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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묵상글 (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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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고통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그러니만큼 인간은 누구나 이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래서 사람마다 또 종교마다 대처하는 법이 다릅니다.
가장 흔한 태도랄까 대처는 고통을 무척 싫어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하여 일단 도망치고 보는 회피형입니다.
사실 고통이란 것이 본래 내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면 고통이 아니고 즐거움이 되겠지요.
노래는 즐겁다고 하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즐거움이지
너무도 싫어하고 지겨워하는 사람에게 노래는 고통일 뿐이겠지요.
그런데 어린이나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사람은 무조건 도망칩니다.
두 번째 유형은 어쩌면 정반대인데 함몰형입니다.
고통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고통에 빠진 다음엔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형입니다.
그래서 고통만 보고 고통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고통 밖에 그러니까 고통 말고 다른 것이 많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마라톤을 뛸 때 처음에는 제가 이러했습니다.
한 20km 구간까지는 비교적 마라톤을 즐기며 뛰고,
같이 뛰는 사람도 보고 주위 풍경도 보며 뛰는데
25km를 넘으면 서서히 고통에 사로잡히게 되고,
35km를 넘어 나머지까지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오로지 고통과 싸웁니다.
그러다가 몇 차례 뛰고 난 뒤 ‘마라톤 성찰’을 합니다.
우리 인생이 마라톤과 같다고.
그러니 우리 인생을 이렇게 고통밖에 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귀중한 인생 마치면 되겠는가 하는 성찰입니다.
그래서 마라톤을 뛰며 고통만 보지 말고
다른 것들도 보고 의미를 보자고 생각이랄까 자세를 바꾸는데
그렇게 한 10여 차례 뛰고 난 뒤에는 그 고통을
주님의 고통이나 그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해 봉헌하며 뜁니다.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고,
고통을 봉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며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주님의 고통에 동참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라는 표현을 씁니다.
전에는 안 그랬었는데 이제 고통을 기쁘게 겪는다는 것이고,
이웃을 위해 주님처럼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떤 단계인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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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손을 뻗어라.”(루카 6,10)
앞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루카 6,5).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루카 6,8)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저희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당신 면전으로 불러내십니다. 자비와 치유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생명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루카 6,10).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란?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쥐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며,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는 불통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을 꼭 쥐고 있어서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묘한 것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이’는 죄에 물든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을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그것은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움켜쥐는 것은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놓고서 고통과 은총의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심을 의미합니다. 이제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사랑을 건네주기보다 자애심과 이기심을 채웠던 우리의 손을,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했던 우리의 손을 뻗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마음을 풀고 손을 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품고 구원된 자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구원과 사랑을 건네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뻗어라.”(루카 6,10)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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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펴라
아직은 덥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카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카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해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예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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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공항에 도착했는데 출발이 지연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신문홍보로 LA에 갔을 때입니다. 7시에 출발하는 비행기가 8시 30분에 출발한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1시간 30분이 주어졌습니다. 묵주기도는 했기에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컴퓨터 작업을 하는 사람, 핸드폰을 보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잠시 눈을 감고 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도 컴퓨터를 꺼내서 ‘선순환과 악순환’이라는 주제로 강론을 준비하였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원망과 불평으로 채운다면 그 시간은 쓰레기통이 됩니다. 주어진 시간을 소중한 것과 중요한 것으로 채운다면 그 시간은 보석상자가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 공항에 왔기에 강론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는데 하느님께서 제게 특별히 시간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소중한 일과 중요한 일을 먼저 한다고 하였습니다. 소중한 일은 가족을 돌보는 것입니다. 건강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내게 주어진 업무입니다. 제게 중요한 일은 신문사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관직에 있을 때도 업적을 남겼지만 유배지에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소중한 일과 중요한 일을 하였습니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들에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가족들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대표작은 ‘목민심서’입니다. 관직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를 기록하였습니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원망과 분노로 시간을 채우지 않았습니다.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로 시간을 채웠습니다. 신영복 선생도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습니다. 좌절과 원망으로 시간을 채울 수 있었지만 오히려 사색과 독서로 시간을 채웠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그 시간을 채우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보물을 채우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쓰레기로 채우는 사람은 헛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선택은 역시 각자의 몫입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늘 이렇게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 어려움도, 갈등도, 아픔도 다 해결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 앞에 어떤 일이 생기면, 먼저 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 판단의 기준은 ‘양보, 용서, 이해와 협력’이기보다는 저 자신의 욕심을 먼저 따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양보하고, 용서하며, 이해하셨을 것들을, 저는 자존심과 이기심 그리고 분노와 원망을 앞세워 단죄하고 미워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신앙인은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세상 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간디는 신앙인을 보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이 말은 지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했고, 예수님께서 모든 삶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그와 같은 체험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오지만, 우리 주변에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과 명예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그라든 마음을 바르게 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지혜와 보물을 알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다른 어떤 법과 질서보다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오그라든 나의 마음을 활짝 펼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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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주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는 것처럼, 혹은 친구가 자랑스러운 친구를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잘못하지는 않을까? 언젠가는 말실수하지 않을까? 어떤 행동으로 율법을 어기지는 않을까? 어떻게 저 예수라는 사람의 약점을 잡을까? 이런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 안에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눈 안에는 시기와 질투와 분노만이 가득합니다. 이런 눈으로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시선 가운데에서 주님께서는 병자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이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다.
좋은 일은 노동이 아닙니다. 그저 선한 마음에서 나온 성행일 뿐입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도 노동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하는 선행일 뿐입니다. 이것은 안식일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이든 그렇지 않든 늘 해야 하는 것이 선한 마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표독스러운 시선 한가운데서 사랑을 드러내시고 실천하십니다. 그렇게 어두운 곳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납니다.
우리의 선함도 늘 우리들의 하루하루 안에서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가끔은 우리를 시기하거나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그라든 마음을 펴십시오. 그렇게 선함이 우리 안에서 세상으로 퍼져가는 향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꽃을 심겠습니다.
이곳 성지에는 십자가 동산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낮게 달려계신 십자가는
이곳 성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상징이 되어
십자가 동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그 동산에 꽃을 심고 싶습니다.
장미도 심고, 국화도 심고,
아치를 만들어 능소화도 심고 싶습니다.
꽃을 보는 사람들이 웃기 때문입니다.
세상 밭에서 눈물짓던 사람들이
꽃밭에서는 웃음 짓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을 다녀가시는 분들이
웃으며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어려움과 괴로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웃으며 다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도 흐뭇하게 보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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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마음과 몸은 통합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생각과 감정은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움직임은 마음가짐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미소 짓거나 인상을 찌푸리면 또는 친절한 표정이나 화난 표정을 지을 때 감정이 이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연구 대상자들이 화난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내자 심박수와 피부 온도가 올라갔고 기분이 나빠졌다고 밝혔습니다.
얼굴뿐 아니라 우리 몸 전체가 기분을 바꾸는 데 쓸 수 있습니다. 플로리다 애틀랜틱 대학교 심리학자 세라 스노드그래스는 연구 참여자를 두 그룹으로 나눈 후, 각 그룹에 3분간 특정한 자세로 걸으라고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팔을 앞뒤로 흔들며 큰 보톡으로 걷게 했습니다. 자신감과 낙관적인 기분을 외부로 드러내는 걸음걸이였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발을 끌며 작은 보폭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낙담한 채로 생각에 잠긴 상태일 때의 걸음걸입니다. 이 두 그룹 중에서 3분간 ‘행복한’ 산책을 한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더 기분이 좋아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음과 몸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으며, 몸의 움직임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몸도 마음도 다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율법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과연 튼튼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튼튼할 수 없었고,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면 당연히 고발된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온유한 마음을 갖고서 사랑 실천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야 마음을 활짝 펼 수 있고, 이에 따라 몸도 마음도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랑이신 주님을 받아들여서 오그라든 마음을 쫙 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오그라든 그 모든 것을 활짝 펴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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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안주하지도, 안일하지도 않으면서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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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하신 목자 예수님
-주님과 만남과 치유의 여정-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나니.
내 영혼아, 그분을 고요히 기다려라.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62,6-7)
화답송 시편에 위로를 받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에 대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강론중 한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형제적 교정은 사랑의 최고의 형태들중 하나요, 가장 필요한 것들 중의 하나다.” 정말 공감합니다. 칭찬하기는 쉬워도 형제의 결점을 지적하기는 참 힘들며 할 수 있다면 정말 용기있는 참 사랑의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라가 있고 종교가 있으며, 정치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정치는 공기와 같습니다. 싫든 좋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치를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그러나 좋은 정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래서 구약의 무수한 예언자들이 등장했고 오늘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입니다. 정치와 종교는 구별될 수 있을지 몰라도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의(義)롭고 선(善)한 정치가의 등장을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예수님 십자고상 아래 태극기를 보며 십자성호와 영광송 기도후 만세육창을 한후 하루를 시작합니다. 흡사 독립운동가의 하루 일정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의 만세육창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예수님 사랑에 이어 “애국(愛國), 나라 사랑”을 환기시키며 고백성사후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써드린후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합니다. 사랑할 때 마음이 순화되어 깨끗한 마음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가를 부를 때 역시 정화되는 마음입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 성체강복후 퇴장시 부른 성가 55장, “착하신 목자”가 생각납니다.
“착하신 목자 우리 주님 양들을 위해 목숨 바치니,
영원한 생명 얻게 하여 우리를 살게 하시도다.
착하신 목자 우리 주님 영원한 생명 주시었네
끝없이 푸른목장에로 모든 양들 인도하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착하신 목자 예수님-주님과 만남과 치유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착한 목자일뿐 아니라 인도자요 치유자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착한목자이자 치유자로서의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당신을 예의주시하며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주님은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줍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마치 미사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명령하시며, 주시하는 이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 또는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한가? 죽이는 것이 합당한가? 이미 질문안에 답이 있기에 이들을 답을 못합니다. 판단의 잣대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치유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절박한 인간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주위를 모두 둘러 보신후 추호도 지체함이 없이 그를 치유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그가 그렇게 하자 손은 다시 성해지니 참 통쾌한 치유 장면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지는 느낌입니다. 오그라든 손이 펴짐과 동시에 오르라든, 쪼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졌을 병자입니다. 적대자들은 골이 잔뜩나서 예수님께 보복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골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은 “비이성”, “무의미한 분노”를 뜻합니다. 역시 무지에 눈먼 분노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구원자이자 치유자이신 착한 목자 예수님과의 만남과 치유의 여정을 통해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온전해 지는 사람들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주님과 만남과 치유를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봅니다. 아마도 평생 주님과의 내적 관계도 날로 깊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어찌 주님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착한 목자 주님과의 만남은 한두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평생 주님과 만남과 치유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이런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요 우리가 꿈꾸는 참나의 실현, 온전한 인간상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참내가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매일미사은총이 그리도 고맙습니다. 우리가 그리며 꿈꾸는 예수님의 실상을 바오로 사도가 참 멋지게 표현합니다.
“그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가르칩니다. 나는 여러분이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얻어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얼마나 멋지고 풍요롭습니까? 우리의 인도자이시며 치유자이신 착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지혜이시며 온갖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는 살아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 공부(工夫)와 탐구(探究)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감은 우리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과의 만남과 치유의 내적 여정중에 주님을 닮아 날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참나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주셨듯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주십니다.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시편6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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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일>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주님께서 주신
기쁨 가득한
주님의 날
주일은
내 언저리에
밀어놓았던
잊고 있던
고운님들
내 가운데로
모시는 날
늘 그렇게
함께 계시나
나 느끼지 못한
하느님과
주님께서
몸소 맡기신
내 눈길 밖의
작은 벗님들과
주님 닮게
지음 받은
내 사랑 못 받던
내 자신을
내 가운데에
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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