인 남자가 깨우쳐준 몇 가지 사실.
1. 세상에는 자기가 도둑이면서 남을 도둑으로 모는 사람이 많다.
2. 남이 가진 것을 쳐다보기 전에 자기가 가진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자기 에게도 새 신발 이 있을 것이다.
3. 자기가 가진 믿음과 확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선 안된다. 그것은 언제라도 틀릴 수가 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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