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냄새
도정기
모든 사물은 자기만의 고유한 냄새를 지니고 있다. 꽃에서는 꽃냄새가 나고 솔에서는 솔 냄새가 나며 사람의 몸에서도 고유한 자기만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후각으로는 도저히 맡을 수 없는 냄새가 있다. 그 냄새는 사람 사는 냄새다. 사람 사는 냄새는 오직 가슴으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다. 이 세상 모든 냄새 중에 가장 향기로운 냄새가 사람 사는 냄새가 아닐까 싶다.
내가 처음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곳은 초임지인 문경 가은초등학교 갈전분교장에서다. 본교 근무 2년 후 3월 신학기 교내 인사에서 갈전분교장 근무를 희망하였다. 높고 험한 산 넘어 근무지로 이사 가는 날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자기네들 자식 가르쳐줄 훈장 온다고 지게 지고 이사 도우려고 왔다. 아니 이사하려고 왔다. 단칸방 신혼살림이라 이삿짐이라야 옷 넣은 고리짝 하나에 이부자리와 소꿉장난 같은 취사도구뿐이다. 그러나 맨몸으로도 넘기 힘든 굽이굽이 돌고 돌아 오르는 십 리도 넘는 험한 산길을 등짐으로 나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감사하고 고맙지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갈전리는 산비탈에 등 기대고 십여 가구씩 옹기종기 새 둥지 틀 듯 매달려 초가지붕 덮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난포 불로 밤을 밝힌다. 전화는 건넛마을 이장 집에 간첩신고용 비상전화 한 대가 있었다. 남북으로 분단된 비극의 산물로 설치된 전화가 외부와의 유일한 연락 수단이 되었다. 문명의 혜택이라곤 손톱만큼도 누리지 못하는 조선 시대의 삶 그대로였다.
화전을 일구며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궁핍한 삶이지만 인심만은 넉넉하다 못해 철철 넘친다.
분교장의 봄. 가을 소풍은 따로 없다. 그렇다고 학동들이 제일 손꼽아 기다리는 소풍을 가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봄, 가을 마을 화전놀이 하는 날이 바로 소풍날이다. 돼지 잡고 닭 잡아 집집마다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챙겨 와 하루를 즐기는 연중 가장 큰 행사다. 그날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도 되고 경로잔치와 마을 단합대회도 겸하니 얼마나 거창한 소풍인가. 아마 이와 같은 거창한 소풍을 가는 학교는 전국에서 갈전분교장뿐일 것이다. 학동들은 이렇게 대자연 속에서 함께 웃고 뛰놀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사는 냄새를 온몸으로 배우며 자란다.
어느 집에 기제라도 들고 어르신 생신날이라도 되면 그날은 동네 잔칫날이다. 훈장도 특별 손님으로 당연히 초대받는다. 허리 굽은 할머니는 수업 중인데도 노크도 생략하고 교실 문 활짝 연다. “선상님요. 어제저녁에 우리 영감 제사 지내심더 빨리 오이소.” 하고 초대장 아닌 소환장 남기고 황급히 돌아가신다. 작은 마을이지만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돌고 돌아 집집마다 소환장을 전달하려면 노인 걸음에 빠쁘게 움직여야 한다. 미처 소환에 불응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체 없이 강제구인 영장을 들고 온다. 학생들은 내가 강제구인에서 풀려나는 한 시간 정도는 자습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강제 구인된 시간의 학습결손은 항상 몇 배로 갚아주었다. 사람 사는 근본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법도 규칙도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이곳 사람들은 모든 생활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내 것 네 것, 자기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난다.
하늘 아래 첫 동네 화전민촌의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으며 춥고 길다. 가을 추수 끝나면 무엇보다 먼저 밥 짓고 온돌 대울 땔감을 넉넉히 장만해야 한다. 학교라고 예외일 순 없다. 화목난로 피울 나무하는 날이 따로 있다. 학부형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와 젊은 사람들은 지게 지고 나무 베어 나른다. 나이 든 어르신들은 화목난로에 알맞게 자르고 쪼개어 창고에 차곡차곡 쌓는다. 여자들은 참과 점심 준비에 분주하다. 마치 대가 집 잔치 마당 같다.
훈장이 거주하는 사택의 겨울날 땔감도 한다. “선상님이 나무할 줄 아십니껴. 어린 아기도 있는데 많이 준비해야 지예.” 하시며 넉넉하게 장만해주셨다. 남의 손자까지 걱정해 주시는 따뜻한 마음으로 온돌 데워 춥고 긴 겨울을 무난히 날 수 있었다. 나는 학동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인생살이를 배우는 학동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 배움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난 많이 부족한 사람인가 보다.
이 세상 어느 꽃 보다도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들이 사는 하늘 아래 첫 동네 갈전에는 지금도 사람 사는 냄새가 저녁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나겠지.
궁핍하고 힘든 생활에서도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아가는 갈전의 사람 사는 냄새는 내 가슴 속속 깊이 스며들어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
지난해 "훈장과 학동"이란 글에서 지역민들 내용만을 정리하여 "사람 사는 냄새"란 글로 바꾸었습니다.
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고 신혼초 산골오지 벽지학교로 희망하여 부부교사로 처음 부임갔을 때 떼묻지 않은 순박한 산골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떠나올 때 잡은손 놓지 못해 아쉬움을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시절이였지만 그 때만 해도 사람이 사는, 사람 냄새가 풍기는 정말 순수하고 인정이 넘치던 두메산골 전경이 눈에 선 합니다. 이제 먹고 살 만하니 배가부른 탓인지 최근 보도된 여중생들의 폭력 사건을 보며 기가찰 노릇 입니다.
이 모두가 잘못 가르친 기성세대들의 책임도 있는듯 합니다. 추억이 서린글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분교의 사람냄세 나는 글을 읽어야 될것 같습니다. 정감이 가고 눈으로 보는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우리 어릴때에 큰댁 재종숙모님께서 동네 어른분들의 생신, 제사, 다 기억하셨습니다. 배 고팟던 시절 닭 두세마리쯤 잡으면 온 동네 잔치를 했던 시절, 그때는 명절이면 돼지도 잡아서 나누어 먹던 때가 기억납니다. 한 동네가 한가족처럼 지냈던 우리 어릴때가 그립습니다. 요즈음 사촌도 모르다는 시대의 살고 있습니다. 너무도 각박한 사회에서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이 연일보도 되네요. 사람냄새가 사라지고 아이들 장래가 너무 걱정됩니다.내 아이만이 최고라는 그릇된 교육이 빚으낸 산물이라 생각됩니다.
시골사람들의 순박한 심성이 묻어니는 글입니다. 글 속에 사람사는 냄새가 납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냄새가 사라져 버렸으니 안타깝습니다. 추억 속에나마 옛 모습을 더듬어 볼 수있어 다행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 사람냄새 나는 곳에서 사신 경험이 부럽습니다. 저도 그런 생활을 해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란 생각을 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순박한 시골 사람의 심성이 잘 나타납니다. 큰 형님도 교직에 있을 때 상주 화북의 분교에 근무했는데 학생들이 와서 청소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도시 학교의 치맛바람 뉴스를 들으면 씁슬한 기분이 듭니다.
내 초임지의 생각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때 우리는 진짜 분에 넘치는 선생 대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워 지네요.
초임지, 벽지 분교에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정이 듬뿍 담긴 소환장, 강제구인이라면 한번 당해보고 싶군요.. 사람 냄새, 저녁연기 냄새가 그리움으로 전해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