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랑의 철학자들 Ⅱ
-인식(앎)의 원리로서의 사랑/시몬느 베이유
시몬느 베이유는 유다계 여성 철학자이다. 가톨릭 사상의 소유자이며 마지막에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엘리트 계층에 속했지만,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난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노동자를 위해 헌신한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톨릭 영성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녀는 인식(앎)의 원리로서의 사랑으로 실질적으로 성경의 사랑이 그렇다. 사랑은 오래 참으며 용서하는 사랑의 외적 형상을 말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내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며 사랑한다고 할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일반인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현상을 얘기하는 것이다.
진짜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굉장히 심오한 행위이다.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소유하기 쉽지만 진짜 소중한 것은 손에 넣기가 어려우며 엄청난 과정이 필요하며 실패할 확률도 크다. 시몬느 베이유는 인간이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한다. 엄마가 자기 애를 사랑함은 애의 특성을 알아 거기에 맞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동 교육은 일률적으로 학교를 보내고 과외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애의 특성을 파악하여 홈스쿨 내지는 홈스터디로 애의 재능을 계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발명가 에디슨이다.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으로 갈라져 있다. 인식은 그거 어떻게 하는데 하는 과정이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윤리와 도덕의 철학이다. 인식은 인간이 정신을 가졌기에 자연 발생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면서 인식을 소홀히 하고 있다. 인식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과정이다. 대개 우리가 아는 것은 듣고 아는 것인데 내용이 틀리면 다 가짜라는 것이다. 유튜브나 카톡이 그러하다. 그래서 요즘 철학자들은 현대사회를 탈진실의 사회라고 한다.
그래서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를 알아도 아는 과정이 정확해야 하며 판단이 옳아야 한다. 현대사회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나부터 살자며 도망간다. 나부터 살자고 하는 순간에 공정성이고 법이고 뭐고 없어진다. 모든 분야가 그렇게 흐르는 탈진실의 시대이다. 모든 게 내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 마음속에 하느님이 활동할 수 없어진다.
인간은 능력과 재능이 다 달라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다 할 수 있는 게 도덕과 윤리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양심을 들여다보지 않고 모른척한다. 우리나라가 경제 수준이 높으며 잘 사는 나라이지만 행복 지수는 낮다. 굴지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도 불행한 사람이 많으며, 그들에게 뭐가 더 있어야 행복할 거냐고 물으니 ‘시간’이라고 했다.
사랑할 대상이 있으면 행복할까? 사랑은 상호적이며 대부분의 사랑은 자기 위주의 자선으로 진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그 사람을 위로해주고 같이 기뻐하고 함께 존재론적으로 깊이 서로가 일치되는 것으로 사랑의 특징은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은 끊임없이 듣고 말하고 있지만, 도대체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반문해보면 긴가민가하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니다.
사유와 삶의 일치는 진리의 빛이라고 했다. 베이유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소명으로 고통을 듣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짧은 인생 내내 불행의 동반자가 된 가톨릭적 삶을 살았다. 그녀의 저서 ‘뿌리내리기’에서 하나의 진리는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진리이다. 실재와 직접적인 만남을 바라는 것이 실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짜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하느님께 하나도 숨김없이 고백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의집중과 교감, 실재와 일치이다. 사랑은 교감과 일치를 추구하며 진실을 통찰하기 위한 노력이 주의집중이며 사랑의 형태이다. 주의집중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실질적으로 보인다. 뭐가 진실과 대면하지 못하도록 할까? 현대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진실과 대변하지 못하게 자꾸 흘러간다. 그게 카톡이다. 모여서 대면하면 사실에 대해서 소통하여 공통의 분모를 찾아낸다. 그러나 카톡은 그것을 막아버린다. 한 사람이 이렇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주르륵 합세하고 만다. 그러니 반대 의견을 막아버린다.
실질적으로 사랑은 위로가 아니라 빛이다. 빛이라는 말은 상대의 아픔에 동감하면서 그 아픔이 어디서 온 건지 알려주는 게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은 일단 어떤 대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실체를 밝혀주는 것이다. 사랑은 진리와 거리에 비례한다. 사랑의 크기가 작으면 불행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 이는 내 안의 진리(하느님)와 관계가 낮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사랑은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을 원하며 진실을 알고자 하며 그 안에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길 원한다.
사랑은 1대 1이다. 대상에 대한 주의집중이며 두 마음과 실존이 서로 몰입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진리를 부정하면 순수한 참된 사랑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진리와 사람은 함께 간다. 오늘의 세상은 사랑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과학자의 탐구는 사랑의 개념을 배제하고 있으며, 정치도 국민을 사랑하는 것과 무관하다. 모든 분야가 사랑이 빠진 직업의식이며 인식론의 결여이다.
사랑의 출발점은 진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로 변하지만, 진실은 불변이다. 사랑은 진실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힘이다. 사랑은 실제의 모습에서 진리의 빛을 발견하는 지혜이고 앎을 완성해 주는 빛이다. 오늘날 과학의 시대로 물질 만능으로 탈진실 시대로 가는 것은 사랑의 부재이다.
2024. 07. 15 앞산밑북카페. 제주대학교 철학과 이명곤 교수 강의에서.