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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공생활 정절기의 모습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활기찼는지에 대해 마르코 복음사가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발길 닿는 곳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최종전 혹은 프리미어 리그 빅매치 관중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밀려드는 군중에 기쁘고 했겠지만, 식사 시간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분주한 스케줄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과부하가 걸렸을 것입니다.
이러다 제대로 된 복음선포도 하기 전에 과로사하겠다는 생각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군중 몰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겐네사렛 땅으로 넘어갔습니다.
제자들은 이제야 드디어 편안히 식사도 하고 취침도 하겠지? 이게 얼마만의 휴가냐? 하고 희희낙락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사도들의 희망 사항은 육지에 닿자마자 물 건너 가버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리자 예수님임을 확인한 사람들은 뜻밖의 선물에 환호성을 질러댔습니다.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분, 그토록 만나 뵙고 싶었던 예수님이셨는데, 그래서 언젠가 기회 되면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지, 그분의 은총을 입어야지, 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너무나 기쁘고 황홀한 나머지 환호성과 탄성을 외쳤습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을 찾아주셨다며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특히 환자들, 그중에서도 중환자들이 많이 몰려 왔는데...사람들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들것에 싣고 달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은 들것에 누운 환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른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목청껏 외치시는 야전병원이 순식간에 건설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초대되고 대우받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넘쳐나는 사람들로 인해 사목자들과 봉사자들이 과로사할 정도입니까?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고 있습니까?
2)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6,53-56
주님 안에 머무는 방법: 뜻을 따를 것인가, 도움을 청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낫고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예수님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려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진리와 은총을 받음입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가르침보다는 은총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붙어있어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 따르면 은총을 청함도 그분께 붙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음이 가능할까요? 사탄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다 보면 그 사람의 뜻도 따르게 됩니다.
윌 스미스가 지니 역을 맡은 2019년 실사 영화 ‘알라딘’은 일부 현대적인 업데이트를 가미한 오리지널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와 유사한 줄거리 선을 따릅니다.
알라딘: 이 영화는 아라비아의 도시 아그라바에 살고 있는 친절하지만 한 푼도 없는 길거리
알라딘을 소개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종종 도둑질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악하지는 않습니다.
술탄의 딸인 자스민 공주는 궁전 밖의 삶을 경험하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알라딘을 만나기 위해 몰래 도시로 나갑니다.
술탄의 권력에 굶주린 대재상 자파르는 불가사의의 동굴에 숨겨진 마법의 램프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거친 다이아몬드가 필요하며, 그것은 알라딘으로 밝혀졌습니다.
알라딘은 자파르에게 속아 동굴에 들어가 램프를 찾습니다.
자파르는 램프만 빼앗고 알라딘을 동굴로 밀어 넣었지만, 알라딘은 램프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나옵니다.
알라딘은 왕자만이 자스민과 혼인할 수 있음을 알고는 지니에게 자신이 왕자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파는 알라딘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고 램프를 훔쳐 술탄이자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사용합니다.
알라딘은 자스민, 애완 호랑이 라자, 지니의 도움을 받아 자파르와 맞서게 됩니다.
그는 자파르의 교만함을 자극하여 전능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청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전능한 자는 지니입니다.
지니는 그를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새로운 지니로
만들어버립니다.
자파르는 램프에 갇힙니다.
알라딘은 자신이 왕족으로 영구적으로 변신하는 대신 지니를 자유롭게 해 주려는 마지막 소원을 사용합니다.
지금까지 지니를 위해 그러한 소원을 빈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니는 램프의 저주에서 풀려 자유로운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술탄은 자스민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자스민은 알라딘을 선택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이의 뜻을 묻지 않으면 사탄일 수밖에 없고 그 교만함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게 됩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해주는 이의 뜻을 물어봅니다.
알라딘이 그런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주님과 머물기 위해 많은 것을 청합니다.
언제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파견하실 때도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이때의 소명이 진리이고 지팡이가 은총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통해 주님께 끊임없이 청하며 그 받는 은혜 때문에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욕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머문다는 말은 그 누군가의 은총과 진리를 거부하지 않고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의 가르침과 음식을 먹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를 거부합니다.
독립하겠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또한 부모의 뜻을 따라주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주님께 붙어있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위해 매 순간 어떤 은총이 필요한지를 청하는 게 낫습니다.
그 청함을 통해 주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은총을 받은 사람들처럼.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오늘의 복음에서와같이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으면서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인생이라는 것이
무언지를 묻게됩니다.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가져갈 것은
사랑했던 사랑의
마음뿐입니다.
결코 사랑의 마음을
놓치지 않았던
성녀 아가타
축일입니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
잡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사랑의 관계뿐입니다.
사랑은
뒷걸음 치지
않습니다.
묵묵히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나갈 뿐입니다.
어지럽고 소란한
욕망의 칼날도
성녀 아가타의
사랑 앞에선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또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어떠한 사람인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온몸과 온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한
한 여인의 삶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열게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험난했던 그 길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인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한 남자가 시골길을 운전하며 가던 중, 주위 풍경에 한눈을 팔다가 그만 자동차가 진흙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지만 차 바퀴가 헛돌 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농장에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농부는 들판에 있는 나이 많은 노새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워릭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줄 수 있을 거요.”
남자는 이 늙은 노새가 과연 그 무거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농부는 고삐를 잡고 노새를 잡아당기며 소리쳤습니다.
“당겨, 프레드. 힘껏 당겨, 잭. 온 힘을 다해 당겨, 테드! 너도 힘껏 당겨, 워릭!”
노새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차를 웅덩이에서 끌어냈습니다. 남자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노새는 한 마리인데 왜 다른 이름을 불렀습니까? 이 노새의 이름이 여러 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웃으며 말했지요.
“아니요. 워릭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신이 다른 노새들과 함께 있다고 믿으면 어떤 무거운 것도 끌 수 있소.”
혼자라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함께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곤 합니다. 함께 한다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음을 믿음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힘센 주님께 대한 믿음이 지금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병든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혼자서 오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병이 죄의 결과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합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복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함께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에 구원까지 받을 수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함께하고 있을까요? 나의 이웃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함께 주님을 만나려고 하고 있습니까?
누구는 자기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한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함께하지 않는 곳에서 과연 진정한 믿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마르티얼).
6)이병우 루카 신부님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b)
'절박함의 기적!'
오늘 복음(마르6,53-56)은 '예수님께서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이르시자, 사람들은 많은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과연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 묵상글을 통해서도 나누었지만, 병이 나를 찾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병은 '마음의 병인 스트레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병자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과 정신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을 때, 곧 내 몸과 마음이 예수님께 닿아있을 때, 그래야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고, 그래야 육체의 병을 유발시키는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간직하고 계신 성녀 아가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가타'(Agatha)는 그리스어로 '선(善)'이라는 뜻입니다. 아가타는 하느님의 마음인 착한 마음으로 무장되어,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를 탐내는 사악한 이가 저지른 혹독한 고문과 박해를 이겨내면서 동정을 지킬 수 있었고, 또 장엄하게 순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미사책 46쪽'을 보면,
가톨릭 대학교 성신교정에 계시는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의 묵상'이 있는데,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닿아 있고,
나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가장 아픈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구원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첫댓글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 5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